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57> 惠公과 懷公

bindol 2021. 6. 7. 05:28

- 베풀 혜(心-8)제후 공(八-2)품을 회(心-16)

 

중이는 구범의 말대로 목공의 사자에게 정중히 사양하는 말로써 답한 셈이다. 중이도 내심으로는 귀국해서 왕위에 오르고 싶었다. 그가 나라를 떠나 떠돌면서 버틴 것도 결국 왕위에 오를 기회를 잡으려 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짊과 올바름을 저버려서는 왕위에 올라도 떳떳하기 어려울 것이니, 고작 목숨이 아까워 도망했다가 자리를 탐해서 돌아온 자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 따라서 어짊과 올바름을 한결같이 지키면서 왕위에 올라야 했다. 구범은 그 점을 일깨워준 것이다.

진나라 헌공이 분란의 씨앗을 뿌리게 된 것도 어짊과 올바름으로 통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희가 태자 신생을 죽음으로 내몰고 다른 공자들이 망명한 것 또한 군주의 무도함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헌공이 죽자 대부들이 여희와 그 아들을 죽인 것도 결코 어짊과 올바름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통치와 정치의 근간을 바로 세우는 일이 급선무다.

사사로운 욕심으로 즉위해서는 정당성에서 문제가 될 수 있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즉위한 장본인이 어짊과 올바름의 결여로 말미암아 그릇된 정치를 펼 공산이 크다. 실제로 공자 夷吾(이오)가 목공의 도움을 받아 중이 대신 즉위하여 惠公(혜공)이 되었는데, 그는 욕심이 많아서 다른 제후나 신하들과 한 약속을 예사로 저버리고 도리에 어긋난 짓을 거듭하다가 신망도 잃고 민심도 잃었다. 통치가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혜공은 간신히 권좌를 지키며 15년을 버티다 병으로 죽었고, 그를 이어 즉위한 懷公(회공)은 곧바로 신하들에 의해 쫓겨나 죽임을 당했다. 이윽고 목공의 도움으로 중이가 정권을 차지했다. 드디어 즉위한 중이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패업을 이루었다. 그가 바로 文公(문공)이다.

춘추시대 晉(진)나라는 강성한 나라였으나, 군주에게 어짊과 올바름이 없을 때는 나라가 위태로워졌다. 심지어 秦(진)나라의 군주가 간섭하여 즉위 대상자를 물색할 정도였으니, 아무리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도 부덕한 군주 아래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셈이다. 어짊과 올바름이야말로 통치의 바탕이며 정치의 보배였던 것이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