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다(少)의 반대말인 많다(多)는 순우리말인가? 한자에서 온 우리말일까? 필자는 우리말에 억지로 한자를 끼워다 맞추는 한자부회(漢字附會)를 꺼린다. 그러니 견강부회(牽强附會)하듯 한자부회하여 ‘많다’가 한자에서 온 우리말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나름 그럴 만한 일리가 있어서 하는 판단이다. 滋味(자미)에서 온 재미, 종용(從容)에서 온 조용, 침채(沈菜)에서 온 김치, 간난(艱難)에서 온 가난, 작난(作亂)에서 온 장난처럼 많다도 한자에서 유래한 낱말일 수 있다. 우리말이 한자에서 유래했다고 우리말이 중국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건 억지다. 가령 김치가 한자어 침채에서 왔다고 김치가 중국 것이라는 주장은 도무지 말이 안된다. 김치는 한국 음식이다. 단지 우리말 낱말이 중국 한자를 빌려 썼다. 신라시대 이두와 향찰도 그리 했다. 우리말은 한자를 빌려서 국어의 폭과 다양성을 넓힐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말 많다는 어느 한자에서 왔을까? ①늦을 만(晩) ②게으를 만(慢) ③부처님 만(卍) ④찰 만(滿) ⑤일만 만(萬). 이런 문제가 대입수능 시험에 나오면 큰일 난다. 정확한 답(正答)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능한 해답(解答)은 있을 수 있다. 이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답과 거리가 멀 ① ② ③번은 빼도 된다. 답은 ④ 아니면 ⑤번이다. 컵에 물을 많이 따르면 차서 넘치기에 찰 만(滿)이 많다가 되었을까? 아니면 십이 천 개(Ten Thousand)나 있는 만이 많다가 되었을까? ④번도 틀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필자는 ⑤번을 찍겠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만약이나 만일이라는 낱말을 따져 살피니 그렇다. 만일은 아주 많은 만(萬)에 하나(一)라는 뜻이다.
결국 많다는 滿보다 萬에서 온 낱말임을 추정할 수 있다. 즈믄 천(千)이 열 개나 있어야 만이다. 만의 순우리말은 드먼이다. 만주어로는 투먼(Tumen, 圖們)이다. 드먼 혹은 투먼 10,000은 옛날에 아주아주 많은 수였을 것이다. 만 개의 지류를 가진 드먼강, 또는 투먼강을 두만강이라 부른다. 한자 음을 빌려서 두만강(豆滿江)이라 쓰던데 만의 한자 뜻까지 살려 빌린다면 萬을 쓰는 만경강(萬頃江)처럼 두만강(豆萬江)이라 쓰는 게 더 맞을 것같다.
아주 많은 것을 뜻하는 숫자인 萬은 위에 풀 초(艸), 밑에 긴꼬리원숭이 우(禺)가 합쳐진 글자다. 아무리 뜯어봐도 숫자 만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萬은 무슨 뜻을 가진 한자일까? 어느 벌레 모양을 그린 글자다. 바로 전갈(scorpion)이다. 전갈 모양을 그린 한자가 만(萬)이다. 줄여서 만(万)으로 쓰면 영 전갈같지 않다. 전갈은 알을 아주 많이 낳기에 전갈 만(萬)은 아주 매우 무척 많은 것을 뜻하는 숫자 10,000을 뜻하게 되었다. 만무(萬無)하다는 전갈의 알 갯수 만큼이나 많은 일을 봤지만 그런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나 많은 만복(萬福)을 빌며 만세(萬歲)를 외친다. 이 세상 수많은 것들은 만물(萬物)이다. 다방면으로 수많은 분야를 잘 하면 만능(萬能)이다. 수많은 일은 만사(萬事)다. 아주 많은 백성들은 만백성(萬百姓)이다. 나비효과를 설명할 때 일파만파(一波萬波)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저혼자 천만(萬)금, 만(萬)석꾼 부자가 되려고 만석보(萬石洑)를 지은 조병갑(1844~1911)처럼 과한 욕심을 부리면 화를 부른다. 만(萬)! 과욕하기 쉬운 인간에게 경계를 주는 글자이기도 하다.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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