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산수 시간에 배운 유용한 지식이 있다. 선생님께선 큰 숫자를 읽을 때 네 자리씩 콤마를 찍어서 만-억-조 순서대로 거꾸로 읽으면 된다고 하셨다. 이후로 나는 가끔 대기업들의 재무상태표에서 큰 숫자를 만나면 딱 그렇게 했다. 가령 35,788,965,428,691원과 같이 세 자리마다 콤마로 끊은 숫자를 보면 네 자리씩 콤마를 끊었다. 덕분에 35,7889,6542,8691은 35조 7889억 6542만 8691원으로 쉽게 읽었다.
세 자리씩 천 단위로 끊어 읽는 것은 서양식이다. 미국인들은 35,788,965,428,691을 35 Trillion 7 Hundred 88 Billion 9 Hundred 65 Million 4 Hundred 28 Thousand 6 Hundred 91으로 읽는다. 저들에겐 그리 끊어 읽는 게 편하겠지만 우리에겐 무척 불편하다. 그런데도 한국인의 숫자 표기는 전적으로 서양식을 따르고 있다. 왜 읽는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그렇게 하고들 있을까? 필자 머릿속으로 대충 짐작하기로는 그렇게 한 게 불과 100년도 안된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일본의 강점기에 서양식 은행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저들이 천 원 이상의 숫자에 천 단위로 콤마 넣는 걸 보고 그냥 그러려니 따라했을 가능성, 또 하나는 8·15광복 후 중앙 한국은행이 시중 민간 은행들에게 그리 하도록 전면 시행 행정지침을 내렸을 가능성이다. 어찌 되었든 순리보다 모방이나 강제로 그리 된 것같다.
숫자가 조를 넘어서면 아무리 천 단위의 숫자 표기에 능숙한 은행원들도 읽기 매우 힘들다. 실제로 은행을 10년이나 다닌 아내에게 72,835,788,965,428,691을 어떻게 읽는지 물었는데 귀찮은지 답변을 피했다. 만 원 단위로 끓으면 7,2835,7889,6542,8691이라 7경 2835조 7889억 6542만 8691이라 금방 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숫자 끝자리부터 만 단위로 끊는 우리식 숫자체계는 만(萬)-억(億)-조(兆)-경(京)-해(垓)-자(秭)-양(穰)-구(溝)-간(澗)-정(正)-재(載)-극(極)으로 커져간다. 아무리 큰 글자라도 쉽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천 단위로 끊는 미국식 숫자체계인 Thousand-Million-Billion-Trillion-Quadrillion-Quintillion-Sextillion-Septillion-Octillion-Nonillion-Decillion-Undecillion-Duodecillion-Tredecillion-Quattuordecillion-Quindecillion을 쉽게 읽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네 만이나 억 등에 해당하는 하나의 영어 낱말이 없기 때문이다. 1만은 10 thousand이며 1억은 1 Hundred Million이다. 반대로 Million이나 Billion 등에 해당하는 하나의 국어 낱말도 없다. 1 Million은 100만이며 1 Billion은 10억이다. 그나마 세 자리수와 네 자리수가 서로 겹치게 되는 10의 12제곱인 Trillion과 조, 24제곱인 Septillion과 자, 36제곱인 Undecillion과 간, 48제곱인 Quindecillion과 극은 서로 콤마 자리가 같으니 뜻이 같다. 그래도 굉장히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식대로 만원 단위로 끊는 게 우리 숫자 문화에 당연히 어울린다. 하지만 천원 단위로 끊어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제도라는 관습적 명분을 어기기 힘들다. 백년도 안된 습관적 명분에 따른 제도라도 그에 따르는 게 대세면 바꾸기 힘들다. 세상만사 다 그렇다. 잘못된 제도가 혼란하며 부당해도 ‘그냥 그러려니 그러네’하고 여전히 따라 간다. 사람 사는 세상 참 거시기하다.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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