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가장 큰 숫자는? 인류학 지식에 의존하기 전에 우선 머릿속에 입력된 스몰데이터를 돌리고 굴려서 원시적 상상력을 동원하면 얼추 답할 수 있다. 유인원(類人猿)으로부터 분화된 인간의 종류인 인류(人類)가 약 200만 년 전에 나타나고 약 20만 년 전부터 슬기로운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활동할 때까지 숫자 개념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애를 조금 낳으면 적고 그 이상 낳으면 많고, 사냥감이나 열매가 부족하면 적고, 풍족하면 그냥 많다고 여겼을 것이다. 다만 적고 많음을 따지는데 다른 동물들보다는 분별력이 살짝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3만~4만 년 전부터 등장한 슬기롭고 슬기로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비로소 하나 둘 셋 등의 숫자 개념을 따졌을 것이다. 이들 현생인류는 적고 많은 다소(多少)를 숫자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약 1만 년 전에 채집이 아닌 농사, 수렵이 아닌 유목으로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하나 둘 셋보다 많은 숫자가 필요해졌을 것이다. 지금도 유용한 열 손가락(digit)은 숫자를 헤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면서 벽 기둥 점토판 등에 뾰죽한 꼬챙이로
등을 그으며 숫자를 썼을 것이다. 그러다 숫자를 뜻하는 단어를 말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령 우리 조상들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이라고 했겠다. 처음에는 열이 가장 큰 숫자였다. 그러다 열보다 큰 수가 필요하게 되면서 두 배나 많은 스물이라는 단어가 발명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많은 수를 어떻게 말하게 되었을까?
이상부터는 열과 비슷한 뜻인 ‘흔’을 썼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발음이 좀 변했다. 셋의 열인 셋흔→서른, 마름모나 마방진처럼 4를 뜻하는 마의 열인 마흔, 다섯의 열인 다섯흔→쉰, 여섯의 열인 여섯흔→예순, 일곱의 열인 일곱흔→일흔, 여덟의 열인 여덟흔→여든, 아홉의 열인 아홉흔→아흔.
이렇듯 30부터 90까지 ‘흔’ 계열의 숫자가 그런 뜻이라는 설에 근거가 있나? 물론 있다. 그냥 그런 대로 그럴 듯한 근거가 아니라 빼도 박도 못하는 명백한 팩트다. 흔하다에서 흔!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흔하다는 열(10)처럼 많다는 뜻이니 그렇다. 열이 하나 둘도 아니고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이나 있으니 서른 마흔 쉰 예순 일흔 여든 아흔이다. 원시사회에서 아흔이라는 숫자는 세기 힘들 정도로 가장 많은 수였을 것이다. 소를 아홉 마리나, 쌀을 아홉 가마니나 가지고 있었다면 대단한 부자이자 권력자였을 것이다. 지금도 딱 그 정도로만 많게 가지면 좋으련만… .
이후 숫자 개념은 폭발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가히 숫자 폭발이었다. 부도 많아지고 권력도 커졌다. 이는 6000여년 전 자아 폭발로 이어졌을 듯하다. ‘자아 폭발’책에서는 이를 인류의 타락으로 규정짓는다. 이 시대는 또 뭐라 규정지을 수 있을까? 인간이 제조한 온갖 물질들이 아흔 수준을 넘어 너무 흔해져서 마구 버려지는….
박기철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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