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윤인현의 한시(漢詩) 기행] ⑥ 이백(李白)의 봉황대(鳳凰臺)와 우국지정(憂國之情)

bindol 2021. 7. 25. 04:27

아름다운 경치 바라보아도 떨칠 수 없던 국가 근심

▲ 중국 강소성 남경 이수(二水) 근처에 위치한 봉황의 조각상이다. 저 멀리 봉황각이 보인다.

▲ 중국 안휘성 채석기[우저기] 이태백 기념관에, 이백과 고력사·양국충 그리고 번(番)의 사신이 있는 장면의 모형이다. 번의 사신이 외교 문서를 가져왔는데 어느 누구도 답신을 쓸 수 없다고 하자, 하지장의 추천으로 불러온 이백이 글을 쓰기 전의 모습이다. 현종 곁에서 전권을 행세하던 환관 고력사가 신발을 벗기고, 양귀비의 사촌오빠 양국충이 벼루에 먹을 갈고 이를 번의 사신이 지켜보고 있다. 현종의 혜안을 가린 두 간신을 이백다운 기지로 두 사람을 희롱하였다. 붓을 들고 있는 이백의 모습이 호기롭다. 이후 이백은 벼슬자리에서 쫓겨났다.

▲ 봉황대에서 내려다 본 남경 시내의 모습이다.

 

이백, 당나라 황실 간신배 모함으로 쫓겨나 …  금릉 여행 중 지은 시
1~4구 봉황대 주위 모습 5·6구 눈앞 보이는 풍경 노래 … 7·8구 감상

 

이백(李白, 701~762)은 성당(盛唐) 시대의 시인으로 자(字)는 태백(太白)이고 호(號)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출생지는 농서( 西)·사천(四川) 등 여러 설이 있다. 어머니가 서역인으로 추정되는 바, 이백은 혼혈인일 수도 있다. 촉땅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젊은 시절부터 칼을 휘두르며 의협심이 남달랐다.

이백이 유년시절에 사천성(四川省) 미주(眉州)의 상이산(象耳山)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중도에 싫증이 나서 포기하고 내려오던 길에 시냇가에서 한 노파가 도끼를 갈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무엇하느냐고 물으니,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고 하였다. 마부성침(磨斧成針)의 고사가 유래된 일화이다.

그 일로 인해 학업에 매진하게 되었다.

25세쯤 사천을 떠나 시우(詩友)를 사귀고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관직에 추천해줄 인사를 찾아다녔다.

도사(道士) 오균(吳筠)과 옥진공주(玉眞公主, 당 현종의 여동생) 그리고 하지장 등의 추천으로 42세 때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된 이백은, 현종(玄宗)의 총애를 받아 황실에서 지내는 동안 술을 즐기면서도 바른 소리를 내는 신하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이백은 황실에서 목격한 환관 고력사와 양귀비의 사촌오빠 양국충의 월권행위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그들을 망신 주는 행위까지 과감히 행하다가 결국 그들의 모함으로 벼슬길에서 쫓겨나 다시금 천하를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의 16번째 아들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막후에 들어가 재기를 꿈꾸었지만 숙종이 등극하는 바람에 반란의 무리로 낙인되어 유배생활을 하였다.

57세의 나이가 된 이백이 야량으로 유배가던 도중, 예전에 이백이 도움을 주었던 곽자의의 도움으로 양자강 삼협 근처 백제성에서 사면령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강소성 남경과 안휘성 선성을 유람하였고 마지막 노년은 집안 아저씨벌 되는 당도령(當塗令)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안휘성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천재시인으로 역대 중국시인 가운데 시선(詩仙)으로 일컬어진다.

<등금릉봉황대>는 이백이 당나라 황실에서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쫓겨난 후(744), 747년 금릉을 여행하면서 지은 시이다.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
(금릉 땅 봉황대에 오르다) 이백(李白)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었는데,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봉황 가고 대는 비었는데 강은 절로 흐르네.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유).
오나라 궁전의 화초는 깊숙한 길에 묻혔고,
吳宮花草埋幽徑(오궁화초매유경),
진나라 의관은 오래된 무덤이 되었네.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삼산은 구름에 가려 위만 보이고,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이수는 백로주에서 나눠졌네.
二水中分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
온통 뜬구름이 해를 가리니,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장안마저 볼 수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케 하네.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등금릉봉황대>는 이백이 최호의 <황학루> 시를 보고 각필( 筆)한 후, <황학루>보다 더 나은 시를 짓기 위해 지은 시이다.

1구에서 4구까지는 봉황대의 주위 풍경을 노래하였고, 명구로 평가 받은 5구와 6구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노래한 것으로, 혹자는 이 5구와 6구의 대구는 최호의 시보다 낫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리고 7구와 8구는 감상이다. 봉황대는 비어 있어도 강물은 예전처럼 잘도 흐른다. 그러나 지금 조정에는 고력사와 양국충이로 대표되는 간신들에 의해 장래가 불안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경치를 대하여도 마음 한 구석엔 나라에 대한 근심이 앞선다. 따라서 이 한시는, 이백의 시 중에서도 유교적 배경의 주제인 우국지정(憂國之情)을 묘사한 대표적인 시이다.

 

인하대학교 교양교육원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