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일 임기를 시작한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업무 첫 날 모습. /IMF 홈페이지
부자는 싸우지 않는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국제 금융계에서 미국이 그러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통화 질서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지만, 미국은 대꾸하지 않는다. 임기응변으로 버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나라 대부분은 금본위제 복귀를 희망했다. 그러려면 전쟁 중에 미국에 집중된 금을 다시 분산해야 했다. 미국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미국만 금본위 제도를 고수하고, 다른 나라들은 달러화와 교환 비율을 지키도록 했다. 브레턴우즈 체제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기본 철학은 ‘달러화=금’이다. 미국이 공급하는 달러화가 금과 똑같이 대접받으려면 유사품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1945년 출범한 국제통화기금(IMF)에는 세계의 중앙은행인데도 화폐 발행 기능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름마저 ‘기금’으로 낮췄다.
그런데 1960년대 말 위기가 찾아왔다. 전 세계 무역량 증가를 보면, 유동성이 늘어나야 했다. 그러나 미국만 보면, 지속적 무역 적자로 달러화 공급이 과잉이었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모순을 인식한 프랑스가 달러화를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고, 다른 나라들이 가세했다. 시스템 붕괴와 금의 급격한 유출 압력을 받은 미국은 한발 물러나 IMF도 약간의 화폐 발행 기능을 갖도록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특별 인출권(SDR)이다. IMF 회원국 중앙은행끼리 결제할 때 쓰는 돈이다. 오늘날 실물 없이 쓰이는 가상 화폐의 원조다. 하지만 미국은 그것을 돈으로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특별 인출권이라는 기괴한 말을 붙였다. 그리고 발행이라는 말 대신 배분(allocation)이라는 단어를 골랐다. ‘한국은행권 발행’을 ‘한국은행 인출권 배분’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의도적으로 유발한 생경함이다.
미국은 자기가 만든 SDR을 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돈인데 돈이 아니니, 자식인데 자식이 아닌 홍길동 신세다. 어제는 홍길동 신세의 서자전(庶子錢) SDR의 52년째 생일이었다. 미국이 52년째 임기응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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