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차현진의 돈과 세상] [32] 금융실명제 공포

bindol 2021. 8. 12. 04:48

[차현진의 돈과 세상] [32] 금융실명제 공포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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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8.12 00:00

 

 

제6공화국이 출범할 때 사회의 기대와 요구는 아주 컸다. 사회 원로들로 구성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민추위)는 인권 신장, 지역감정 해소, 기업 집중 완화, 노동 3권 보장 등을 두루 담은 두툼한 건의서를 대통령 당선인에게 제출했다. 거기에는 금융실명제도 담겨 있었다.

 

금융실명제 아이디어가 처음 나온 것은 1982년이다. 장영자·이철희 어음 사기 사건 직후 강경식 재무장관이 사채 시장 양성화(7·3조치) 방안의 하나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약속했다. 그러나 불발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그 문제가 제기되고, 대선 후보들은 앞다투어 금융실명제 실시를 약속했다. 노태우 대통령 당선인도 민추위 건의서를 받으면서 다시 다짐했다. 나웅배, 조순 부총리는 1991년이라는 시한까지 못 박았다. 그런데 1990년 1월 3당 합당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3당 합당 직후 임명된 이승윤 부총리의 첫 소견은 금융실명제 유보였다. 금융시장 자금이 부동산으로 흘러가 부동산 투기와 과소비가 촉발된다는 이유였다. 그 말에 김종인 경제수석이 화답하면서 유야무야되었다.

 

결국 금융실명제는 1993년이 되어서야 현실화됐다. 김영삼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3당 합당의 주인공이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헌법상의 대통령 긴급재정명령권을 발동한 것이다. 저녁 7시 국무회의에 소집된 장관들도 놀랐고, 8시 긴급 뉴스를 듣던 국민도 놀랐다.

 

1993년 오늘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실시에 관한 긴급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때는 부작용과 실패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1년 뒤 돌아보니 실명 확인율은 90%가 넘었고, 큰 부작용은 없었다. 가명과 차명으로 밝혀진 것은 전체 금융 자산의 2%에 불과했다. 고작 2% 때문에 금융실명제 단행이 11년이나 늦어졌던 것이다.

개혁할 때 가장 힘든 일은 결심하는 것이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음을 다잡으면, 걱정했던 것보다 일이 쉽게 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