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차현진의 돈과 세상] [31] 독일의 축복, 카를 블레싱

bindol 2021. 8. 5. 05:26

Dr Karl Blessing, President of the Deutsche Bundesbank, 1 Jan 1958~31 Dec 1969 /독일연방은행 홈페이지

 

화폐경제는 중앙은행과 화폐와 주권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논리적으로는 주권(헌법), 중앙은행, 화폐 순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스웨덴의 헌법은 1719년에 제정되었고, 중앙은행은 그보다 빠른 1668년 설립되었다. 그래서 스웨덴 헌법에는 릭스방크라는 고유명사가 등장한다.

 

독일의 순서도 이상하다.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이 1948년 도이치마르크라는 신화폐부터 발행하고, 이어서 1949년 헌법이 제정되었다. 분데스방크(중앙은행)는 한참 뒤인 1957년 설립되었다.

 

분데스방크 설립이 늦었던 것은, 나치의 악몽 때문이다. 히틀러는 중앙은행(제국은행)을 전쟁 도구로 이용했다. 재정정책 대신 통화정책을 통해 아우토반을 건설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연합군은 그런 일의 재발을 막으려고 1948년 실험적인 중앙은행(란더방크)을 세웠다. 은행 지점장들끼리 모여서 통화정책을 결정하고, 정부는 어떤 입김도 미칠 수 없는, 오늘날 유럽중앙은행(ECB)의 원조였다. 그러나 그 중앙은행은 독일이 잠재적 전쟁 집단이라는 생각을 깔고 있다. 그것이 불쾌했던 독일인들은 연합군이 만든 중앙은행을 해체하고 다시 세웠다. 지금의 분데스방크다. 미 연준에 뒤지지 않는 독립성을 가질지는 불확실했다.

 

그때 독일 사람들은 초대 총재 카를 블레싱을 믿었다. 그는 나치에도 호락호락하지 않아 제국은행 이사에서 해임된 사람이다. 그 무렵 애국 장교들이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했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로도 소개된 ‘발키리 작전’이다. 그러나 1944년 7월 20일 폭탄이 제대로 터지지 않아서 히틀러는 살고, 주동자들은 전원 즉결 처형되었다. 만일 그들이 거사에 성공했다면, 블레싱에게 중앙은행을 맡기려고 했다.

 

결국 블레싱은 총재가 되었다. 지난 1일은 그가 이끄는 분데스방크가 출범한 날이다. 예상대로 블레싱은 12년간 총재로 일하는 동안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뚝심 있게 물가 안정을 지킴으로써 라인강의 기적을 가능케 했다. 블레싱은, 독일 경제의 블레싱(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