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난자의 한줄로 고전

佳緣

bindol 2021. 9. 21. 07:11

佳緣

 

“…17세에 짝이 돼 나와 41년간을 같이 살았다. 내가 양친을 봉양하고 제사 받들며, 친척을 친히 하고, 벗을 사귀는 데 세군(細君)이 내 뜻에 순종해 맞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략) 내 집이 가난했지만 세군은 가난한 것을 가지고 내게 누를 끼치지 않아서 내가 그 때문에 탈 없이 날마다 옛 책을 읽을 수 있었으므로 위로는 당우(요순)시대의 고문(古文)과 아래로는 제자백가를 섭렵해 고문의 취지를 알 수 있었다. (하략)”

미수 허목(許穆·1595∼1682) 선생께서 친히 아내의 묘명(墓銘)에 적은 글월을 보고(‘미수기언’) 가슴에 많은 소회가 일었다. 첫째는 세군으로 표현된 아내 이 씨의 미덕이요, 둘째는 지아비의 인품이었다.

그의 ‘자명비(自銘碑)’에 의하면 늙은이 허목은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스스로 호를 미수(眉수)라 하고, 나면서부터 손에 문자(文字) 무늬가 있으므로 자를 문보(文甫)라고 했다. 고문을 즐겨 읽으며 몸에 허물이 적게 하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스스로 명(銘)하기를 “말은 행동을 숨기지 못하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하며 한갓 요란하게 성현의 글을 읽기만 좋아했지 하나도 과오를 보완해가지 못했기에 돌에다 새겨 뒷사람들이 경계 삼도록 하노라”고 적었다. 송시열과 대립된 예송문제로 물러나 있다가 여든 살에 복귀해 우의정에 올랐다. 죽은 지 23년 만에 우의정에 재배된 남편을 따라 정경부인에 추은된 이 씨 부인은 오리 이원익 정승의 손녀딸이기도 하다.

 


“… 살았을 때 기뻤음은 화순해서요, 죽었을 때 생각남은 슬퍼서라오. 간결하던 그 풍도, 방정(方正)하던 그 규범. 이제 모두 끝났기에 그 사연 무덤 앞에 기록함은 서로 알아준 정의 보답이라오.” 나는 특히 묘명의 그 마지막 구절을 좋아한다. “세군은 가난한 것을 가지고 내게 누를 끼치지 않아서”. 이 대목을 가슴에 새기려던 내 젊은 날이 떠오른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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