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cautus atque non vocatus deus aderit.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神)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의 묘비명이다. 또한 그의 집 현관문에서도 만날 수 있는 글귀다. 이 글귀는 심리학자인 융을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융은 신앙이 있었지만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융의 수제자인 폰 프란츠는 자기 스승을 가리켜 ‘큰 샤먼’이라고 불렀다. 샤먼은 저승의 신들을 불러 환자의 병에 대해 묻는다. 이런 입무(入巫)의 과정은 융의 ‘개성화 과정’의 원초적인 유형이다. 그는 자기 연구의 주요 관심사는 노이로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누미노제(numinose) 즉 신뢰와 함께 두려움을 자아내는 ‘신적인 것’에 대한 접근이라고 밝혔다. 누미노제를 체험하는 사람은 질병의 저주에서 풀려나는데 그것은 병 자체가 누미노제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라 했다. 융은 신과 영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내적(內的)인 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만년에 “신을 믿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신을 안다”고만 답했다. 그리고 “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착각이다. 나는 신성(神性)의 원형의 존재를 증명할 뿐이다. 우리가 심리학적으로 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라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융은 ‘무의식’이 자율성을 가진 창조적 조정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주역의 점(占)도 무의식이 그 자체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해 의식을 자극해 무의식을 깨닫도록 하는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는 주역점도 능숙하게 볼 줄 알았다.
“신에는 방소(方所)가 없고 역(易)에는 체(體)가 없다”고 공자는 ‘계사전’에서 말한다. 형체가 없는 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신은 부르면 오고,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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