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날 죽이고 있구나, 고기야, 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넌 나를 죽일 권리가 있어. 난 여태까지 너처럼 거대하고 아름답고 태연하고 고결한 존재를 보지 못했단다. 내 형제야, 이리 와서 날 죽이렴. 누가 죽이고 누가 죽든 난 상관하지 않으마!”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중편소설 ‘노인과 바다’의 한 대목이다. 어부 산티아고 노인은 멕시코만에 배를 띄우고 혼자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84일 동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처음 40일은 한 소년과 함께 지냈으나 소년의 양친이 노인의 운이 끊어진 것이라며 소년을 다른 배에 태웠다. 85일째 되는 날, 노인은 다른 날보다 더 멀리 나갔다. 한낮에 큰놈이 물렸다. 믿기지 않을 만큼 무거웠다. 거대한 돛새치는 배를 더욱 먼 바다로 끌고 나간다. 밤낮이 바뀌는 동안 그들의 싸움은 계속된다. 몇 날 몇 밤을 노인은 바다에서 혼자 하늘·바다와 대화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합일(合一)을 경험한다. 이제 그는 고기가 자신을 죽여도 좋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내 형제야, 이리 와서 날 죽이렴. 누가 죽이고 누가 죽든 난 상관하지 않으마.”
노인의 입에서 그런 독백이 흘러나왔다. 일대일 사투에서 그는 이미 생사 구분을 넘어선 자연과의 합일, 초탈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었다. 죽음에의 대긍정. 이런 경지란 어느 극점을 통과한 뒤라야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사흘째 날이 밝았다. 고기가 수면에 나타났다. 노인은 작살로 고기의 심장을 뚫고는 배에 묶었다. 1500파운드가 넘는 큰 고기를 매달고 항구로 돌아오는 동안 상어떼가 나타나서 고기는 뼈만 남았다. ‘종국에 우리는 무엇을 손에 쥘 수 있는가’란 전제를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 ‘승리’란 있는가? 자연 앞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상처뿐인 영광일지도, 어쩌면 그 ‘이름’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밍웨이는 늘 대작을 꿈꿨다. 20년 동안이나 쓰려고 별러 왔던 이야기, 이 작품으로 그는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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