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성지는 '신유박해' 때 순교 장소
정조 따르던 신하들, 천주교에 호의적… 정조 사후 정치적 이유로 신자 탄압해 1801년(신유년) '신유박해' 일어났어요
유교 질서 위협한다고 여겨 박해하기도
지난 14일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 5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오늘 귀국길에 올라요. 교황은 여러 행사를 통해 우리나라에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어요. 방한 중 충남 당진의 솔뫼성지와 서산 해미성지에서 아시아 청년들을 만나 대화 나누기도 했지요. 솔뫼성지와 해미성지는 조선시대에 천주교와 관련하여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곳입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기에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를 상징하는 성지가 되었을까요? 그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러 1800년대 조선으로 함께 떠나 봐요.
◇"서학을 금하노라!"
1801년 어느 날, 정순왕후 김씨와 그를 따르는 인물들이 조정에 모였어요.
"마마, 드디어 남인 세력을 싹 몰아낼 기회가 왔습니다."
"남인 중에는 서학을 믿거나 가까이하는 사람이 많으니, 서학을 믿는 자를 처벌하면 남인 세력은 와르르 무너질 것입니다."
"좋소. 서학을 믿거나 가까이하는 자는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시오."
▲ /그림=이창우
1800년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순조가 열한 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어요. 그러자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영조의 계비)가 나랏일을 돌보게 되었지요. 정순왕후 김씨는 노론 벽파 가문 출신으로, 벽파 인물들과 함께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인물이에요. '벽파(僻派)'는 노론(老論)이라는 정치 세력 중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여긴 사람들이고요.
◇천주교 신자 탄압한 '신유박해'
벽파의 생각과 반대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들을 '시파(時派)'라고 부르는데, 이들 중에는 남인(南人)이라는 정치 세력이 섞여 있었습니다. 남인 중에는 천주교를 믿거나, 천주교 신자와 관계가 있는 인물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들은 주로 정조의 편에 서서 정조의 정책을 따르던 사람이었답니다. 그 때문에 정조가 죽은 뒤 권력을 잡은 정순왕후 김씨와 노론 벽파는 서학(西學), 즉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심하게 탄압했어요. 이를 1801년 신유년(辛酉年)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이라고 하여, '신유박해'라고 부릅니다.
신유박해 때 체포된 천주교 신자 가운데 충청도 지역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관아로 끌려갔어요. 이들은 그곳에서 심한 고문을 받거나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지요. 그 후로도 해미읍성 관아에서는 수천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가 목숨을 잃었다고 해요. 훗날 천주교에서는 이름 없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고난을 당하고 죽어간 해미를 순교 성지로 삼았지요.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솔뫼성지
1836년 경기도 용인에서는 한 소년이 프랑스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어요.
"조선인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의 길일 수도 있네. 그래도 세례를 받겠는가?"
"네. 증조할아버지도, 작은할아버지도 이 땅에서 신앙을 지키려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 /그림=이창우소년에게 세례를 준 모방 신부는 1835년 삿갓에 상복 차림을 하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선교사로 온 인물이에요. 이듬해인 1836년 1월 한양에 들어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며 천주교를 전파했지요.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소년은 1821년 충남 당진의 솔뫼라는 곳에서 태어난 김대건이었습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와 작은할아버지 김종한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어요.
세례를 받은 김대건은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듬해인 1837년에 마카오로 건너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신학·철학·지리·역사·라틴어·프랑스어 등을 배웠습니다. 1842년 신학 공부를 마치고 여러 차례 조선에 입국하려 했으나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와 감시가 심해 번번이 실패하고 말아요. 그러다가 1845년에 드디어 조선에 몰래 들어오는 데 성공하지요. 그는 조선 땅에서 천주교를 널리 전파하는 데 힘썼어요. 이후 다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사제로 임명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고, 조선에 돌아와 비밀리에 천주교 신도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러다 1846년에 체포되어 26세의 젊은 나이에 새남터(지금의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한강 모래사장)에서 처형당해 순교하였지요. 그 뒤로 천주교 신자들은 그가 태어난 솔뫼를 성지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유교 전통 위협한다는 이유로 탄압
1800년대 조선에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정말 심했지요? 신유박해 때처럼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유교에 뿌리를 둔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는 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모의 장례와 조상에 대한 제사 풍습이 크게 달랐거든요. 또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주교 교리가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위협하기도 했고요. 천주교를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풍습을 무너뜨리는 종교로 여겨 모질게 탄압한 것이에요. 당시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하려는 서양 선교사들을 조선에 진출하려는 서양 세력의 앞잡이로 생각하기도 했대요.
[함께 생각해봐요]
솔뫼성지와 해미성지 말고도, 우리나라에는 서울 절두산성지, 충북 제천 배론성지, 전북 전주 전동성당 등 전국에 천주교 성지가 많아요. 대부분 박해받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에요. 우리나라의 천주교 성지를 찾아 그곳에 얽힌 역사를 알아보세요.
지호진 |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정재훈 | 교수(경북대 사학과)·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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