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왕, 남의 땅에 숯 몰래 묻어 초승달 모양 땅을 자기 것이라 주장
제5대 신라 임금에 오른 파사왕
본격적으로 월성에 왕궁 만들어서 정사 돌보고, 외국 사신 맞았대요
신라의 왕궁터인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에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됐어요. 지난해 12월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약 3개월 동안 월성 내부의 중심부인 석빙고 주변 지역에서 예비 조사를 벌인 결과, 월성에 왕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과 유물 등이 발굴됐죠. 대규모 발굴 작업을 정밀하게 벌여 그 흔적을 통해 월성에 있던 신라 왕궁의 크기와 모습을 알아낸 것이죠. 월성에 신라의 왕궁이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기록에서는 찾을 수 있었지만, 아직 유적과 유물을 통해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역사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의 임금 중에 가장 처음 월성에 살았던 인물이 있어요. 과연 누굴까요?
◇커다란 나무 상자 속에 있던 잘생긴 아이
신라의 제2대 임금 남해왕 때의 일이에요. 동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배가 흘러들어 가락국 해안에 멈춰 섰어요. 가락국의 수로왕은 해안가로 나가 신하, 백성과 함께 북을 치며 그 배를 맞이해 머무르게 하려고 했죠. 그러나 배는 가락국에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달아나 동쪽의 아진포라는 곳에 이르렀어요. 그 배 주변에는 까치들이 잔뜩 몰려들었죠.
▲ 그림=이창우
이때 바닷가에 있던 아진의선이라 불리는 할머니가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 배를 살펴봤어요. 배 위에 커다란 나무 상자가 있어 열어보니 잘생긴 남자아이가 보물과 노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죠. 할머니가 7일 동안 그 아이를 잘 대접하자 아이가 할머니에게 말했어요.
"나는 본래 용성국의 사람입니다. 왕비의 몸에서 알로 태어나 왕과 신하들이 좋은 징조가 아니라 하며 거대한 상자를 만들어 그곳에 저를 넣었어요. 그러고는 배 안에 넣고 바다에 띄어 보내어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터
이 이야기는 신라의 제4대 임금인 탈해왕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로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어요. 그런데 탈해왕이 월성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삼국유사'에 기록된 탈해왕에 대한 다음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탈해가 어느 날, 토함산 정상에 올라가 돌무덤처럼 생긴 집을 만들고 그곳에서 잠시 머물렀어요. 그때 성 안을 바라보다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터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머물 만한 곳이라 여겨 그곳으로 갔어요.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죠. 그래서 탈해는 꾀를 내 호공의 집 주위에 숫돌과 숯을 몰래 묻었어요. 그리고 다음 날에 호공의 집으로 찾아가 말했죠.
"이곳은 우리 조상이 살았던 곳이오."
"그게 무슨 말이냐? 억지 부리지 말거라."
호공은 어이없어하며 탈해와 다투다가 관아에 이 사실을 아뢰었어요.
"무슨 증거로 이곳이 네 집이라고 우기는 것이냐. 증명을 하지 못한다면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관아에서 관리가 탈해에게 묻자 탈해가 대답했어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대장장이였고, 이 땅은 우리 집에서 대장간을 했던 곳이오. 내가 잠시 다른 지방에 가있는 사이 남이 들어와 산 것이죠. 집 주변을 파보면 그 증거물이 나올 것이오."
"저자의 말이 맞는지 호공의 집 주변을 파 보아라."
관리가 탈해의 말을 듣고 관원들에게 호공의 집 주변을 파게 했어요. 그러자 탈해의 주장처럼 숫돌과 숯 부스러기가 나왔지요. 관리가 호공에게 집을 양보하라고 하자 호공은 순순히 자기가 살던 집을 탈해에게 내주었어요. 결국 탈해는 호공의 집과 초승달 모양의 터까지 차지하게 됐죠. 나중에 탈해의 집이 있던 초승달 모양의 터에 왕궁이 들어서며 월성이 되지요.
◇800년 동안 신라 왕궁이 자리했던 곳
그 뒤, 탈해는 남해왕의 사위가 됐고, 남해왕이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남해왕의 아들인 유리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했어요. 그러다 유리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신라 제4대 왕이 됐고요.
탈해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월성에 왕궁이 세워진 것은 파사왕 때였어요. 파사왕은 신라 제5대 왕으로 유리왕의 둘째 아들 또는 유리왕의 아우인 나로의 아들이라고 전해지고 있어요. 탈해왕이 죽자 신하들이 유리왕의 큰아들보다 파사가 더 위엄이 있고 현명해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지요.
파사왕은 왕위에 오른 지 22년이 되던 해인 101년 초봄에 탈해가 왕이 되기 전부터 살았던 초승달 모양의 터에 성을 쌓고 월성이라고 불렀어요. 그해 초가을에는 월성으로 옮겨 살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월성은 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800여 년 동안 신라의 왕궁이 자리한 곳이 되었죠. 그 뒤로 월성에는 왕이 정사를 돌보던 남당, 신하의 아침 문안 인사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조원전, 왕실의 물품을 보관하는 내황전, 망은루와 월상루 등이 들어섰죠. 지금은 보물 제66호인 석빙고만 남아있지만요.
[함께 생각해봐요]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남긴 다른 흔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죠. 그것이 바로 유적과 유물이에요. 그런데 유적과 유물은 어떻게 다를까요? 알아봅시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감수=문동석 교수(서울여대 사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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