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영조의 늦둥이 아들 '사도세자' 잦은 꾸중에 불안 증세 보이며 횡포 부려
사약 내리면 정조가 왕위 이을 수 없게 돼… 1762년, 뒤주에 가둬 죽게 했어요
'사도세자도 우등생으로 만드는 과외'라는 전단이 내붙는 등 요즘 사도세자가 주목받고 있어요. 조선의 제21대 임금 영조와 그의 아들 세자 선(사도세자)의 불행하고도 비극적 운명을 그려낸 영화 '사도'가 한 달 만에 600만 관객을 넘어서며 화제가 된 데 따른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국·영·수를 강조한 아빠(영조)와 예체능을 좋아한 아들(사도세자)의 갈등이 핵심"이라고 비유하기도 했죠.
아들을 훌륭한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너무 엄격하게 대했던 아버지 영조와,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으로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세자 선. 도대체 사도세자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됐고, 왜 하필 뒤주에 갇힌 것인지 살펴볼까요?
◇사랑과 기대가 실망과 미움으로 바뀌고
1735년, 영조는 42세의 늦은 나이에 둘째 아들을 얻었어요. 후궁 정빈 이씨가 낳은 첫째 아들 효장세자는 10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고, 후궁 영빈 이씨가 낳은 둘째 아들이 바로 이선이었지요.
▲ /그림=이혁
영조는 어렵게 얻은 왕자 이선을 즉시 중전의 양자로 삼고 이듬해엔 세자로 책봉했어요. 그만큼 기대가 컸던 것이에요. 어릴 때 세자 선은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 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어요. 그런데 본격적으로 세자 수업을 받기 시작한 10세 무렵부터 아버지의 기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죠. 학문보다 무예를 더 좋아하는 세자 선을 아버지 영조는 못마땅하게 여기며 자주 꾸짖었어요. 세자가 15세이던 1749년에 영조는 자신을 대신해 세자가 나랏일을 돌보도록 했어요. 이렇게 세자나 세손이 왕을 대신해 나랏일을 보는 것을 대리청정(代理聽政)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때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더욱 나빠져요. 세자 이선이 처리하는 일들을 아버지 영조가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에요. 영조가 불같이 화를 내 세자가 추운 겨울 눈 속에 꿇어앉아 3일 동안이나 용서를 구한 적도 있었죠. 세자를 향한 영조의 미움은 점점 심해져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모두 세자의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였대요.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주변 인물들의 탓도 있었어요. 세자 선이 왕위를 잇는 것을 꺼려했던 김상로 등 노론 세력의 일부와 영조의 후궁이었던 숙의 문씨 등이 틈만 나면 세자의 잘못을 영조에게 일러바쳤죠. 이렇게 노론 세력의 일부가 세자 선을 모함했던 이유는 세자를 가르쳤던 스승들이 소론 세력이었기 때문이에요. 노론과 소론은 서인에서 나누어진 당파인데요,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한 처벌을 하자는 서인은 나이가 많은 노장층이어서 노론(老論), 온건한 처벌을 주장한 서인은 나이가 젊은 소장층이어서 소론(少論)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지요.
◇뒤주에 가두는 것은 만주족 풍습?
▲ 영화‘사도’에 등장하는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 /쇼박스 제공아버지 영조의 꾸중이 심해지자 세자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어요. 영조가 국가에 금주령을 내렸는데도 술을 마셨고, 누군가가 자기를 죽이려고 궁녀들 가운데 첩자를 심어놓았다며 함부로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어요. 심지어는 자기 아들을 낳은 후궁까지 옷 수발을 잘 들지 못했다며 죽였어요. 상인들의 돈을 빌려 쓰고는 갚지 않기도 했고요. 아버지 영조가 대리청정을 거둔 계기는 세자가 아버지 몰래 3개월 동안이나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다닌 것이 들킨 거예요. 이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는 커다란 실망과 미움으로 바뀌었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자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터졌어요. 나경언이라는 관리가 세자가 저지른 잘못된 행동 10가지를 조목조목 적은 글을 상소로 올린 거예요.
이에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는 영조를 찾아가 "세자의 정신병과 못된 짓으로 임금의 목숨마저 위태로우니 벌을 내려달라"고 말했고요. 결국 영조는 세자를 불러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했어요. 세자에게 사약을 내리거나 목을 치면 반역죄 등을 저지른 죄인이 되기 때문이에요. 이럴 경우엔 세자의 아들(세손)인 정조도 죄인의 아들이 되어 왕위를 이을 수가 없어요. 사도세자의 자결을 말리는 이가 많자 영조는 뒤주를 가져오라고 명했어요. 이렇게 뒤주에 갇힌 세자가 숨진 사건을 1762년 임오년에 일어난 끔찍하고도 불행한 사건이라 하여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하지요.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건 만주족의 풍습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어요. 유목민인 만주족은 감옥 시설이 없어서 뒤주 같은 나무 상자를 이동식 감옥으로 썼다는 것이에요. 이후 만주족의 지배를 받게 된 몽골에서도 뒤주 감옥이 형벌 도구로 쓰였다고 해요. 하지만 영조가 이걸 참고해 세자를 뒤주에 가둔 것인지는 확실치 않아요. 왜 뒤주가 쓰인 것인지 진짜 이유를 밝혀내는 학자가 여러분 가운데 나오길 기대해볼게요.
[당시 세계는?]
사도세자(1735~1762)가 살던 때에 유럽에선 국가가 무역을 독점해 수입품에 관세를 무겁게 물리고 수출을 장려하는 중상주의 무역정책이 유행했어요. 영국은 인도에서 벌인 프랑스와의 싸움(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이겨 인도를 식민지로 삼는 발판을 마련했답니다.
한편 1762년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발표했어요. 사회계약론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유·사유재산·생명 등의 권리를 갖고, 이를 지키기 위해 계약을 맺어 사회가 형성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1769년엔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된 증기기관의 특허를 취득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전문 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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