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무덤 이름

bindol 2021. 11. 6. 04:42

['광릉(光陵)']

'경국대전' 편찬 등 많은 업적 이룬 세조
단종 폐위, 사육신 죽여 비판도 있지만 자신 묻힐 무덤 병풍석 없애도록 지시
비용 줄이고 간소화해 후대 왕릉의 모범

최근 광릉숲을 뚫고 지나가는 터널 공사가 고속도로 공사의 일환으로 추진되면서 화제가 되고 있어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인 광릉숲의 생태 보전을 우선해야 한다는 환경 단체와, 구불구불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면 사고 위험이 커진다는 건설회사 간 의견 충돌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숲의 이름이 광릉숲인 것은 광릉에 부속된 숲이기 때문이랍니다. 조선시대 '능(陵)'이라면 왕·왕비 신분인 사람의 무덤을 말해요. 과연 누구의 무덤일까요?

단종 폐위했지만, 부국강병 성공한 세조

광릉은 바로 조선 제7대 왕 세조와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이에요. 세조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로 왕이 되기 전엔 수양대군으로 불렸지요. 그는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 등 단종에게 충성하던 강직한 신하들을 없애고 최고 권력을 잡았어요. 1455년 어린 조카인 단종을 협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는 왕으로 즉위하지요. 1456년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한 많은 신하가 단종을 왕으로 복위시키려 했고, 세조에게 발각돼 죽음을 맞아요. 세조에게 반발한 신하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가가 전부 몰살되거나 노비가 되지요. 이후 세조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일생을 보내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생육신(生六臣)이라고 불렀어요. 세조는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왕자 시절을 함께 보낸 형제들과 그 자식들도 죽이거나 내쫓았어요.

게다가 세조는 자신을 도와준 책략가 한명회를 재상으로 삼아요. 한명회는 권력욕이 강해 훌륭한 신하들을 내쫓고 친·인척을 요직에 배치하며, 벼슬을 사고파는 등 많은 악행을 저질렀지요.

 그림=이혁

그렇지만 세조는 재위 기간에 많은 업적을 이루기도 했어요. 조선 통치의 기본이 된 법전인 '경국대전', 고대 삼국부터 고려 말까지 역사를 기록한 '동국통감'을 편찬하도록 명을 내렸지요. 또 나라 살림을 위해 현직 관료들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했어요. 평소에는 화폐로 쓰다가 전쟁 때 화살촉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팔방통보라는 화폐도 만들어 유통했어요. 더불어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국방을 강화하기도 했어요. 또한 세조는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도록 태종 때 실시했던 6조 직계제를 다시 시행했어요. 6조 직계제란 나라의 중요한 일을 최고 합의 기관인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6조에서 왕에게 직접 보고해 지시받는 제도예요. 이처럼 세조는 건국 초기라 아직 약했던 왕권을 튼튼히 했으며, 법전과 여러 서적을 편찬하고, 토지 제도를 개혁해 나라 재정을 나아지게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요. 하지만 조선의 충신을 많이 죽였으며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잔혹한 왕이라는 비판도 피할 수 없지요.

세조의 무덤인 광릉과 단종의 장릉

세조는 말년에 피부병을 심하게 앓다가 1468년 죽음을 맞게 돼요. 그는 자신이 묻힐 무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어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내 무덤에 석실과 석곽을 쓰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은 신숙주·한명회 등 대신들과 아버지 세조의 능 이름을 광릉(光陵)으로 정하고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에 매장했어요. 예종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무덤 내부에 석실을 만들지 않았어요. 관을 그냥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회격으로 대신했지요. 능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 세우는 병풍석도 없앴고요.

광릉은 이렇게 간소하게 꾸며 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인력이나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대요. 그래서 후대 왕들이 왕릉을 만드는 데 모범이 되었고요.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년,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가 죽음을 맞아 광릉에 함께 묻혔어요.

조선 왕릉은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풍수지리에서 좋다고 일컫는 배산임수(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는 지형) 조건을 충족하는 곳에 만들어졌어요. 풍수지리는 지형이나 방위를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해 집·무덤을 짓는 데 알맞은 장소를 구하는 이론이에요. 또한 왕릉의 위치는 도읍지인 한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으로 정해졌어요. 후세의 왕들이 자주 능을 찾아가 참배하려면 궁궐과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왕릉은 대부분 서울이나 경기도 구리·고양·파주 등 궁궐과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있어요.

그런데 조선의 왕릉 중 홀로 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능이 있어요. 바로 세조에게 왕위에서 쫓겨난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이에요.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당시 세조는 단종의 죽음이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하려고 '단종의 시신을 옮기면 삼족을 멸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대요. 그래서 단종은 조선의 다른 왕들처럼 서울이나 경기도가 아닌 강원도 영월에 묻혔답니다.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무덤 이름]

예전엔 신분에 따라 무덤을 다르게 불렀어요. 최고 신분인 왕·왕비가 묻힌 무덤을 능(陵), 세자·세자빈 등 왕족은 원(園), 사대부·장군 등은 묘(墓)라고 했어요. 한편 오래된 무덤 중 주인이 확실하지 않은 것도 있지요. 규모나 출토 유물을 통해 묻힌 사람이 왕·왕비라고 짐작되는 무덤은 총(塚), 신분조차 알기 힘들지만 역사적인 자료가 될 만한 무덤을 고분(古墳)이라고 해요. 고구려의 무용총, 안악 3호분, 백제의 송산리 고분, 신라의 천마총(지증왕릉으로 추정) 등이 있지요.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