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세종이 총애한 노비 출신… 해시계·물시계 발명했어요

bindol 2021. 11. 6. 04:44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어머니 신분 따라 노비 된 장영실, 손재주 뛰어나 궁중기술자로 뽑혀
시간·날씨 관측 기구 많이 발명해 농민 살림 돕고, 세종 권위도 세워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손꼽히는 장영실은 신분 이동이 쉽지 않았던 시대에 관노(관아에 속한 노비) 출신임에도 정3품 벼슬에까지 올랐던 사람이에요. 그가 개발한 과학 기구들이 실질적으로 조선에 많은 도움이 되면서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장영실의 발명품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또 그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관노 장영실,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명나라로

1421년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은 천문관인 윤사웅, 최천구, 그리고 동래의 관노 장영실을 명나라에 파견했어요.

"너희들은 중국에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눈에 익혀 빨리 그것들과 같은 것을 만들어라."

세종은 특별히 장영실에게 "너는 비록 신분이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고 칭찬을 하기도 했지요. 그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로 노비가 아니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천민인 기생이었답니다. 장영실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관노가 되었지요.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어떤 물건이든지 척척 만들어 냈어요. 물건을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그에 대한 소문은 궁궐까지 퍼지게 되었죠. 태종은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솜씨를 발휘하게 하였고, 세종은 장영실을 조선의 많은 인물 가운데 중국의 앞선 과학 문물을 배워올 대표로 뽑은 거예요. 장영실은 중국 명나라 천문 관측 시설에도 직접 가보고, 과학 문물에 관련된 책들을 수집해 이듬해인 1422년 귀국했어요. 그 뒤 중국에서 가져온 자료를 바탕으로 열심히 천문 관측 기구를 만드는 연구를 했지요.

 그림=이혁

1423년, 30대 초반의 장래가 촉망받는 과학자 장영실은 기술 발달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천민 신분을 벗고 궁중기술자가 됐어요. 이후 장영실은 혼천의·대간의·소간의·규표 등 정교한 천문 관측 기구,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인 앙부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현주일구, 낮과 밤의 시간을 재는 일성정시의, 금속활자인 갑인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과학 기구를 만들어냈어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정3품의 지위에까지 오르기도 했고요. 그러나 1442년 장영실은 뜻밖의 사고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돼요. 그가 감독하여 만든 임금이 타는 가마가 허물어져 곤장 80대를 맞고 관직에서 쫓겨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어요.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요.

정확한 시간·날씨 예측이 중요했던 것은

장영실이 발명한 과학 기구들은 시간을 재거나 천문 관측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지요. 당시에는 무엇보다 시간을 잘 알고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천재지변이나 천문 현상이 모두 임금의 탓이나 덕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였거든요. 임금이 신하들과 백성에게 권위를 세우려면 무엇보다 시간을 정확히 알고 날씨를 제대로 예측해야 했어요. 무엇보다 조선은 농업을 산업의 근본으로 삼았고, 백성 대부분이 농사짓고 살았기에 날씨를 예측하고 시간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어요. 세종도 이 점을 중요하게 여겨 학자들에게 날씨나 시간과 관련이 깊은 학문 즉 천문, 역법, 측량, 수학 등을 열심히 연구하게 했고, 날씨와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과학 기구를 만들게 했어요. 혼천의, 자격루, 측우기 등 조선에서 널리 쓰인 기구들은 대부분 세종 때 만들어졌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린 양을 관측하는 측우기는 과연 장영실이 발명한 것이 맞을까요? 측우기는 장영실의 발명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세종의 아들 문종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해요. 1441년 세자 이향, 즉 문종이 측우기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에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비 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으나 정확하게 그 정도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정도를 조사했다'고 해요. 이 기록으로 측우기는 장영실이 아니라 문종이 세자 시절 발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물론 그 과정 속에서 장영실 등 궁중 과학자들의 도움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요.

[당시 세계는?]

비슷한 시기,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는 태양중심설을 주장했어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인간 중심의 지구중심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훨씬 객관적인 우주관이었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완벽하진 않았지만 근대 과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지요.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