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고려 현종 때에도 6월 6일에 숨진 병사들 애도했대요

bindol 2021. 11. 6. 05:13

[현충일]

오늘은 현충일, 순국선열 기리는 날… 모내기 후 조상께 제사 지내던 풍습
'망종' 절기를 현충 기념일로 지정, 나라 위해 목숨 바친 분 떠올려봐요

오늘은 현충일이에요. 한국전쟁 때 목숨을 바친 국군 장병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기는 날이지요. 국립현충원에서는 현충일 기념식이 열려요. 현충탑에 향을 피우는 분향(焚香), 흰 국화꽃을 바치는 헌화(獻花)를 통해 전쟁 희생자들의 영혼이 평안히 잠들기를 바라는 의식이에요. 오늘 오전 10시 전국의 사이렌이 1분간 울리면, 어린이들 모두 묵념을 하면서 순국선열(殉國先烈·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앞서간 열사)들의 죽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요.

현충일이 왜 절기 '망종'과 같은 날일까

그런데 왜 현충일은 365일 많고 많은 날 중에 6월 6일로 정해졌을까요?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은 발발한 지 3년 만인 1953년 8월 28일 제7차 유엔 총회에서 휴전 협정이 맺어졌어요. 그런데 왜 6월 25일이나 8월 28일이 아닌 6월 6일이 현충일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24절기 중 9번째에 해당되는 '망종(芒種)'이 6월 6일 무렵이기 때문이에요. 벼같이 까끌까끌한 낟알 곡식을 한자로 망(芒)이라고 하고, 농부가 모종을 땅에 심는 일을 한자로 종(種)이라고 한답니다. 즉 망종이라는 말 속에는 곡식을 옮겨 심을 적당한 시기라는 뜻이 담겨 있는 셈이지요.

 그림=이혁

우리 속담 중에는 '망종 전에 보리를 베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망종이라는 절기에 우리 선조는 땅에 임시로 심었던 보리를 수확하고 그 자리에 물을 댄 후 벼 모종을 심었답니다. 이것을 모내기라고 불러요. 요즘은 대부분 이앙기라는 기계로 모를 옮겨 심지만, 옛날 조선 시대에는 농민들이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린 다음 물을 채운 논으로 들어가서 모내기를 했지요. 망종 때에는 절기 이름이나 속담처럼 보리 베기와 모내기로 무척 바빴다고 해요. 더불어 보리를 수확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고, 나중에 모내기한 것이 가을 풍년이 들도록 바라며 조상께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있었답니다. 1956년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이 시작된 6월 중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오랜 풍습이 있던 망종 절기(6월 6일 무렵)를 현충일로 정하고 희생자들을 애도하게 된 거지요.

국가보훈처는 현충일(6월 6일), 남침(南侵·북쪽에서 남쪽을 침범함)에 따른 한국전쟁 시작일(6월 25일), 젊은 해군들이 다수 희생돼 영화로도 제작된 제2연평해전(6월 29일)이 있는 6월을 호국보훈(護國報勳·나라를 보호하고 지킨 국가 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림)의 달로 정했어요. 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신 분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구석기·고려 시대부터 죽은 이 애도

1014년 6월 6일, 오늘날의 현충일과 우연히 같은 날짜에 고려의 제8대 왕 현종이 나라를 위해 죽은 병사들의 넋을 위로한 일이 있었어요.

'고려사'라는 역사책에 따르면 현종은 국경 지역에서 희생된 병사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병들의 뼈를 집으로 정중하게 운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 해요. "전장에서 죽은 방수군(防戍軍·국경을 지키는 군사)의 장례를 위해 관청에서 장례 도구를 지급하고, 그들의 유골함을 말에 실어 각각 집에 보내주도록 하라." 방수군은 고려의 중앙군 가운데 일정 기간 국경 지역을 지키던 군인이었어요. 오늘날의 현충일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정신이 아주 예전부터 우리 민족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심지어 아주 먼 옛날 구석기 시대 한반도에도 헌화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돼요. 1983년 충북 청주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약 4만년 전 어린이 뼈 화석 '흥수아이'에게서 많은 양의 꽃가루가 검출됐거든요. "여기 좀 봐. 사람의 뼈 같은 게 있어. 무척이나 오래된 것 같아." 어린이 화석 '흥수아이'의 이름은 화석 발견자이자 이곳 동굴의 광산 개발 책임을 맡은 현장 소장 김흥수씨의 이름을 딴 것이에요. 김흥수 소장은 화석을 발견한 사실을 관계 기관에 알렸고, 관련 학자들이 두루봉 동굴에 찾아와 정밀 조사를 벌였어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석기 시대 사람의 뼈가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것이었죠. 어린이의 키는 115센티미터 정도 되었고, 나이는 다섯 살가량으로 알려졌어요.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는 밝히지 못했죠.

흥수아이의 주변에서 채취한 흙을 분석해보니 가슴뼈, 등 상반신 부분에 집중적으로 많은 양의 꽃가루 성분이 검출되었어요. 꽃 종류로는 국화가 많았는데, 석회암 동굴인 두루봉 동굴에서는 국화꽃이 저절로 나서 자라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누군가가 아이의 주검 앞에 의도적으로 국화꽃을 꺾어 와 놓아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마도 아이의 죽음을 슬퍼한 가족들이겠지요?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의 영혼이 좋은 곳에 가기를 바라면서 그랬을 거예요. 우리가 현충일에 애국선열들의 죽음을 추도하듯 말이에요.

또 발견 당시 흥수아이는 평평한 석회암의 넓적한 판자돌 위에 놓여 있었어요. 일부러 시신을 바로 펴서 판자돌 위에 눕힌 것이지요. 그 위에는 고운 흙을 뿌려두었고요. 그래서 학자들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시신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고, 동굴의 아늑한 곳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짐작한답니다.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