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날씨 예보]
조선시대 기상청 '관상감'
관리 20명 뽑아 천재지변 예측, 측우기로 장마철 강우량 예상
삼국시대부터 천체 현상 관찰해… 백제는 일관부, 고려는 서운관 뒀죠
어제는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立秋)였지만, 가을이라는 말이 무성할 정도로 무더운 날씨였어요. 기상청에 따르면 이런 무더위가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해요.
기상청은 날씨를 어떻게 예측하는 걸까요? 변화무쌍한 기상 변화를 분석해 날씨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랍니다. 그래서 기상청은 기상레이더와 기상위성 등 여러 첨단 장비를 이용해요. 지난 2월부터는 532억원을 들여 구입한 '수퍼컴퓨터 4호기'를 이용해 기상 현상을 분석하고 있어요. 48억명이 1년간 계산해야 할 분량을 단 1초 만에 해낸다고 합니다.
이런 첨단 장비가 없던 옛날에는 날씨를 어떻게 예측했을까요?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조선시대에도 기상청처럼 날씨를 예측하는 관청이 있었다고 해요. 당시에는 해와 달, 바람과 구름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거나 동물의 특이한 행동을 보며 날씨 변화를 예측했다고 해요. 날씨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관청의 관리는 임금에게 벌을 받기도 했답니다.
◇백제의 일관부, 고려의 서운관
백제는 날씨를 살피고 천문을 관측하는 '일관부'라는 관청을 두었다고 해요. 신라에는 '천문박사'라는 관직을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요. 이름 그대로 천문 현상을 기록하고, 날씨를 예상하는 일을 맡은 것으로 전해져요.
고려 때에는 서운관이라는 관청이 기상청과 같은 역할을 맡았어요. 관리를 뽑아 천문학을 배우게 한 뒤 날씨와 천체 현상을 기록하고 그 변화를 예측하는 일을 했어요. 서운관은 조선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세조 때인 1466년 '관상감'으로 이름을 바꾸게 돼요. 관상(觀象)은 '천체가 변하는 여러 현상을 관측한다'는 뜻이에요.
▲ 그림=이병익
세조는 서운관을 관상감으로 바꾸면서 관리 20명을 뽑아 '책력'을 쓰고 날씨와 천재지변을 예측하는 일을 맡게 했어요. 책력이란 일 년 동안의 월일, 해와 달의 운행, 월식과 일식, 절기, 특별한 기상 변동을 날의 순서에 따라 적은 것이에요. 나라의 주요 행사를 치르기에 좋은 날짜와 터를 찾는 것도 관상감의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관상감 관리들은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측우기로 비가 내린 양을 기록해 장마철이 언제 시작되고 비는 얼마나 내릴지도 예측했다고 해요.
◇"개기월식 예측 못 하면 승진 점수 깎아라"
최근에 기상청에서 비가 온다고 예보를 했는데 날씨가 쨍쨍 맑기만 하고, 반대로 비가 오지 않는다는 예보를 했는데 비가 내리는 일이 종종 있었지요? 지난 장마철에는 기상청의 날씨 예보가 자꾸 틀려 '수퍼 청개구리'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을 얻기도 했답니다.
조선시대에도 관상감 관리들이 날씨나 천재지변을 기록하고 예측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로 여겨졌어요. 그런데 관상감 관리가 날씨나 천체 현상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면 임금에게 혼쭐이 났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의 비서라고 할 수 있는 승정원 관리들이 "천문의 변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관상감 관리에게 벌을 주라"고 임금에게 아뢰는 내용이 단골처럼 등장해요.
조선 9대 왕 성종 때의 일이에요.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는 '경연'에서 성종은 승정원에 이런 지시를 내립니다.
"일식과 월식은 하늘에서 생기는 중요한 일이다. 관상감에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관리 중 일식을 맞히는 사람에게는 작은 말 한 마리를 상으로 주고, 월식을 맞히는 사람에게는 귀한 옷을 상으로 내리겠다고 전해라."
그러자 승정원 관리는 "그렇다면 반대로 일식과 월식을 맞히지 못한 관리에게는 벌을 주어야 법에 맞는 일"이라고 아뢰었어요. 조선의 법에는 관상감 관리가 천체의 변화나 날씨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면 승진에 필요한 점수를 깎도록 되어 있었다고 해요. 이 말을 들은 성종도 "그 말이 맞다. 일식과 월식을 맞히지 못한 관리는 점수를 깎아라"는 명을 내렸다고 해요. 실제로 일식과 월식의 시기를 맞히지 못한 관상감 관리는 승진 점수가 깎였다고 합니다.
◇연산군이 관상감을 사력서로 만든 사연은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조선 10대 왕 연산군은 관상감이 "지진이 났다"고 아뢰자 이렇게 대꾸했어요.
"천재지변을 아뢰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어찌 또 아뢰느냐? 천체의 운행은 아득하여 알기 어렵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천문을 논하는 것은 하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니, 관상감을 없애는 것이 맞겠다."
연산군은 정말로 관상감을 없애 날씨나 천재지변을 예측하지 못하게 했어요. 대신 관상감의 이름을 사력서로 바꾸고, 관상감 관리들은 날씨를 기록하는 일만 하도록 했어요.
보통 조선의 왕들은 천재지변이 나면 스스로 덕이 부족해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한동안 검소한 생활을 하며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했어요. 반면 나랏일과 백성에는 관심이 없고 연일 잔치를 벌였던 연산군은 천재지변을 이유로 향락을 멈추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연산군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사력서는 다시 관상감이라는 이름과 원래의 기능을 되찾았어요. 이후 조선의 임금과 관상감 관리들은 백성을 위해 날씨를 살피고 정확히 예측하는 데 힘썼다고 합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서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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