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17만 백성의 소리 담아 새로운 '세법' 마련했어요

bindol 2021. 11. 7. 04:31

세종의 여론조사
시행 전 5개월간 백성 의견 조사
세종, 결과 바탕으로 세법 개선… 토지상태·수확 따라 세금 걷기로
신하·백성 말 무시한 세조·연산군… 비리로 원성, 왕위서 쫓겨나기도
소통해야 좋은 지도자 될 수 있어요

얼마 전 국회에서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있었어요.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이 내정한 장관 후보자들이 고위 공직자로서 적합한지 검증하는 자리랍니다. 고위 공직자로서 적합하지 못했던 언행이 드러날 경우 여론의 비판과 질타를 받고, 부적절한 정도가 지나치면 대통령은 후보자의 장관 임명을 철회하기도 합니다. 인사청문회는 이렇게 대통령의 인사에 대해 여당(정권을 잡은 정당)과 야당(정권을 잡고 있지 못한 정당), 그리고 국민들이 소통과 검증을 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어요.

국가의 최고통치자인 대통령은 물론, 어떤 조직의 지도자라면 늘 활발한 소통을 통해 구성원의 생각과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소통을 잘할수록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소통을 꺼리면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쉽게 배울 수 있어요.

◇5개월간의 여론조사를 지시한 세종

조선시대에는 신문이나 방송 같은 언론 매체가 잘 발달하지 않아 임금과 백성이 서로 소통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세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늘 백성의 의견을 들으려고 노력했답니다. 세종이 새로운 공법을 마련하는 과정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어요.

1430년 3월 5일 세종은 한양과 지방 전·현직 관리는 물론 가난한 백성들에게 새로 만든 '공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 취합하라는 지시를 내렸어요. 조선 전기의 공법이란 백성들에게 세금을 얼마나 부과하고 징수하는지를 정한 법이에요. 당시 조선의 공법은 오로지 농경지 넓이에 따라 세금을 내도록 규정했어요. 그래서 땅이 넓지만 토질이 좋지 않아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 경우나 흉작이 들었을 때에도 농민들이 과도한 세금을 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림=이병익

이를 해결하기 위해 관리들이 직접 농경지에 나가 농민들이 얼마나 손실을 입었는지 파악해 적절한 세금을 매기도록 한 '손실답험법'이 있었는데, 이 법도 문제가 있었답니다. 토지를 조사하러 나간 관리들이 조사 결과를 부정하게 조작해 농민에게 억울한 세금을 매기는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죠. 세종은 새로운 공법을 만들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새로운 공법을 시행하기 전에도 새로운 법이 정말로 기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죠. 지금부터 무려 600여 년 전에 여론조사가 실시된 것이에요.

새로운 공법의 시행에 대한 의견을 묻는 일은 5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무려 17만명의 백성이 참여했어요. 그해 8월 10일 호조에서는 '찬성 9만8657명, 반대 7만4149명'이라는 조사 결과를 세종에게 보고했답니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비록 찬성 수가 많지만 지역적으로도 찬성과 반대의 정도 차이가 심하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해가 엇갈린다"며 공법을 수정하도록 명을 내렸어요. 곧 '공법상정소'라는 임시 기구가 설치됐고, 집현전의 학자들과 신하들이 새로운 공법을 어떻게 개선할지 재차 연구와 시험에 들어갔답니다.

세종은 1444년 거듭된 연구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새롭게 개선한 공법을 확정했어요. 새로운 공법에는 토지의 질에 따라 세금을 6등급으로 나누어 거두는 '전분육등법'과 농사의 흉·풍작을 9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에 반영하는 '연분구등법'이 담겼답니다. 처음 여론조사를 실시한 이후 무려 14년 만의 일이었죠. 세종이 긴 시간을 들여 백성과 여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이유는 백성이 가장 만족할 수 있는 합리적인 법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어요.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인 '경청의 달인'이었다고 합니다. 세종은 다양한 의견을 들어야 더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조선시대에는 왕이 학문과 덕망이 높은 신하들을 불러 공부하는 '경연'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세종은 이 경연 자리에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언관은 물론 중신들과 집현전 학사도 참여하게 해 여러 의견을 듣고 국가의 정책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재위 기간인 23년간 세종이 경연에 참석한 횟수는 1898회로, 성종·영조와 함께 경연을 많이 참석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경연을 멀리한 세조와 연산군

이런 세종과 다르게 경연을 멀리했던 임금들도 있었는데,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왕이 된 세조가 그중 하나입니다.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신하들의 의견을 공공연히 무시했어요. 경연에서도 신하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나랏일을 의논하지 않고 오히려 신하들을 혼내거나 가르쳤다고 합니다. 또 언론의 역할을 맡은 관직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했어요.

그 결과 조선의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반대로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준 공신들과 세조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는 소수의 신하에게 권력이 집중되었어요. 이들은 사회의 특권층으로 군림하며 갖가지 비리를 저질러 다른 사대부와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고 합니다.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도 경연을 아주 싫어한 임금이었어요. 연산군은 사냥을 가기 위해 경연을 빠지거나 병 핑계를 대고 내시를 자기 대신 경연에 출석시키는 황당한 행동도 일삼았어요. 나중에는 아예 경연을 폐지해버리고 오늘날 언론의 역할을 하던 사간원까지 없애버렸답니다. 이렇게 신하와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막고 향락에 빠져 살던 연산군은 결국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어요. 이렇게 역사는 '소통하지 않는 지도자는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잘 보여준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서술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