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병역제도]
군인 신분 세습한 고려 군반씨족, 국왕·수도 지키는 중앙군에서 활동
신라는 15세부터 병역의무 수행
조선, 양인 남성에게 군역 부과… 임진왜란 이후 '모병제'로 변화
최근 우리 군대를 구성하는 일반 병사들을 징병제(徵兵制)가 아닌 모병제(募兵制)로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찬반 여론이 나뉘고 있어요. 징병제란 국가가 법률에 따라 국민에게 병역의무를 부과해 군인으로 복무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국민이라면 일정한 기간 반드시 군대에 복무하도록 하는 강제적인 병역제도예요. 반면 모병제는 군 복무를 지원하는 사람만을 선발해 직업군인으로 군대를 꾸려가는 병역제도를 뜻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징병제를 통해 일반 병사를 뽑고, 지휘관급 군인은 모병제를 통해 선발하고 있었어요.
모병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저출산 탓에 징병제로 일반 병사를 모으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춘 직업군인을 중심으로 '작지만 강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요. 반면 징병제를 유지하자는 사람들은 "북한의 병력이 120만여 명에 달하기 때문에 현재 병사 수를 줄이기 어렵고, 모병제를 도입할 경우 저소득·저학력층만 군 복무를 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반박하고 있답니다.
◇삼국시대에 15세 이상 남자라면
그럼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병사를 모아 군대를 꾸렸을까요? 삼국시대에는 15세 이상의 남성이면 모두 병역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역(軍役)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어요. 군역이란 국방의 의무를 지는 것을 뜻하는데, 군대에 복무하거나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국가에서 요구하는 노동력이나 공물을 제공하는 것을 뜻해요.
삼국사기의 '열전' 편에 실린 '설씨녀 이야기'를 통해 삼국시대의 군역 제도를 짐작해볼 수 있답니다. 이 이야기는 신라 진평왕 때 살았던 아리따운 설씨녀와 설씨녀를 좋아했던 가실이란 청년의 사연을 담고 있어요. 설씨녀와 혼인을 맺고 싶었던 가실은 설씨녀의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국경을 지키는 병역을 수행하고, 그 대가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설씨녀와 혼인을 맺기로 합니다. 하지만 교대 기간인 3년이 지나도 가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렇게 6년이 지나자 설씨녀의 아버지는 가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설씨녀를 다른 남자와 혼인시키려 합니다. 이때 가실이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와 설씨녀와 극적으로 혼인을 맺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게 이야기의 내용이에요.
학자들은 이를 통해 신라를 비롯해 백제와 고구려에도 적어도 일생에 3년 정도는 국경을 수비하고, 전쟁이 나면 그 기간이 늘어나는 군역 제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가실이 3년 만에 교대하지 못한 것도 국경 지역에서 전쟁이 났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고요. 삼국시대에 이런 엄격한 징병제도가 운영된 건 당시 삼국을 통일하고 외세와 맞서 싸우기 위한 전쟁이 빈번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군반씨족이 중심이 된 고려의 2군 6위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무(武)를 중시한 나라였어요. 그래서 중앙에는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2군 6위 제도를 운영하였답니다. 2군은 국왕의 신변을 지키는 군대 2개를 가리키고, 6위는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맡은 군대 6개를 말해요.
▲ 그림=이병익
2군 6위는 군인으로서 전문성을 유지하기 위해 군인 신분을 대대로 세습하는 군반씨족으로 구성되었어요. 이들은 군인으로 일하는 대가로 나라로부터 군인전이라는 별도의 토지를 지급받았답니다. 군반씨족은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맞서 큰 활약을 펼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권력 집단으로 변질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어요.
반면 고려의 지방군은 농민을 징병해 병사를 충원한 주현군과 주진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관원이나 공신의 자손, 천민을 제외한 16~60세 남성은 모두 한반도 남쪽을 지키는 주현군이나 북쪽 국경을 지키는 주진군에서 복무해야 했답니다.
◇조선이 모병제로 넘어가게 된 까닭은?
조선 전기에는 16~60세의 모든 양인 남성에게 군역의 의무를 지게 하는 양인 개병제가 시행되었어요. 천민을 제외한 평민과 양반에게 군역의 의무가 부과되었는데, 양반은 그 수가 적고 대부분 특수군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군역을 맡은 건 사실상 평민들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양인 개병제는 '정병'과 '보인'을 통해 운영되었어요. 정병은 평상시에 농사를 짓다가 순번이 되면 일정 기간 군 복무를 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보인들은 군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 공물이나 조세를 통해 국방비를 부담하는 방식으로 군역을 수행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정병은 점점 줄어들었고, 반대로 보인이 점점 늘어나는 문제가 생겼어요. 꾸준히 농사를 지어야 하는 농민들에게는 군 복무와 농사를 병행해야 하는 정병이 보인에 비해 훨씬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정병이 줄어들면서 조선의 국방력도 점점 약해졌고, 결국 한양과 평양이 왜군들에게 점령당하는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말았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대는 모병제를 중심으로 한 5군영 체제로 바뀌었어요. 5군영에는 정병도 있었지만 병사 대부분은 급료를 받고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직업군인이었어요. 대신 농민들은 직업군인들의 급료에 필요한 조세를 부담하게 되었답니다. 조선의 군대가 모병제 중심으로 변화하게 된 건 정병으로 인한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군인들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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