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바다의 왕 장보고… 동아시아 사로잡은 '원조 한류 스타'

bindol 2021. 11. 7. 04:35

[해외에 이름 날린 조상들]

해군기지 '청해진' 세워 해적 소탕… 중계무역으로 '무역왕' 명성 얻어
당나라 시인·일본 승려 존경받기도

중앙아시아 정벌한 명장 고선지… 동서양 문명 교류 계기 열었단 평가
조선 시인 이수광도 베트남서 인기

'K팝'을 앞세운 한류 열풍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어요. 일본과 중국,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지역은 물론 중동과 남미, 유럽에서도 한국 아이돌 가수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드라마와 영화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면서 한국 배우들의 인기도 아주 높다고 해요. 가요와 드라마뿐 아니라 한국 회사가 만든 게임과 의류, 화장품, 음식 등 다양한 문화 상품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우리 역사를 보면 한류 스타처럼 일찍이 해외에 나가 명성을 떨친 인물이 적지 않았답니다. 오늘은 '원조 한류 스타'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 속 인물들을 알아보도록 해요.

◇파미르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서기 747년 중국 당나라가 서쪽으로 세력을 넓히자 토번국(지금의 티베트)과 아랍인들이 세운 사라센제국(이슬람 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나라에 맞섰어요. 이때 당나라에는 고구려 출신 명장 고선지(?~755)가 있었답니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로 끌려와 살던 고구려 유민이었어요. 고선지는 아버지를 따라 실크로드의 길목인 중국 안서 지방에서 용맹한 장수로 자라났답니다. 스무 살에 병사를 이끌고 톈산산맥 서쪽의 달해부를 정벌해 당나라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지요.

토번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자 당나라 황제 현종은 고선지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중국 서북 변방 지역을 정벌하라고 명을 내렸어요. 중국과 서역 간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고선지는 타클라마칸사막과 톈산산맥, 파미르 고원(지금의 타지키스탄 지역)을 넘는 '파미르 정벌'에 나섰답니다. 750년에는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던 석국(지금의 타슈켄트)을 토벌해 국왕을 포로로 잡기도 했어요. 고선지의 활약으로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었던 72개의 나라가 당나라에 항복하였답니다.

751년 고선지는 중앙아시아 북부에 있는 탈라스 강 일대 평원에서 이슬람 연합군 30만명을 단 7만의 군대로 맞서 싸웠어요. 탈라스 전투라고 하는 이 대규모 전투에서 고선지는 아깝게 패하였지만, 훗날 영국의 고고학자 아우렐 스타인은 고선지의 파미르 정벌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고선지의 업적은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했던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업적을 뛰어넘는 것이다. 고선지야말로 일찍이 유럽이 낳은 어떠한 유능한 사령관보다도 더욱 훌륭한 전략과 통솔력의 소유자였다."

고선지의 중앙아시아 정벌은 동서양 문명이 서로 활발히 교류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그 예로 탈라스 강 전투 때 사라센제국에 포로로 잡힌 당나라 군사들은 이슬람 세계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제지술)을 전달했고, 이 기술은 다시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유럽까지 전해졌답니다.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장보고(張保皐·?~846)는 남북국시대에 당나라와 일본에서 '무역왕'이라 부르던 인물이에요. 완도에서 평민으로 태어난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弓福)으로, '활을 잘 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어요.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간 뒤부터 쓴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그림=이병익

장보고는 엄격한 계급사회였던 신라를 떠나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 군대에 들어가 명성을 쌓았어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당나라 군대에서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장보고를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나라 군대에서 큰 공을 세운 장보고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기승을 부리던 해적들이 신라 사람들을 붙잡아 노비로 팔아넘기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고국 신라로 돌아와요. 그리고 828년 완도에 '청해진'이라는 해군기지를 세워 해적들과 싸우기 시작했답니다. 약 1만여 병사로 해적을 소탕한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지로 삼아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을 활발히 벌여 '무역왕'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어요.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당나라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는 두목(杜牧)은 '번천문집'에 장보고의 일대기를 쓰면서 '장보고는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기록했고, 일본의 승려 엔닌도 장보고의 높은 인덕을 흠모하는 글을 쓰기도 했어요. 엔닌이 일본 교토에 세운 절 적산서원에는 장보고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중국 산둥에 적산법화원이라는 절에도 수호신 같은 모습을 한 장보고 동상이 세워져 있어요.

◇베트남의 '인기 시인' 이수광

조선 중기에는 시인으로서 베트남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던 인물이 있었어요. '지봉유설'이라는 문화 백과사전을 편찬한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수광이 그 주인공이랍니다.

이수광의 시는 어떻게 베트남까지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일까요? 1611년 이수광은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베이징에 갔다가 안남(지금의 베트남)에서 온 사신 풍극관과 50여 일간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되었답니다. 이때 이수광은 풍극관과 함께 시를 지으며 우정을 나누었는데, 풍극관은 고국으로 돌아가며 이수광이 쓴 시를 가져가 베트남 관리와 유학자들에게 소개하였어요.

그의 시는 곧 안남에서 동양의 명시 수백 편을 정리한 책 첫머리에 실릴 정도로 베트남 선비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안남을 3번이나 방문했던 무역상 조완벽도 "안남에서 이수광의 시가 대유행"이라고 조선에 알리기도 했어요. 이렇게 보면 이수광이야말로 '베트남의 원조 한류 스타'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