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63] 런던보다 8.5시간 빠른 ‘서울시(時)’
말이 제아무리 빨리 달려봐야 해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말을 타던 시절에는 여행 중에 시차증(jet lag)이 없었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몽골제국은 아시아가 낮일 때 유럽이 밤이라는 사실을 꿈도 꾸지 못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알려진 뒤에도 한동안은 지역별 시간 차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은 1804년 증기기관차가 등장한 뒤다. 열차 운행을 위해서 모든 기차역의 시곗바늘을 일치시키자니 같은 시각에 지역마다 태양 위치가 달랐다. 결국 기차 회사들이 앞장서서 지역별로 시각 차를 두었다. 특별한 원칙은 없었다. 뉴욕과 워싱턴DC의 시차는 12분이었다.
1847년 영국이 규칙을 정했다. 런던을 기준으로 경도 15도마다 1시간씩 벌어지도록 했다. 그 규칙은 열차 운행의 혼란을 막는 것이었으므로 처음에는 열차시(railway time)라고 불렀다. 오늘날은 표준시(standard time)라고 부른다. 표준시가 없었을 때 가장 혼란스러웠던 지역은 만주였다.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 일본 남만 철도, 중국 경춘선(북경-장춘선)이 집결하여 3국 시각이 공존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내렸던 하얼빈 역에는 시계가 3개 걸려 있었다.
서울은 거리상 베이징(런던+8시)이나 도쿄(+9시)와 30분 정도 시차가 있다. 경의선을 만주로 잇기 전에 그것부터 정해야 했다. 1908년 대한제국은 우리의 표준시를 런던보다 8.5시간 빠르게 정했다. 일종의 자주성 선언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표준시가 도쿄에 맞춰졌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환원했지만, 1961년 군사정부가 다시 도쿄에 맞췄다. 북한도 똑같은 시도를 했다. 대한제국과 이승만 대통령을 좇아서 2015년 ‘평양시(+8.5시)’를 선언했으나 3년 만에 번복했다. 1954년 3월 21일, 춘분에 맞추어 이승만 대통령이 +8.5시의 ‘서울시’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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