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朝鮮칼럼] 정권교체 했으니 진영 싸움도 이겼다는 건 착각

bindol 2022. 5. 2. 04:54

[朝鮮칼럼] 정권교체 했으니 진영 싸움도 이겼다는 건 착각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역사학
입력 2022.04.11 03:20
 
 
 
 
 
2022년 3월 10일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며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이덕훈 기자

서울의 한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K 교수는 몇 년 전 미국 중서부 작은 대학도시에서 안식년을 보냈다. 젊은 시절 그는 자타 공인 운동권이었다. 지금도 그가 대학가 한 소줏집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목청 높여 부르던 노랫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식민지 조국의 품 안에 태어나 이 땅에 발 딛고 하루를 살아도 민족을 위해 이 목숨 할 일 있다면 미국 놈 몰아내는 그 일이어라!” 난생처음 “적성 국가” 미국 땅에 발을 딛는 순간 그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신음”을 들었다고 한다. 그의 혈관 속엔 여전히 반미(反美)의 붉은 피가 파도치고 있다.

북미의 소도시에 사는 게 어땠냐고 물었더니 그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좋은 건 딱 두 가지밖에 없었죠. 공짜로 애들 영어 가르치고, 매일 저녁 값싸고 맛 좋은 소고기 스테이크를 그릴에 구워서 먹은 것.”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 그가 “미국 소, 미친 소”를 외치며 가두 시위에 나섰음을 잘 알기에 물었다. “미국산 소고기를 매일 드시면서 광우병 걱정은 안 했어요?” 그는 “미국 애들이 자기들 먹는 데 위험 부위를 넣겠어요?” 하고 반문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무책임하게 미국에선 금지된 부위를 수입하려 했기 때문에 국민이 총궐기”했다는 주장이었다.

그 당시 미국은 자체적인 인간광우병의 사례가 단 한 건도 없었으며, 한국과 달리 도축되는 모든 소를 전수 조사했고, 유통이 허용되는 소의 월령도 한국보다 낮지 않았냐고 따졌더니 그는 화제를 슬쩍 바꿔서 “2008년 광우병 시위는 선거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한국식 직접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8년 후 탄핵 정국으로 이어진 중대한 이벤트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7년 대선에서 참패하고 잠시 절망했던 소위 “진보 진영이 광우병 시위를 계기로 화려하게 부활했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터득한 선전·선동의 기법과 대중 동원의 요령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에 2016년 탄핵 정국을 연출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정치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도덕 논쟁이 아니라 전략·전술을 써서 권력을 쟁취하는 진영 간의 전쟁”이라며 “선거에서 이긴 후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착각했던 이명박 정부가 어리석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2008년 6월 8일 저녁 서울광장에서 열린 '광우병 위험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집회./이태경 기자

실제로 12년 전 500만 표 큰 차이로 기세등등하게 출범했던 이명박 정부는 불과 100일 만에 좌초 지경에 내몰렸다. 중고생들까지 거리로 뛰어나와 “미친 소 너나 먹어!”를 외쳐댔고, 서울 도심을 점령한 시위대는 백일이 넘도록 폭력 시위를 이어갔음에도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선거에서 압승했지만, 진영 전쟁에서 패배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가짜 뉴스와 거짓 선동이 판치던 폭민정치(mobocracy)였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진영 전쟁에서 광우병 선동은 가공의 파괴력을 발휘했다. K 교수의 분석대로 광우병 사태는 8년 후 탄핵 정국까지 이어진 좌파 집권의 특급 전술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한국의 좌파 세력은 지금 ‘광우병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을 듯하다. 그들은 출범 100일 된 새 정권을 순식간에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던 기민하고도 저돌적인 세력이다. “뇌 송송 구멍 탁” 같은 자극적 구호가 말해주듯 선전·선동 기법은 과거 공산권 선전부의 아지프로(agitprop)를 방불케 한다. 우파 정당을 분열시켜 자당의 대통령을 직접 탄핵하도록 유도할 만큼 지략은 영악하고 치밀하다. 그들은 비록 엉터리 정책들을 남발하고 ‘내로남불’의 추태를 이어가다 정권을 빼앗겼지만 진영 전쟁에서 패배하지는 않았다.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는 진영 전쟁의 신호탄에 불과하다.

여소야대의 악조건에서 힘겹게 출범하는 새 정부는 성공할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해야 제2의 광우병, 제2의 탄핵을 비껴갈 수 있을까? 병법에 나와 있듯, 지피지기(知彼知己) 이상의 묘수가 있을 수 없다. 새 정부는 진영 전쟁이 이미 시작됐음을 자각하고, 스스로 열세에 처해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특히 선전술과 홍보력에서 좌파가 프로 9단이라면, 우파는 아마 3단도 못 되는 실력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구현한다 해도 선전과 홍보에서 실패한 정권은 파멸을 면할 수 없다. 광우병 사태에서 탄핵 정국까지 진영 전쟁의 흑역사가 일깨우는 무서운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