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중국식 ‘정치적 능력주의’가 선거 민주주의의 대안이라는 사람들

bindol 2022. 5. 2. 04:56

중국식 ‘정치적 능력주의’가 선거 민주주의의 대안이라는 사람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2.04.22 15:33 | 수정 2022.04.23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28회>

<1989년 톈안먼 광장에서 “Liberty”의 구호를 들고 시위하는 청년. 사진/공공부문>

‘정치적 능력주의’ 표방하는 중국 모델이 선거 민주주의보다 낫다고?

며칠 전 “슬픈 중국” 시리즈를 열독한다는 한국의 한 대학생이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 학생은 “홍위병의 잔재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퍼져 있다”며,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헐뜯고 무시하는 현상이 난무한다”고 했다. 특히 “네거티브 정치의 극을 보여준 지난 대선”에선 “배우자에 대한 끝없는 비방전”과 “내로남불의 난타전”만 연출되었다며 한탄했다. 이 학생은 한국 정치의 근본 문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라 생각하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제도적 대안은 과연 무엇이냐 물어왔다.

국가의 헌정 체제는 한 사회의 명운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지만, 정치 제도가 바뀐다 해서 정치 개혁이 절로 이뤄질 리는 없다. 대통령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꾼들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가 일시에 해소될 까닭도 없다. 인간이 만든 제도는 언제든 인간에 의해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제든 내각책임제든 경륜, 능력, 도덕성을 겸비한 인재들이 없이는 좋은 정치가 실현될 수 없지만, 출중한 인물이라고 반드시 정치를 잘한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선거민주주의란 삼엄한 감시와 철저한 검증을 통해서만 어렵게 유지될 수 있는 위태롭고 불완전한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의 말대로 “민주주의는 그동안 실시됐던 모든 정치 형태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치 형태이다.”

10년쯤 전부터 중국 안팎에선 선거민주주의의 약점과 한계를 지적하며 “중국 모델”의 정치적 능력주의(political meritocracy)를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선거를 통해 일약 스타가 되는 민주 국가의 정치적 기린아들과는 달리 중국공산당 영도자들은 장시간 관료제의 실무를 익히고 엄정한 평가를 거쳐 피라미드의 정점까지 올라간 전문 행정가들이다. 또한 이들은 눈앞에 지지율만 따지며 차기 선거에만 몰두하는 민주제의 지도자들과 달리 중국의 지도자들은 중장기 계획에 따라 국익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통치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중국식 능력주의가 서구식 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단론자들도 있다. 일례로 2016년 한국의 어느 종편 방송에 고정 출연한 한 유명인은 중국의 통치제도를 수박 겉핥기로 미화한 후 “다당제보다 일당제가 더 민주적일 수도 있다”는 허황된 논변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한 주장들은 한 꺼풀만 벗겨보면 플라톤 이래 지속돼온 “철인통치”와 “이상(理想)국가론”의 21세기적 변종임이 드러난다.

2021년 1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정치국이 19기 6차 전회를 개최하고 있다. 사진/xinhua

탁월한 능력 갖춘 불세출의 영웅? 전체주의적 엘리트 독재의 논리일뿐

중국공산당 영도자들이 그토록 “탁월한 능력을 갖춘 불세출의 영웅”이라면 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국민 신임을 묻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가? 대체 왜 언론의 자유를 그토록 억압하고, 반대당의 결성까지 불법화하는가? 이러한 근본적 질문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대답은 기껏 “민주집중제”라는 레닌의 조직이론, “공산당은 무오류”라는 스탈린식 전제주의, “인민은 당을 따라야 한다”는 마오쩌둥식 대중동원의 논리로 귀결되고 만다.

만약 한국의 언론처럼 중국의 언론이 중공 지도층의 부정부패를 들춰낸다면, 중국식 능력주의의 허상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중국 혁명지도자 “8대 원로”의 103명 직계 자식들의 총자산 규모를 폭로한 2012년 12월 26일 블룸버그 통신의 기사에 따르면, 103명 중 3명은 중국 국내 총생산량의 20%를 점하는 국영기업체를 경영했으며, 26명은 국영기업체의 최고위직을 맡고 있었고, 43명은 민간기업체를 운영하거나 경영진에 포함돼 있었다.

시진핑의 누나, 조카 등 직계 가족의 총자산 규모는 미화 1억 달러를 넘는다. 덩샤오핑, 원자바오, 후진타오, 장쩌민, 주룽지의 자식들 역시 거부의 반열에 올라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목숨 걸고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참여한 대가인가? 그 자손은 막대한 부와 정치권력을 누리는 태자당(太子黨)의 귀족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중국 모델의 정치적 능력주의란 전체주의적 엘리트 독재의 논리일 뿐이다. 한국이나 대만에선 이미 1960-80년대 경험했던 권위주의 개발독재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전국 단위 직접선거 치른 적 없는 중국...1980년 베이징대학 인민대표 선거

물론 중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국 단위의 직접선거를 치러 본 경험이 없다. 1949년 건국 이후 중국은 소련식 선거를 도입하여 마을 단위에선 대표를 선발하는 직접선거가 시행됐지만, 언제나 1인 후보의 단독출마에 대한 승인 절차에 불과했다. 마을 단위에서도 다수가 입후보해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진정한 의미의 선거는 용인되지 않았다. 1960-70년대 정치적 혼란 속에서는 단독 후보의 형식적인 선거도 치러지지 않았다. “개혁개방” 초창기인 1979년 7월에 입안된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서 1980년 최초로 각 단위의 지명을 받은 다수 후보가 경쟁할 수 있는 직접선거가 농촌 및 도시의 상급 단위에서 실시되었다.

1980년 11월 베이징 대학은 인민대표를 선발하는 선거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캠퍼스 건물 빈 벽마다 빼곡하게 대자보가 붙었고, 그 앞에 어깨를 맞대고 겹겹이 늘어선 학생들이 노트에 깨알같이 메모하며 글귀를 정독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학교의 공터, 식당, 강당에선 날마다 최초의 직접선거에서 정견과 정책을 발표하는 후보들의 연설회가 이어졌다. 연설회에는 수백 명의 청중이 들끓었고, 11월 28일에는 1천 명이 넘는 인파가 큰 관심을 보이며 모여들었다. 당시 현장에서 중국의 새로운 민주 선거를 취재한 미국 ABC방송 기자의 동영상을 보면, 그 현장의 열기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당시 베이징 하이뎬(海淀)구 인민대표대회에는 학생대표의 의석 2자리를 놓고 거의 29명이 공식적으로 입후보했다. 1978년, 1979년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民主牆)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이름을 알렸던 후보자들도 다수 있었다. 그 29명 중에서 철학과 석사과정에 재학하던 후핑(胡平, 1947- ), 1976년 톈안먼 광장에서 맹활약했던 왕쥔타오(王軍濤, 1958- ), 문혁 시기 억압당했던 여성적 아름다움을 강조한 문학전공의 여성 후보 장만링(張曼菱, 1948- ), “사회주의=공공재산+민주주의”라는 구호를 들고나온 팡즈위안(房志遠, ?- ), “문화혁명은 봉건주의로의 후퇴였다”는 구호를 들고 나온 양바이쿠이(楊百揆), 지식인과 노동자·농민의 연대를 강조한 장웨이(張煒, ?- )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2월 3일 치러진 예선에서 후핑, 왕쥔타오, 장웨이가 최다 득표를 해서 12월 11일 결선이 치러졌다. 본선에선 6096명(총유권자의 91.2%)이 투표에 참여했고, 후핑은 3467(총유권자의 52%)의 득표로 대표에 선출되었다. 나머지 두 명은 일주일 후 다시 결선을 치렀지만, 참여율 저조로 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해 안타깝게 의석을 차지할 수 없었다.

<1980년 11월 베이징 대학 경선 운동. 사진/공공부문>

이 선거에서 후핑이 내건 슬로건은 바로 “표현의 자유였다.”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고 모든 것을 얻을 순 없지만, 표현의 자유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그의 한 마디는 광장에 운집한 청년 대학생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후핑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서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게 되었을까?

홍위병 참여 후핑, 마오쩌둥 사상 오류 자각....“표현의 자유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후핑의 부친은 본래 국민당의 군인이었으나 1949년 “해방” 직전 가까스로 공산당에 가입했다. 어렵게 신분을 세탁했지만, 그의 부친은 1952년 “반혁명분자”의 낙인을 받고 처형되었다. 전형적인 “계급천민”의 집안에서 고달프게 자란 후핑은 극심한 신분 차별에 시달려야만 했다. 특히 문화혁명 시기에는 혁명가 집안 출신을 우대하는 “혈통론(血統論)”이 널리 퍼져 있어서 때문에 후핑은 더 큰 핍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문혁 초기 마오쩌둥은 당내의 주자파 수정주의 세력을 축출하라며 홍위병에 총궐기를 촉구했을 때, 후펑은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열광적으로 홍위병 운동에 참여했다. 1968년 이후 5년간 산간벽지에 하방(下放)되어 고된 노동을 하면서 후핑은 스스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오류를 자각하고, 자유와 민주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해 깊은 사색을 이어갔다. 후핑의 자유주의는 문혁 시절 직접 그가 겪었던 “광적인 폭력성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다.”

후펑은 여전히 4인방의 기세가 등등하던 1975년 처음으로 골방에 숨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라는 팸플릿을 썼다. 이후 다섯 번의 수정을 거쳐서 완성된 이 자유의 선언문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여러 형태로 출판되어 널리 배포되었다. 1975년부터 “표현의 자유”를 화두 삼아서 정교한 사색을 이어왔었기에 후핑은 1980년 11월, 12월 베이징 대학의 선거에서 과감하게 “표현의 자유가 없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구호를 외칠 수 있었다.

<1980년 11월 베이징 대학에서 경선에 참가한 후보자들을 일목요연하게 비교한 대자보. 사진/공공부문>

1980년 후핑은 베이징 대학의 인민대표로 선출되었지만, 중국공산당은 이 민주적 선거를 사후적으로 무효화하는 극한 조치를 취했다. 중국헌정사 최초로 시도됐던 1980년의 지방선거는 그렇게 용두사미의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됐던 후핑은 물론 큰 희망을 품고 투표했던 모든 사람은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975년 헌법 개정으로 마오쩌둥은 이른바 “4대 자유(四大自由)”를 허락했다. 이른바 대명(大鳴), 대방(大放), 대변론(大辯論), 대자보(大字報)인데, 의미를 풀어보면 “정치 시위에 참여하고, 파업을 일으키고, 공개적으로 변론을 전개하거나 대자보를 붙일 수 있는” 공민의 자유를 이른다. 물론 마오쩌둥이 이 4대 자유를 허락했을 때는 홍위병을 격동시켜 반대 세력을 제거한다는 정략이 깔려 있었다. 문혁 시절 군중 폭력에 무방비로 희생되었던 혁명원로들은 1980년 공식적으로 “공민의 4대 자유”를 철회했다. 문혁 시절의 집단광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였지만, 개혁개방 초기부터 공민의 자유는 심각하게 제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생적 자유주의자 후핑, 미국으로 건너가 중국 민주화운동단체 회장으로

후핑은 1987년 1월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아 도미했다. 1988년 1월, 그는 뉴욕시의 중국 민주화 운동 단체 중국민련(中國民聯)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중국민련은 “민주중국전선(民主中國戰線)”과 더불어 해외 중국 민주화 운동의 양대 조직이었다. 이후 후핑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철학적 근거를 모색하는 중후한 정치평론을 직접 창간한 <<베이징의 봄>>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면서 민주화 이론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 후 지금까지 후핑은 해외 중국어 매체에 왕성하게 기고하면서 강력하게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과오와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망명 정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후핑은 문혁 시절 스스로 깨달은 자유의 깊은 의미를 중국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근대 서구의 자유주의가 종교적·정치적 박해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해서 개인의 인권을 보호하고 국가권력을 제약하는 이론으로 발전했다. 후핑은 중국의 자유주의도 공포에서 생겨난 공민의 집체적 자각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혁 시절 중국의 인민은 극단의 공포를 겪으면서 자유와 인권의 소중함을 자각했고, 그러한 중국인의 자발적인 실존적 자각이야말로 중국식 자유주의의 씨앗이라는 주장이다. 후핑의 주장은 자유주의가 서구에서 유입된 외래사상이라서 중국의 현실에 맞지 않다고 비판하는 중국공산당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요컨대 후핑은 문혁의 극한 체험을 통해 스스로 거듭난 중국의 자생적 자유주의자다. <계속>

<1989년 5월 13일,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 투쟁에 나선 학생들. 사진/공공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