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고전 속 정치이야기] 망국회한(亡國懷恨)

bindol 2022. 5. 13. 05:58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원호문(元好問, 1190~1257)은 웅장한 황토고원 산서성 태원 출신으로 자를 유지(裕之), 호를 유산(遺山)이라 했다. 강렬한 모래바람과 산서의 상무정신이 어울린 환경은 호걸의 기상을 길러줬다. 금의 선종(宣宗) 흥정(興定) 5년(1221)에 진사가 돼 다양한 관직을 역임한 그는 중국 문단에서 보기 드문 소수민족 출신이다. 그의 조상은 선비족 척발씨로 북위 효문제 시대에 원씨로 고쳤다. 부친 원덕명(元德明)은 관직을 사양하고 산수를 유람하며 시로 명성을 날렸다. 원호문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숙부 원격(元格)은 조카의 재능을 사랑해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 항상 다녔다. 덕분에 원호문은 산동, 산서, 감숙, 섬서 등 유명한 산천을 구경하며 벗을 사귀었다. 7세에 이미 시를 지어 예부상서 조병문(趙秉文)으로부터 두보(杜甫) 이래 이와 같은 작품이 없었다는 칭찬과 함께 원재자(元才子)라는 호칭을 얻었다.

1210년, 숙부가 농성에서 사망하자 운구를 모시고 귀향했다. 이듬해 몽고가 금에 대한 첫 번째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고향 수용(秀容)도 함락되자 간신히 가족과 함께 하남성 복창(福昌)으로 피했다. 이 시기에 문학비평의 역작 금기(錦機)와 시론의 종지를 논한 논시절구 30수를 완성했다. 1218년, 금이 화북을 지키지 못한다고 판단한 그는 황하를 건너 유랑하다가 숭산(嵩山)의 등봉(登封)에 정착해 8년 동안 은거했다. 이 무렵 도연명을 흠모한 그는 자연과 욕심 없는 삶을 찬양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37세부터 42세까지는 하남의 현령을 역임하면서 고달픈 백성들의 삶을 동정하는 작품을 남겼다. 금이 망했을 때 강제로 반역자 최립(崔立)의 공덕비명을 지은 것을 오점으로 생각해 죽을 때까지 괴로워했다. 금이 망하자 출사하지 않고 50세에 귀향해 집안에 야사정(野史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훗날 금사를 편찬할 때 귀중한 사료로 사용된 임진잡편(壬辰雜編)을 완성했다. 그의 시는 최고의 수준에 이르러 기이하면서도 억지로 다듬지 않았고, 기교도 많았지만 화려하지는 않았다.

원호문이 태산에 오른 때는 1236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때였다. 울창한 송백과 산야에 가득한 야생화가 끝없이 펼쳐졌다. 대묘에서 도교사원을 둘러보고 동로를 따라 대정에 올랐다. 대정에서 일출을 본 그는 일대 장관에 도취돼 감탄을 금치 못했다. 끓어오르는 기분을 참지 못한 그는 사마천이 태산의 닭이 한 번 울 때마다 태양이 3장이나 솟아오른다고 한 것이 사실인지 알고 싶었다.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어떤 사람이 “닭을 안고 태산에서 잤는데, 정말 새벽에 닭이 울자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태산은 하늘의 절반에 이를 정도로 높기 때문에 밝고, 어두운 시간이 평지와 다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산 위는 밝더라도 산 아래는 동이 트기 전의 어둠이 남아 있을 것이며, 산 아래에서 닭이 울고 해가 뜰 때 산 위에서는 이미 태양이 3장 정도 솟아올랐을 것이다. 과연 사마천의 말은 사실이었다. 원호문은 산천의 아름다움을 보는 나름대로 혜안이 있었다. 그가 지은 동유기략(東游記略)에는 왕모지(王母池)에 대한 감상문이 들어 있다.

“암암정(岩岩亭)에 앉아서 북쪽에 우뚝 솟은 태산을 바라보면 웅장한 자태가 위압적이다. 정자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며 노래한다. 계곡 사이로 산수가 들어 있고, 양쪽 절벽은 돌로 누각을 쌓은 것 같다. 북쪽으로 천문을 바라보면, 한 폭의 병풍처럼 보인다. 개울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태산의 절경이 아니던가”

암암정은 서왕모가 머리를 빗던 빗을 씻었다고 해서 소세루(梳洗樓)라 부르기도 한다. 남천문은 정남향이 아니라 약간 동남향에 있다. 크고 작은 봉우리가 원근에 따라 뒤섞였고, 청산에는 녹수가 울창했다. 홍교(紅橋)의 폭포수가 허공에 날리니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가 거기에 있었다. 두보의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가 떠올랐을 것이다.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