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고전 속 정치이야기] 건곤일척(乾坤一擲)

bindol 2022. 4. 25. 05:15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BC 206년, 진(秦)이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했다. 항우는 유방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함양을 먼저 점령한 유방을 오지인 한왕(漢王)으로 봉했다. 분노한 유방은 항우와 패권을 다투겠다고 결심했다. 원래 유방은 대단한 야심을 품지 않았다. 그가 항우에게 불만을 품은 것은 다른 무장에 비해 자신의 봉지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제후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되지 못한 전영(田榮)은 항우가 제왕으로 봉한 전도(田都)와 교동왕(膠東王) 전시(田市)를 죽인 후 제왕으로 자립했다. 또 팽월(彭越)과 연합해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까지 죽였다. 전영이 동방의 강자로 부상했다. 요동왕 한광(韓廣)은 연왕 장도(臧荼)를 죽였다. 제왕 전영의 지지를 받아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를 축출한 제여(除余)는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을 죽이고 조왕(趙王) 헐(歇)을 영입해 대왕(代王)으로 자립했다. 항우는 그들을 제압하느라고 서쪽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유방은 절호의 찬스를 얻었다. 한신이 유방에게 건의했다. “항우는 동방을 견제하느라고 관중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먼저 관중을 돌파한 다음 항우를 공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유방과 한신의 유명한 암도진창(暗渡陳倉)이 시작됐다. 한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고, 유방과 한신이 이끄는 주력은 오랫동안 단절됐던 옛길을 통해 관중과 한중의 중간지점인 교통요지 진창에 도착했던 것이다. 항우가 배치한 수비진은 간단하게 무너졌다. 유방은 관중에 들어오자마자 ‘약법삼장’을 발표해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적이 있었다. 유방이 다시 관중으로 들어오자 많은 사람이 환영했다. 항우는 분노했지만, 당장 동방에서 발을 빼지 못했다. 유방도 자신의 목적은 관중이지 동방진출은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것을 믿은 항우는 동방에 집중했다. 동방의 반군 가운데 항우가 가장 미워한 상대는 전영이었다. 상당한 정치력을 지닌 그는 항우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결집해 끝까지 저항했다. 항우에게는 유방보다 전영이 더 위험했다. BC205년 초, 항우가 지금의 산동성 하택(菏澤)의 동북쪽인 성양(城陽)에서 전영을 대파하고 북해 일대를 장악했다. 항우는 휘하의 군사들을 엄격하게 다스렸지만, 전영에 대한 지독한 원한 때문에 점령지에 대한 약탈을 허락했다. 산동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포로는 대부분 생매장됐다. 천하를 도모하는 영웅으로서는 도저히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자행한 것이다. 백성들은 누르면 누를수록 더 단결해 저항한다. 게다가 산동인들의 기질은 ‘산동대한(山東大漢)’이라는 말처럼 중국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격렬하다. 산동의 민심은 항우를 등졌다. 항우는 산동이라는 수렁에 빠졌다.

동방의 전황은 유방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관중을 수복한 그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생산을 장려하며 과거에 자신이 약속했던 ‘약법삼장’을 실행에 옮겼다. 진의 황실과 귀족들이 차지했던 대규모의 원림과 농토가 농민들에게 개방됐다. 이러한 조치로 수복지역의 민심을 얻고 생산력을 높인 유방은 관중을 자신의 본거지로 다질 수 있었다. 항우가 산동의 민심을 잃은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관중이 안정되자 유방은 항우가 산동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는 틈을 노려 동방진출을 시도했다. 유방의 동방진출이 본격화되자 산동에 있던 항우는 비로소 불안함을 느꼈다. 은왕 사마앙마저 항복하자 그의 불안감은 더 깊어졌다. 전에도 사마앙은 항우를 배반한 적이 있었다. 항우는 진평(陳平)에게 진압명령을 내렸다. 진평은 간단하게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한 사마앙이 다시 배반하자, 전형적인 무인이었던 항우는 진평을 강하게 문책했다. 목숨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진평은 유방에게 투항했다. 항우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물론 당시에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평은 여러 가지의 기책으로 항우의 몰락을 재촉했다. 관중에서의 승리로 유방은 많은 인재를 얻었다. 그것으로 초한전의 승부가 결정됐다.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