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 經一章
三 綱領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八 條目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則近道矣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治其知 致知在格物 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 意誠而后心正 心正而后身修 身修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后天下平 自天子 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未之有也
大學章句大全
章句는 주자가 착종된 대학을 정리하여 풀이한 것을 말하며, 大全은 대학의 여러 集註를 모아 놓은 것을 말합니다.
大舊音泰 今讀如字
大의 고음은 태이나 지금은 자 그대로 대라고 읽는다.
子程子曰
자정자 왈,
子는 상대를 높이는 의미가 있음, 공자왈보다 자왈이 더 많이 나오는데, 자왈은 (우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공자왈은 다른 사람이 들은 것을 말한 것으로 구분시킬 수가 있다.
앞에 또 자가 붙은 것은 묵자의 제자들이 자기의 스승을 더 높이는 의미로 子墨子라고 하였는데 후대에 이와 같은 명칭이 등장함.
新安陳氏曰
程子上加子字 倣公羊傳註 子沈子之例 乃後學宗師先儒之稱
程子 위에 子를 더한 것은 公羊傳 註에 子沈子의 例를 모방한 것인데 후학들이 스승을 받드는 先儒의 칭호이다.
大學 孔氏之遺書而初學入德之門也 於今可見古人爲學次第者
獨賴此篇之存而論孟次之 學者必由是而學焉則庶乎其不差矣
대학은 공씨(공자)의 남긴 글이니, 처음 배우는 자가 덕에 들어가는 문이다. 지금에 옛 사람들이 학문을 한 순서를 볼 수 있는 것은 유독 이 편이 남아 있음에 의지할 뿐이고 논어와 맹자가 그 다음이 되니, 배우는 자가 반드시 이(대학)로 말미암아 배우면 거의 (도에) 차질이 없을 것이다.
龜山楊氏曰
大學一篇 聖學之門戶 其取道至徑 故二程 多令初學者讀之
대학의 일편은 성학의 문이며 그 도에 나아감에 지극히 빠른 길이다. 고로 二程은 초학자들에게 많이 읽도록 했다.
朱子曰
大學首尾貫通 都無所疑然後 可及語孟 又無所疑然後 可及中庸
대학을 首尾貫通하고 전혀 의문이 없는 然後에 論孟에 나아 가야하고 또 論孟에 의문이 없는 然後에 中庸에 나아 가야한다.
某要 人先讀大學 以定其規模 次讀論語 以立其根本 次讀孟子 以觀其發越 次讀中庸 以求古人之微妙
내가 요구하기를 먼저 大學을 읽고 그 規模를 定한 후에 논어를 읽어 그 根本을 세우고, 다음 孟子를 읽고 그 發越(막힘이 없는 것)을 본 후에 중용을 읽고 古人의 微妙한 철학을 구해야 한다.
陳氏曰
爲學次序自有其要 先須大學 以爲入德之門 以其中說明明德新民 具其條理 實羣經之綱領也 次則論語 以爲操存涵養之實 又其次則孟子 以爲體驗充廣之瑞 三者旣通然後 會其極於中庸 又曰 大學規模廣大 以本末不遺 節目詳明而始終不紊 學者所當最先講明者
학문을 하는 차례는 본래 요령이 있으니 반드시 대학을 먼저 하여 덕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 것은, 그 대학에는 명명덕과 신민을 설명하여 그 조리가 갖추어 있으며, 진실로 여러 경서의 강령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 논어를 읽어 操存 涵養의 實로 삼고, 또 다음 맹자를 읽어 體驗 充廣의 단서로 삼는다. 세 권의 책을 완전 통독한 연후에 중용에서 그 지극함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대학은 그 규모가 광대하나 本末이 빠짐이 없고 節目이 상세하며 처음과 끝이 잘 정리되어 있으니, 학자가 마땅히 제일 먼저 講明(익히고 그 뜻을 밝힘)해야 할 것이다.
新定邵氏曰
他書言平天下本於治國 治國本於齊家 齊家本於修身者有矣 言修身本於正心者亦有矣 若夫推正心之本於誠意 誠意之本於致知 致知之在於格物則他書未之言 六籍之中惟此篇而已
타서에 평천하는 치국을 근본으로 하고, 치국은 제가를 근본으로 하며, 제가는 수신을 근본으로 한다는 말이 있다. 수신은 정심을 근본으로 한다는 말도 또한 있다. 이에 미루어 정심의 근본은 성의에 성의의 근본은 치지에, 치지는 격물에 있다 하면 타서에는 그렇게 말한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육서(육적)중 오직 이 대학 책뿐이다.
經文 1章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대학의 도(대학의 목적)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가서 멈춤)에 있다.
程子曰 親當作新
○ 大學者 大人之學也 明明之也 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정자(정이천) 왈, 친은 마땅히 신이 되어야 한다.
(학문 명칭의) 대학은 대인(군자)의 학문이다. 명은 명덕을 밝힘이다.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것이 허령(비어 있지만 영명함, 마음을 지칭)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리(온갖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정주학자의 견해).
明德은 大德 達德 峻德(俊德)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명은 밝다 어둡다. 의미가 아니고 大 達 俊 등의 뜻.
親과 新은 주희는 절대 新으로 여기지만 후의 왕수인(양명학)은 또 親이라고한다. 주희는 先知後行으로 앎이 있은 연후에 행을, 수인은 先行後知 행이 있어야 앎을 주장하니 모두 백성을 ~ 하게 하는 의미이다.
서경 요전 첫 장에 보이는 준덕(명덕)은 간섭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光被四表 格于上下
덕(光)이 사방 바깥에 입혀지고, 천지에 도달했다. 라고 표현하고, 表는 바깥에, 言表 言外로 말 밖의 뜻, 말로 나타낸 뜻도 있다.
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旣睦 平章百姓 百姓昭明 協和萬邦 黎民 於變時雍 옹
큰 덕을 밝혀서(수신), 구족(자기의 위아래 4대)을 친목(내가 간섭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 끼리 친하게)하게 했다. 구족이 화목하고 백성을 고루 밝히니 백성이 밝게 드러나며, 만방을 서로 화합하게 하니. 백성들이 아! 변해서 이에 서로 화목하였다.
親=平章=協和 은 모두 간섭받지 않은 자유에서 화목. 구족 – 백성 – 천하 만방은 제가 – 치국 – 평천하를 뜻함
요의 擊壤歌의 태평성대도 간섭이 없는 것을 의미함.
日出而作 日入而食 帝力于我 何有哉 天下有道則庶人不議(백성이 비난 논의 하지 않는다)
朱子曰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 人與物受之者謂之性 主於一身者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德
하늘이 人物에 부여한 것을 命이라 하고 人物이 부여받은 것을 性이라 하며, 몸의 주인이 된 것을 心이라 한다. 하늘에서 부여 받아 光明正大한 것을 明德이라 한다
○ 門明德是心是性 曰 心與性自有分別 靈底是心 實底是性 性便是那理 心便是盛貯該載敷施發用底 心屬火 緣他是箇光明發動底物 所以具得許多道理 如向父母則有那孝出來 向君則有那忠出來 這便是性 如知道事親要孝 事君要忠 這便是心
張子曰 心統性情 此說最精密
明德은 心입니까 性입니까 물으니 왈, 심과 성은 본래 구별이 있으니 靈이 心이고 實이 性이다. 性은 곧 이치이고, 心은 곧 담고 쌓아 모든 것을 간직하여, 펼쳐 베풀고 드러내어 쓰는 것이다. 心은 불에 속하므로 다른 光明 發動의 物로 말미암아 허다한 도리를 갖추어 얻게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를 보면 孝가 생기고 君를 보면 忠이 생기는 데, 이러한 것이 바로 性이고, 부모를 섬김에 효가 필요하고, 임금을 섬김에 충이 필요함을 아는 것(知道), 이것이 바로 心이다.
장자가 말한, 心이 性과 情을 통솔한다는 이 설명이 매우 정밀하다.
○ 虛靈不昧便是心 此理具足於中 無少欠闕便是性 隨感而動便是情
허령불매(私心이 없고 靈妙하여 어둡지 않음)한 것이 바로 心이고, 이러한 허령불매함의 이치가 마음에 구비되어 조금이라도 흠결이 없는 것이 바로 性이고,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바로 情이다.
○ 虛靈自是心之本體 非我所能盡也 耳目之視聽所以視聽者卽是心也 豈有形象 然有耳目以視聽之則猶有形象也 若心之虛靈 何嘗有物
허령은 본래 마음의 본체이지만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耳目의 시청도 보고 듣게 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지 어찌 형상이 있겠는가? 그러나 耳目이 있어 시청을 하는 것이니 형상이 있는 거와 같지만, 心의 허령같은 것은 어찌 이전부터 物이 있다고 하겠는가?
○ 只虛靈不昧四字說明德意已足矣 更說具衆理應萬事 包體用在其中 又却實而不爲虛 其言的確渾圓 無可破綻處
단지 허령불매 넉자로 명덕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 이미 충분한데, 다시 모든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한다고 설명을 하여 체용을 그 속에 포함시켰으니, 또한 實이면서 虛하지 않게 하였고, 그 말이 적확하고 원만하여 잘못됨이 없다.
○ 北溪陳氏曰
人生得天地之理 又得天地之氣 理與氣合所以虛靈
사람이 태어나면 천지의 이치를 부여 받게 되고, 또 천지의 氣를 부여 받으니, 理와 氣가 합하여 虛靈이 되는 것이다.
○ 黃氏曰
虛靈不昧明也 具衆理應萬事德也 具衆理者 德之全體未發者也 應萬事者德之大用 已發者 所以應萬事者 卽 其具衆理者之所爲也 未發則炯然不昧 已發則品節不差 所謂明德也
허령불매는 明이고, 모든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대응한다는 것은 德이다. 모든 이치를 갖추는 것은 덕의 전체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고, 만사에 응하는 것은 덕의 큰 작용으로 이미 나타난 것이니 만사에 대응하는 것은 바로 모든 이치를 갖추어 행하는 것이다. 들어내지 않음은 밝아 어둡지 않은 것이고 이미 들어내면 등급과 절차가 어긋나지 않으니 이른바 명덕이다.
○ 玉溪盧氏曰
明德只是本心 虛者心之寂 靈者心之感 心猶鑑也 虛猶鑑之空 明猶鑑之照 不昧申言其明也 虛則明存於中 靈則明應於外 惟虛故具衆理 惟靈故應萬事
명덕은 다만 본심이고, 텅 비었다는 것은 마음이 고요함이다. 신령스러운 것은 마음의 느낌이다. 마음은 거울과 같으니 虛는 거울에 비친 것이 없는 것이고, 明은 거울에 비치는 것과 같다. 不昧는 그 明을 거듭 말한 것이다. 텅 비었다는 것은 밝음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이고, 신령스럽다는 것은 밝음이 바깥에 응하는 것이다. 虛하게 때문에 모든 이치를 갖추게 되는 것이고, 신령스럽기 때문에 만사에 응하게 되는 것이다.
○ 東陽許氏曰
大學之道是言大學中 敎人修爲之方 如君子深造之以道之道
대학의 道는 대학의 책에, 남을 가르치고 몸을 수양하는 방법을 말한 것이니, 군자는 道로서 깊이 나아간다는 道字와 같은 것이다.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則有未嘗息者 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以復其初也
다만 기품에 구애되는 바와 인욕에 가리운 바가 되면 어두울 때가 있으나,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이 쉰 적이 없다(未嘗).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마땅히 그(명덕) 발하는 바를 인하여 마침내 명덕을 밝혀서 그 처음(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朱子曰
明德未嘗息 時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孺子入井而怵惕 見非義而羞惡 見賢人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德之發見也 雖至惡之人亦時有善念之發 但當因其所發之端 接續光明之
明德은 일찍이 쉰 적이 없어 일상생활에 늘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어린 아이가 우물곁으로 가면 두려워(怵惕) 여긴다든가 불의를 보면 미워(羞惡)) 한다든가 현인을 보면 恭敬 한다든가 착한 일을 보면 歎慕(마음으로 따름) 한다든가 등 이러한 모든 것이 명덕의 發現이다. 비록 지극히 악인일지라도 착한 마음이 보일 때가 있으니, 다만 그 발현하는 바의 단서에 인하여 계속 이어주고 빛내고 밝게 함이 마땅한 것이다.
○ 明德謂本有此明德也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無不知敬其兄 其良知良能本自有之 只爲私欲所蔽 故暗而不明 所謂明明德者求所以明之也 譬如鏡焉 本是箇明底物 緣爲塵昏 故不能照 須是磨去塵垢然後 鏡復明也
명덕은 본래부터 있는 이 명덕을 말한다.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친하지 않음이 없고 자라서는 형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한 良知와 良能은 본래부터 있는 것인데, 다만 사욕에 가리게 되면 어두워 밝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그 명덕을 밝히는 이치를 찾는 것이다. 거울에 비유해보면 거울은 본래 밝은 물건이나, 먼지로 희미하게 되면 밝게 비추지 못하게 되니, 반드시 먼지와 허물을 닦고 없앤 후에야 다시 밝게 비출 수 있는 것이다.
○ 明德是一箇光明底物事 如一把火 將去照物則無不燭 便是明德若漸隱微 便暗了 吹得這火著 便是明其明德
명덕은 하나의 광명한 물건이니, 횃불을 쥐고 있는 것과 같아서, 가지고 가서 물건에 비추면 밝게 보이나, 이 명덕이 만약 점점 희미하게 되어 어두워지게 되면, 불어서 그 불을 밝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 명덕을 밝게 하는 것이다.
○ 新安吳氏曰
氣稟拘之有生之初 物欲幣之有生之後 不昧者所以昏也 然雖有昏昧之時而無息滅之理
부여받은 기질에 매인다는 것은 타고난 生前의 일이고, 物欲이 그것을 은폐한다는 것은 生後의 일이니, 본래 어둡지 않는 것(不昧)이 昏迷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昏昧한 때는 있으나 息滅(없어지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 雙峯饒氏曰
明之之功有二 一是因其發而充廣之 使之全體皆明 一是因已明而繼續之使無時不明
명덕을 밝히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그 발현하는 바에 의하여 그것을 채우고 넓혀 모두 밝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밝아져 있는 것으로써 그것을 계속하여 밝지 않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 雲峯胡氏曰
章句釋明德以心言而包性情在其中 虛靈不昧是心 具衆理是性 應萬事是情 有時而昏又是說心 本體之明又是說性 所發又說情 當因其所發而遂明之 卽孟子言四端而謂知皆擴而充之也
주자의 章句에는 명덕의 해석을 心을 가지고 말했으나, 本性과 感情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이니, 虛靈不昧라고 하는 것은 心을 말하는 것이고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本姓을 말하는 것이다. 만사에 응한다는 것은 感情이고 가끔 혼미해진다는 것은 또한 心을 말한 것이요, 본체의 밝음은 또한 本姓을 말한 것이고, 발현하는 하는 바에 의한다는 것은 또한 感情을 말하는 것이다. 마땅히 그 발현하는 바에 의하여 마침내 明德을 밝게 한다는 것은 바로 맹자가 말하는 四端을 알아서 모두 넓혀서 채운다고 하는 것이다.
○ 新安陳氏曰
常人於明德之發見 隨發而隨泯 學者於明德之發見處 當體認而充廣之 所謂遂明之也 氣稟拘物欲弊則明者昏而初者失 致其照之之功 以變化其氣質則昏者明而初者復
보통 사람은 명덕 발현이 나타났다가 나타나지 않았다가 하는 것이니, 학자는 명덕이 발현할 때는 마땅히 체득하여 알아서 채우고 넓히도록 해야 하니 이른바 밝힌다(遂明之)고 하는 것이다. 태어난 기품에 매이고 물욕에 가리여 명덕이 흐리게 되어 처음에는 상실할 수 있으니 명덕을 밝히는 노력에 힘을 다해 그 기질(氣稟拘)을 변화시킨다면 흐린 명덕이 밝아질 수 있고 처음의 것이 회복되는 것이다.
○ 東陽許氏曰
氣稟所拘 就有生之初言之 人欲所弊 就有知之後言之
氣稟所拘는 生이 있는 처음에 관하여(就) 말한 것이고, 人欲所弊는 지각이 있는 뒤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新者 革其舊之謂也 言旣自明其明德 又當推以及人 使之亦有以去其舊染之汚也
신은 옛 것(구습)을 고침을 이르니, 이미 스스로 그 명덕을 밝혔으면
또 마땅히 미루어 남에게까지 미쳐서 그로 하여금 또한 옛날에 물들었던 더러운 것을 제거함이 있게 함을 말한다.
朱子曰
此理 人所均有 非我所得私 旣自明其德 須當推以及人 見人爲氣與欲所昏 豈不惻然 欲有以新之
이러한 명덕의 이치는 사람에게 균등하게 있는 것이요, 나가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자기가 그 덕을 밝혔으면 모름지기 마땅히 미루어 남에게 미치도록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기질과 욕심에 의해 혼미해져 있는 것을 보고, 어찌 측은히 여겨 그를 새롭게(밝게) 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 問明德新民在我有以新之 至民之明其明德却又在他 曰雖說是明已德新民德 然其意自可參見 明明德於天下 自新以新其民可知
명덕과 신민은 나에게 있으니 그것을 새롭게 할 수 있지만, 백성이 자기의 명덕을 밝히는 것에는, 역시 백성들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까? 질문하니 말하기를 비록 이것은 자기의 덕을 밝히고 남의 덕을 새롭게 한다고 말했으나, 그 뜻을 스스로 (다른 글과 서로)참고해서 보아야 좋은 것이니, 천하에 명덕을 밝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새롭게 하여 백성을 새롭게 함을 알 수 있다.
北溪陳氏曰
新與舊對 明者昏則舊矣 感發開導去其舊汚則昏者復明 又成一箇新底 是新之也
新과 舊는 상대적인 것이니, 밝음이 혼미해 지는 것이 舊이다. 느껴 발하고 개발하고 인도해서 오염된 옛 것을 제거하면 혼미한 것이 다시 밝아져서, 또한 새로운 것을 이룰 것이니 이것이 새롭게 하는 것이다.
玉溪盧氏曰
新民是要人人皆明明德 民無不新則民之明德無不明 而我之明德明於天下矣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명덕을 밝게 하는 것을 요구 하니, 모든 사람이 새롭게 되지 않음이 없으면 모든 사람의 명덕이 밝지 않음이 없고, 그러면 나의 명덕이 천하를 밝게 하는 것이다.
新安陳氏曰
書云 舊染汚俗咸與惟新 章句本此以釋新民
書에서는 ‘오염된 옛 것과 나쁜 풍속을 모두 함께 새롭게 했다.’ 고 했는데 章句는 이것을 근본으로 하여 新民을 해석하였다.
止者 必至於是而不遷之意 至善則事理當然之極也
지는 반드시 이에 이르러 옮기지 않는 뜻이고, 지선은 사리의 당연한 극이다.
朱子曰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君子無所不用其極也
止를 설명하고 또 至를 설명한 것은 바로 저 지극한 곳에 이른 후에 머묾을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지극함을 사용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 고 말했다.
○ 未至其地則必求其至 旣至其地則不當遷動而之他也 未至此便往不可謂止 至此不能守亦不可謂止
그 곳에 이르지 못했으면 필히 그 지극한 곳을 찾을 것이고, 이미 그 곳에 도달 하였으면 당연히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 이 지극한 곳에 이르지 못하고 머물게 되면 止를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이 지극한 곳에 이르러 또한 그 곳을 지키지 못해도 止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至善如言極好道理十分盡頭 善在那裏 自家須去止他 止則善與我一 未能止善自善我自我
지극한 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道理)을 매우 좋아 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선이 그 곳에 있으면 스스로 반드시 그곳에 가서 머물 것이며, 그곳에 머물면 곧 선과 내가 하나가 되고, 선에 머물지 못하면 善自善 我自我가 된다.
○ 雲峯胡氏曰
必至於是 知至至之也 不遷 知終終之也
반드시 여기에 이른다는 것은 이르는 곳을 알아 그 곳을 지극히 하는 것이요, 옮기지 않는다는 것은 끝임을 알아 그 곳에서 마치는 것이다.朱子曰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君子無所不用其極也
하나의 止字를 말하고 또 하나의 至字를 말한 것은, 바로 저 지극한 곳에 이른 후에 머묾을 요구한 것이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지극함을 사용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고 말했다.
○ 未至其地則必求其至 旣至其地則不當遷動而之他也 未至此便往不可謂止 至此不能守亦不可謂止
그 곳에 이르지 못했으면 반드시 그 지극한 곳을 찾을 것이고, 이미 그 곳에 도달 하였으면 당연히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 이 지극한 곳에 이르지 못하고 머물게 되면 止를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이 지극한 곳에 이르러 그 곳을 지키지 못해도 역시 止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至善如言極好道理十分盡頭 善在那裏 自家須去止他 止則善與我一 未能止善自善我自我
至善(지극히 착함)은 지극히 좋은 도리를 십분 다한다는 말과 같다. 선이 저 곳에 있으면 자기(自家)가 반드시 그곳에 가서 머물러야 하니, 머물면 선과 내가 하나가 되고, 선에 머물지 못하면 善自善 我自我가 될 것이다.
雲峯胡氏曰
必至於是 知至至之也 不遷 知終終之也
반드시 여기에 이른다는 것은 이를 줄 알아서 이르는 것이고, 옮기지 않는다는 것은 마칠 줄을 알아서 마치는 것이다.
言明明德 新民 皆當止於至善之地而不遷
蓋必其有以盡夫天理之極而無一毫人欲之私也
명명덕과 신민을 모두 마땅히 지선의 경지에 그쳐서 옮기지 않음을 말한 것이니, 반드시 천리의 극을 다하고 일호라도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다.
朱子曰
明德新民非人力私意所爲 本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如孝是明德 然自有當然之 則 不及固不是 若過其則 必有刲股之事 須是到當然之則處而不遷 方是止於至善 止至善 包明 德新民 己也要止於至善 民也要止於至善 在他雖未能 在我所以望他則不可不如是也
명덕과 신민은 인력과 사사로운 뜻으로 할 바가 아니며, 본래 하나의 당연한 규칙이 있어서 過도 옳지 않고 不及도 역시 옳지 않다. 예를 들면 효는 명덕이나 스스로 당연한 규칙이 있어서 불급도 참으로 옳지 않지만 만약 그 규칙을 지나치게 하면 반드시 刲股(넓적다리를 베어 봉양하는 일)의 일이 있게 될 것이다. 반드시 이 당연한 규칙에 이르러 머물고 옮기지 않아야 바야흐로 이것이 止善에 머무르는 것이니, 至善에 머무는 것이 명덕과 신민을 포괄하는 것이다. 자기도 至善에 머물고 백성도 至善에 머무는 것이 요구되니, 다른 사람이 비록 잘하지 못 하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問明明德是自己事 可以做得到極好處 若新民則在人 如何得他到極好處
曰 且敎自家先明得盡然後 漸民以仁 摩民以義 如孟子所謂勞之來之匡之直之輔之翼之 又從而振德之 如此變化他自解到極好處
명덕을 밝히는 일은 자기의 일이니 지극히 좋은 곳에 이를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새롭게 하는 일(新民)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니 어떻게 그 사람을 지극히 좋은 곳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니 왈
우선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먼저 명덕을 잘 밝힌 후에, 仁으로써 다른 사람을 점차 인도하고 義로써 다른 사람을 지도하여, 맹자가 말하는 소위 그를 위로하고, 오게 하고, 바르게 해주고, 바로 세워 주고, 도와주고, 품어주고 또 따르게 해서 진작시켜 주고 덕을 베푸는 것이니, 이와 같이 변화를 시키면 그 사람은 저절로 지극히 좋은 곳에 갈 줄을 알게 될 것이다.
○ 問至善不是明德外別有所謂善 只就明德中 到極處 便是否
曰 是明德中也有至善 新民中也有至善 皆要到那極處 至善只是以其極言 不特是理會到極處 亦要做到極處 如爲人君止於仁 固是一箇仁 然亦多般 須是隨處看 如這一事合當如此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亦是仁 若不理會 只管執一 便成一邊去 安得謂之至善 至善只是恰好處
지극한 선은 명덕 이외 별도로 이른바 善이 있어 말한 것이 아니고 다만 명덕 중에 지극한 곳에 이르는 것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라고 질문하니, 말씀하시기를 명덕 가운데 지극한 선이 있고, 신민 가운데도 지극한 선이 있으니, 모두 저 지극한 곳에 이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지극한 선은 단지 그 극점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지극한 곳에 이르는 것을 이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실행해서 지극한 곳에 이르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임금이 되어서는 仁에 머문다. 진실로 한 가지의 인이나, 또한 (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반드시 처한 곳에 따라 봐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이 한 가지 일이 이와 같이 딱 알맞으면 인이요, 저 일이 마땅히 저와 같이 딱 알맞으면 또한 인이니, 만약 처한 곳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한 곳만 고집을 하면 곧 한 쪽으로 향해 갈 것이니, 어찌 지선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극한 선은 다만 처한 곳에 알맞은 좋은 곳이다.
雙峯饒氏曰
明德以理之得於心者言 至善以理之見於事者言 以明明德對新民則明明德爲主 以明明德新民對止至善則止至善爲重
明德은 理를 마음에 얻는 것으로 말한 것이요, 至善은 理가 일에 나타나는 것으로 말한 것이니, 明明德을 新民에 상대해 보면 明明德이 主가 되고, 明明德과 新民을 止至善에 상대해 보면 止至善이 重한 것이 된다.
新案吳氏曰
止至善爲明明德新民之標的 極盡天理絶無人欲爲止至善之律令 然旣言事理當然之極 又言天理之極者 蓋自散在事物者而言則曰事理 是理之萬殊處 一物各具一太極也 自人心得於天者而言則曰 天理 是理之一本處 萬物體統一太極也 然一實萬分故曰事理 衆理會萬爲一則曰天理 一理而已
止至善은 明明德과 新民의 목표가 되고, 天理를 다하여 人欲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止至善의 律令이 된다. 그러나 이미 事理當然之極을 말했는데, 또 (여기서) 天理之極을 말한 것은, 대개 사물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부터 말하면 왈, 사물의 이치이다 하니, 이것은 이치는 만 가지의 다른 곳에 적용이 되고, 하나의 사물은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춘 것이며, 하늘로부터 얻은 人心으로 말해 본다면 왈, 바로 天理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치가 하나의 근본이 되는 곳이며, 만물이 하나의 태극을 체로하고 태극에 통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가 실제로 만 가지로 분산되어 있으니 왈, 일의 이치이다. 라고 말했고, 모든 이치가 모여 만 가지가 하나로 되니 왈, 하늘의 이치이다. 라고 말한 것이니, 똑 같은 이치일 뿐이다.
新安陳氏曰
天理人欲相爲消長 纔有一毫人欲之私 便不能盡夫天理之極 不得云止於至善矣
天理와 人欲은 서로 消長을 하는 것이니, 인욕의 사사로움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天理의 지극함을 다할 수 없는 것이니 지극한 선에 머문다고 말할 수 없다.
此三者 大學之綱領也
이 세 가지는 대학의 강령이다.
新安陳氏曰
綱以大綱言 如網之有綱 綱擧則目張 領以要領言 如裘之有領 領挈而裘順
綱은 큰 벼리로 말한 것이니, 그물에 벼리가 있는 것과 같아서 벼리를 들면 그물의 구명이 드러난다. 領은 요령으로 말한 것이니, 갖옷에 깃고대가 있는 것과 같아서 깃고대를 들면 갖옷이 바르게 들린다.
朱子曰
明明德新民止於至善 此八字 已括盡一篇之意
明明德新民止於至善 이 여덟 글자는 이미 이 대학의 뜻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玉溪盧氏曰
明明德是下文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之綱領 新民是下文 齊家治國平天下之綱領 止至善總明明德新民而言 又八者逐條之綱領 要而言之則明明德又 爲三者之綱領乃大學一書之大綱領也
明明德은 下文에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의 강령이고 신민은 하문에 제가치국평천하의 강령이다. 止至善은 명명덕과 신민을 총괄해서 말한 것이고, 또 여덟가지는 조목 하나 하나의 강령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명명덕은 또 삼자의 강령이니 바로 대학의 큰 강령이다.
番易沈氏曰
大學之體在明德 其用在新民 其體用之準則在止至善 要其用力之方在知與行而已 格物致知知之事也 誠意正心修身行之事也 行以知爲先 知以行爲重 知之精則行愈達 行之力則知愈進 物格而知以至 意誠心正而身以修則吾德之本明者 極其明而五身之所止者 極其善矣 由身而家而國而天下 善敎行焉 善政施焉 莫不革其舊染而復其性初 天下之明德 非一人之明德乎 一人之至善 非天下之至善乎
대학의 본체는 明德에 있고 그 적용은 新民에 있다. 그 체용의 준칙은 止至善에 있다. 그 용력의 방법을 요약한 것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 있다. 격물치지는 아는 일이고, 성의정심수신은 행하는 일이다. 행은 지가 우선이고, 지는 행을 중하게 여기니 아는 것이 정밀하면 행함이 더욱 능숙하고, 행에 힘쓰면 아는 것이 더욱 많아진다. 물격이면 아는 것이 지극해지고 의성심정해서 몸이 수양되면 내 덕의 본래 밝은 것이 지극해지고 내 몸이 머무는 바가 그 선에 지극할 것이다. 내 몸이 집에 나라에 천하에서 잘 가르쳐 행하고, 정치를 잘 해서 베풀면, 낡고 오염된 것을 새롭게 하여 그 본성을 회복시키니, 천하의 밝은 덕이 한 사람의 밝은 덕이 아니겠는가? 한 사람의 지극한 선이 천하의 지극한 선이 아니겠는가?新安陳氏曰
綱以大綱言 如網之有綱 綱擧則目張 領以要領言 如裘之有領 領挈而裘順
綱은 큰 벼리로 말한 것이니, 그물에 벼리가 있어서 벼리를 들면 그물의 눈이 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領은 요령을 말이니, 갖옷에 옷깃이 있어서 옷깃을 들면 갖옷이 바르게 들리는 것과 같다.
朱子曰
明明德 新民 止至善 此八字 已括盡一篇之意
明明德 新民 止至善 이 여덟 글자는 이미 이 대학의 뜻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玉溪盧氏曰
明明德是下文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之綱領 新民是下文 齊家治國平天下之綱領 止至善總明明德新民而言 又八者逐條之綱領 要而言之則明明德又 爲三者之綱領乃大學一書之大綱領也
明明德은 下文의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의 강령이고 新民은 하문의 齊家 治國 平天下의 강령이다. 止至善은 明明德과 新民을 총괄해서 말한 것이며, 또한 여덟 가지 세목의 강령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明明德은 또한 삼자의 강령이 되니 바로 대학 책의 큰 강령이다.
番易沈氏曰
大學之體在明德 其用在新民 其體用之準則在止至善 要其用力之方在知與行而已 格物致知知之事也 誠意正心修身行之事也 行以知爲先 知以行爲重 知之精則行愈達 行之力則知愈進
대학의 본체는 明德에 있고 그 적용은 新民에 있다. 그 體의 적용에 표준으로 삼아서 따라야 하는 규칙은 止至善에 있다. 그 적용에 힘을 쓰는 방법의 요점은 것이 知와 行에 있을 뿐이니, 격물치지는 知의 일이고, 성의정심수신은 行의 일이다. 行은 知가 우선이고, 知는 行을 중하게 여기니 知가 정밀하면 行이 더욱 능숙하고, 行에 힘쓰면 아는 것이 더욱 나아진다.
物格而知以至 意誠心正而身以修則吾德之本明者 極其明而五身之所止者 極其善矣
物格으로 앎에 이르고, 意誠 心正해서 몸이 닦여지면 내 덕의 본래 밝은 것이 그 밝음이 지극해지고 내 몸이 머무는 바가 그 善이 지극할 것이다.
由身而家而國而天下 善敎行焉 善政施焉 莫不革其舊染而復其性初 天下之明德 非一人之明德乎 一人之至善 非天下之至善乎
몸에서부터 집에 나라에 천하에 이르기까지 善敎가 행해지고 善政이 베풀어지면, 오염된 옛 것을 변화시켜서 본성의 처음을 회복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천하의 明德이 한 사람의 明德이 아니겠으며, 한 사람의 至善이 천하의 至善이 아니겠는가.
3강령 끝
'大學 工夫' 카테고리의 다른 글
第 4-5章 格物致知 (0) | 2022.05.28 |
---|---|
第 3章 止於至善 (0) | 2022.05.28 |
第 1-2章 明明德 新民 (0) | 2022.05.28 |
八條目 (0) | 2022.05.28 |
大學章句序 (0) | 2022.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