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 工夫

八條目

bindol 2022. 5. 28. 05:25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그칠 데를 안 뒤에 정함(향하는 곳, 방향)이 있으니, 정한 뒤에 고요할 수(마음이 안정, 딴 마음을 갖지 않음) 있고 고요한 뒤에 편안할 수 있으며 편안한 뒤에 깊이 생각할 수 있고 깊이 생각한 뒤에 얻을(판단이 올바를 수) 수 있다.

安은 유가에서 중요시함, 논어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하는 일(=)을 보고, 왜 그 일을 하는지 동기를 살피고, 그것을 편안히 하는지를 자세히 살핀다. 그러면 믿어도 된다.

止者 所當止之地 卽至善之所在也

지는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니, 바로 지선이 있는 곳이다.

此止字卽 接上文在止於至善之止字 說下來

이 止字는 바로 上文의 在止於至善의 止字을 이어 설명해온 것이다.

 

知之則志有定向 靜謂心不妄動 安謂所處而安

慮謂處事精詳 得謂得其所止

이것을 안다면 뜻이 정한 방향이 있을 것이다. 정은 마음이 망령되이 동하지 않음을 이르고, 안은 처한 바에 편안함을 이르고, 려는 일을 처리하기를 정밀하고 상세히 함을 이르고, 득은 그 그칠 바를 얻음을 이른다.

朱子曰

知止是識得去處 旣識得心中便定 更不他求 如行路知得從這一路去 心中自是定 如求之此又求 之彼 卽是未定 定靜安慮得 五字是功效次第 不是工夫節目 纔知止 自然相因而見

머물 것을 안다는 것은 갈 곳을 아는 것이니, 이미 마음에 정해진 것이 있으면 다시 다른 데 구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길을 갈 때 이 길을 따라가야 할 길임을 안다면 마음이 자연이 정해진 것이다. 만약에 이 길인가, 또는 저 길인가 하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定靜安慮得의 다섯 글자는 공부의 효과가 나타나는 차례이지, 공부를 하는 節目은 아니니, 만약(纔) 머물 것을 알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서로 연관이 되어 알게 된다.

○ 定靜安相去不遠 但有淺深耳 與中庸動變化相類 皆不甚相遠 定以理言 故曰有 靜以心言 故曰能 靜是就心上說 安是就身上說

定靜安 등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으며, 단지 얕고 깊음이 있을 뿐이다. 중용의 動變化와 서로 類가 되며, 모두 서로 큰 차이가 없다. 定은 理로 말했기 때문에 有라 했고, 靜은 마음으로 말했기 때문에 能이라고 했다. 靜은 心에 관하여(就) 말한 것이고 安은 身에 관하여 설명을 한 것이다.

 

○ 旣見得事物有定理而此心恁地寧靜了 看處在那裏 在這裏也安 在那裏也安 安而後能慮 慮是思之精審 今人心中搖漾不定疊 還能處得事否 人處事於叢冗急遽之際而不錯亂 非安不能也 知止是知事物所當止之理 到臨事 又須硏幾審處 方能得所止

사물에 정한 이치가 있음을 이미 터득해 알아서 이 마음이 이와 같이(恁地) 편안하고 고요해지면, 어디에(那裏) 처함에 이곳에(這裏) 있는 것이 편안한지 저곳에(那裏) 있는 것이 편안한지를 분별(看)하여, 편안한 후에야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慮는 생각이 정밀하고 자세한 것이다. 지금 心中이 요동쳐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도리어 일을 처리할 수 없지 않은가? 사람이 일의 처리에 복잡하고 위급할 때에 어긋나고 뒤섞이지 않는 것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사물의 마땅히 머무는 이치를 아는 것이니, 일에 임해서는 또한 반드시 기미를 궁구하고 처리를 자세히 살펴야 바야흐로 머무는 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 知止只是知有這箇道理也 須是得其所止方是 若要得其所止 直是能慮方是 能慮却是要緊 知止如知爲子而必孝 知爲臣而必忠 能得是身親爲忠孝之事 若徒知這箇道理 至於事親之際 爲私欲所汨 不能盡其孝 事君之際爲利祿所汨 不能盡其忠 這便不是能得矣 能慮是見得此事合當如此 便如此做

머무름을 안다는 것은 단지 저와 같은 道理가 있다는 것만 아는 것이니, 반드시 그 머무는 곳을 알아야 바야흐로 옳은 것이고, 만약 그 머무는 곳을 알기를 요구한다면 곧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니.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다. 머무는 것을 안다는 것은 바로 자식이 되면 반드시 효도를 해야 하고 신하가 되면 반드시 충성을 해야 됨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고, 얻을 수 있다(能得)는 것은 몸소 친히 충성하고 효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만약 단지 저와 같은 道理를 알기만 하고 어버이를 섬길 때에 이르러서는 사사로운 욕심에 빠져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 임금을 섬길 때는 녹에만 빠져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얻을 수 있음(能得)이 아니니, 생각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이 일은 마땅히 이와 같이 딱 알맞으며 바로 이와 같이 해야 함을 터득하여 얻는 것이다.

 

○ 知止如射者之於的 得止是已中其的

머무름을 앎은 활쏘기의 표적과 같은 것이며, 머무름을 얻음(得止)음 이미 그 표적에 적중을 한 것이다.

 

○ 定靜安三者雖分節次 其實知止後 皆容易進 安而後能慮 慮而後能得 此最是難進處 多是至安處住了 安而後能慮 非顏子不能之 去得字之位 雖甚近 然只是難進 挽弓到臨滿時分外 難開

定靜安 三字는 비록 節次로 나눠져 있으나 그 實은 머무름을 안후에 모두 쉽게 나아갈 수 있다. 몸이 편안한 후에 생각을 할 수 있고 생각을 한 후에 얻을 수 있다는 이것이 가장 나아가기가 어려운 곳이다. 편안한 곳에 이르려 安住해 버리는 일이 많으니, 편안한 후에 생각할 수 있음은 顔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得字 경지에 나아가는 것이 비록 매우 가깝지만 그러나 나아가기 어려운 것이니, 활줄을 당겨 그 줄을 완전히 당긴 이후에도 예상외로(分外) 놓기가 어려운 것이다.

 

勉齋黃氏曰

大學之道在於明德新民 明德新民之功在於至善 至善之理又在於必至而不遷 故此一節但以止爲言 曰知曰得止之兩端 定者知所止之驗 慮者得所止之始 曰靜曰安則原於知而終於得 有必至不遷之意矣

대학의 도는 明德과 新民에 있고 明德과 新民의 공부는 至善(지극한 선)에 있다. 至善의 이치는 또한 반드시 (至善에) 이르려 옮기지 않음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 一節에서는 단지 止로만 말했고, 知와 得이라고 말한 것은 止 의 양쪽 끝이고, 마음을 정하는 것은 머무는 바를 아는 證驗이요, 생각을 한다는 것은 머무름을 얻는 시초이며, 靜과 安이라고 말한 것은 知을 근원으로 해서 得으로 끝을 맺는 것이니, 반드시 (至善에) 이르려 옮기지 않는 뜻이 있다.

 

雙峯饒氏曰

譬之稱 知止是識得稱上星兩 慮是將來稱物時 又仔細看 能得是方稱得輕重的當 定靜安在事未至之前 慮是事方至之際 四者乃知止所以至能得之脈絡

저울에 비유해 보면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저울의 눈금(星兩)을 아는 것이고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저울을 사용할 때 저울눈을 자세히 보는 것이며, 얻는 다는 것은 저울로 물건의 가볍고 무거움을 저울질 하여 측정하는 것이다. 定靜安은 일이 이르러지기 전의 일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일이 바야흐로 이르렀을 때이니, 이 넷은 바로 머물 곳을 알아 얻는데 이르는 이어지는 과정이다.

 

雲峯胡氏曰

定而能靜則事未來而此心之寂然不動者不失 安而能慮則事方來而此心之感而遂通者不差

마음이 정해져 고요할 수 있다면 일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때 이 마음이 고요하여 不動을 잃지 않을 것이고, 편안하여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일이 바야흐로 시작되었을 때 이 마음이 느껴서 마침내 통함(感而遂通)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新安陳氏曰

明德新民 所以得止於至善之由 其緊要處先在知止上 蓋於事事物物 皆知其所當止之理 卽格物而知止也 下文致知知至之知字 已張本於此矣

명덕과 신민에서 至善에 머무름을 얻는 길은, 그 꼭 필요한 곳에 먼저 머무름을 아는 데 있다. 대개 사물마다 그 마땅히 머무는 바의 이치를 모두 아는 것은 바로 格物과 知止이다. 아래 文에 致知와 知至의 知字가 이미 여기에서 그 근본이 드러난 것이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則近道矣

물건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종가 시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천하를 다스리는) 도에 가까울 것이다.

物件 事件으로는 서로 같으나, 지금 여기서는 物은 공간적으로 身 家 國 天下를 가리키고, 사는 시간적으로 修 齊 治 平 등이 해당된다.

明德爲本 新民爲末 知止爲始 能得爲終

本始所先 末終所後 此結上文兩節之意

명덕은 본이 되고 신민은 말이 되며, 지지는 시가 되고 능덕은 종이 되니, 본과 시는 먼저 해야 하는 것이고, 말과 종은 뒤에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윗글 두 절의 뜻을 맺은 것이다.

問事物何分別

묻기를 事와 物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朱子曰

對言則事是事 物是物 獨言物則兼事在其中 知止能得 如耕而種而耘而斂 是事有箇首尾如此 明德是理會己之一物 新民是理會天下之萬物 以己之一物對天下之萬物 便有箇內外本末 知所先後自然近道 不知先後便倒了 如何能近道

상대적으로 말하면 事는 事이고 物은 物이고, 단독으로 말하면, 物이라고 하면 事가 겸해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머무름을 알고 얻을 수 있음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수확을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일에 처음과 끝이 있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明德은 자기에게 있는 하나의 물건을 깨달아 아는 것이고, 新民은 천하의 만물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자기의 한 물건으로 천하의 만물을 상대하는 것은 바로 內外 本末이 있는 것이요, 先과 後에 할 바를 알면 자연적으로 道에 가까워지는 것이고, 先과 後을 알지 못하면 곧 거꾸로 되는 것이니 어찌 道에 가까울 수 있으리오.

 

三山陳氏曰

新民者自明德而推也 己德不明未有能新民者 此明明德所以爲新民之本 能得者原於知止而後致 也 苟始焉不知止於至善 亦未見其卒於有得矣 此知止所以爲能得之始

新民이라는 것은 명덕으로부터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자기의 덕이 不明이면 신민을 할 수 없는 것이니, 明德을 밝히는 이것이 新民의 根本이 되기 이유이다. 얻을 수 있다는 것은 知止을 근원으로 한 이후 이루어 지는 것이니, 만약 처음에 至善에 머무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또한 마지막에 얻음이 있음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머무름을 아는 것이 얻을 수 있음의 시작이 되는 이유이다.

 

玉溪盧氏曰

物有本末結第一節 事有終始結第二節 知所先後則近道矣兩句 再總結兩節

一箇先字起下文六箇 先字 一箇後字起下文七箇後字 不特結上兩節 亦所以起下文兩節之意

物에 本末이 있다는 것은 第一節를 결론지은 것이고, 事에 始終이 있다는 것은 第二節를 결론지은 것이며, 先과 後할 바를 알면 道에 가깝다는 兩句는, 다시 兩節를 총괄하여 결론지은 것이다.

한 개의 先字가 下文에 여섯 개의 先字를 발생하고, 한 개의 後字는 下文에 일곱 개의 後字를 발생하였으니, 단지 위의 兩節를 결론지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下文의 兩節을 발생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仁山金氏曰

不曰此是大學之道而曰近道 盖道者當行之路 知所先後 方是見得在面前而未行於道上 所以只曰近

이것이 大學之道이다 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近道라고 말한 것은, 대개 道라는 것은 마땅히 가는 길이니 先과 後할 바를 아는 것은, 面前에 있는 것(길)을 지금 막 본 것이지 아직 그 길로 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단지 近이라고 말한 것이다.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옛날 천하에 명덕을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자기)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루고, 그 마음을 바루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성실히 하고, (자기)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자신의) 지식()을 지극히 하였으니, 지식()을 지극히 함은 사물에 나아가는데 있다(나아가 사물의 이치 도리를 궁구함에(窮理) 있다).

주자는 격을 물(사물, 도리)에 나아간다. 로 보고 왕수인은 물(다른 사람)을 바로 잡는다 즉 수기치인으로 로 봄.

明明德於天下者 使天下之人 皆有以明其明德也

천하에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그 명덕을 밝힘이 있게 하는 것이다.

新安吳氏曰

由此推之則治國是欲明明德於一國 齊家是欲明明德於一家也

이것으로 인하여 미루어 보면 治國은 一國에 明德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고, 齊家는 一家에 명덕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新安陳氏曰

本當云欲平天下者先治其國 今乃以明明德於天下言之 蓋以明德乃人己所同得

明明德者明己之明德體也 明明德於天下者新天下之民 使之皆明其明德

如此則天下無不平矣用也 一言可以諧 大學之體用 可見明明德又爲綱領中之綱領也

본래 천하를 평하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해야(當) 하는데 지금 이에 천하에 明德을 밝히는 것으로 말한 것은 대개 明德은 더구나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明德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明德을 밝힌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明德을 밝히는 것이니 體이고, 천하에 明德을 밝힌다고 하는 것은 천하의 사람을 새롭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두 그 明德을 밝히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천하가 平되지 않음이 없으니 用이다.

이 한마디 말이(明明德) 대학의 體用에 뜻이 맞을 수 있으니, 明明德은 또한 綱領 中의 綱領임을 알 수 있다.

 

東陽許氏曰

不曰欲平天下先治其國而曰明明德者 是要見新民是明德中事 又見新民不過使人各明其德而已

천하를 平하게 하려면 먼저 治其國 이라고 말하지 않고 明明德이라고 말한 것은 신민이 명덕중의 일임을 알도록 하는 것이며, 또 신민은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덕을 밝히게 하는 데 불과할 뿐임을 나타낸 것이다.

 

心者 身之所主也 誠實也 意者 心之所發也

實其心之所發 欲其必自慊而無自欺也

심은 몸이 주인으로 삼는 것이다. 성은 성실함이고, 의는 마음이 발(움직임)하는 것이니, 그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진실하게 하여 반드시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속임이 없고자 하는 것이다.

嗛 慊은 입속에 마음속에 머금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快 足, 不快 不足이 되는 것이다.

雲峯胡氏曰

中庸言誠身是兼誠意正心修身而言 謂身之所爲者實 此但言誠意是欲心之所發者實 章句所發 二字 凡兩言之 因其所發而遂明之者 性發而爲情也 實其心之所發者 心發而爲意也

중용에는 誠身이라고 말한 것은 誠意正心修身를 겸해서 말한 것인데, 몸이 할 바를 성실이 하는 것을 말한 것이고, 여기서 다만 誠意라고 말한 것은 마음이 發하는 것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章句에 所發을 두 번 말하여 그 發하는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그것을 밝힌 다는 것은, 본성이 드러나면 情이 되는 것이고, 마음을 드러내는 바를 성실히 한다는 것은 마음이 드러나면 意가 되는 것이다.

 

朱子嘗曰

情是發出恁地 意是主張要恁地 情如舟車 意如人使那舟車一般 然則性發爲情 其初無有不善卽 當加夫明之之功 是體統說 心發而爲意 便有善有不善 不可不加夫誠之之功 是從念頭說

주자가 일찍이 왈,

情은 드러내는 것이 이와 같고, 意는 주장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情은 수레나 배와 같은 것이고, 意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수레나 배를 부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했으니, 그렇다면 본성을 드러내면 情이 되니, 그 처음에는 善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바로 그것(명덕)을 밝히는 공부를 더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것은 본체의 계통을 설명한 것이다.

마음을 드러내어 意가 되면 곧 善 不善이 있으므로 성실히 하는 공부를 더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은 생각에 따라 설명한 것이다.

 

新安陳氏曰

諸本皆作 欲其一於善而無自欺也 惟祝氏附錄本 文公適孫鑑書其卷端云 四書元本則以鑑向得 先公晩年絶筆所更定而刊之 興國者爲據此本 獨作必自慊而無自欺 可見絶筆所更定乃改此三 字也

여러 本에는 一於善而無自欺라고 쓰여 있는데, 오직 祝氏의 (四書)附錄本에 文公의 適孫인 鑑이 그 (附錄本)卷端에 기록하여 말하기를 ‘四書 元(元나라)本은 鑑이 지난번에 先公(朱子)이 만년에 붓을 놓을 때 다시 정정한 것을 구하여 간행한 것이다. 興國者(元本)는 이(祝氏附錄本) 本에 근거하여 유일하게 必自慊而無自欺이라고 했으니, 붓을 놓을 때 정정한 것이 바로 이 三字(一於善)를 (必自慊으로)고친 것임을 알 수 있다.

 

按 文公年譜 謂慶元庚申四月辛酉公改誠意章句 甲子公易簀 今觀誠意章則祝本與諸本無一字殊 惟此處有三字異 是所改正在此耳 一於善之云 固亦有味 但必惡惡如惡惡臭 好善如好好色 方自快足於已 如好仁必惡不仁 方爲眞切

내가 文公의 연보를 보니 慶元庚申(1200년)四月辛酉에 公이 誠意章句를 고쳤고 (3일 후)甲子에 公이 돌아가셨다(易簀)고 하였고, 誠意章을 살펴 본 즉 祝本과 다른 本 모두 한 글자도 다른 것이 없으나, 오직 이곳 三字만 다르니, 이는 정정한 것은 여기에 있을 뿐이다. 一於善라고 말한 것도 진실로 또한 의미가 있으나, 오직 악을 싫어하는 것을 악취를 싫어하는 것과 같이하고 善을 좋아하는 것을 호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해야 바야흐로 자기에게 매우 만족 하는 것이니, 仁을 좋아하기를 반드시 不仁을 싫어하는 것 같이 해야 바야흐로 절실하게 되는 것이다.

 

易簀 : 曾參이 그의 병이 위독할 때, 그가 깔고 누운 대자리가 그의 신분에 맞지 않는다 하여 바꾸어 깔고 죽었다는 故事에서, 학덕 높은 사람의 죽음 또는 그의 臨終을 말함

 

若曰一於善包涵不二於惡之意 似是歇後語 語意欠渾成的當 不若必自慊對無自欺 只以傳語釋經語 通快諧備 跌撲不破也 況語錄有云 誠與不誠 自慊與自欺 只爭毫釐之間 自慊則一自欺則二 自慊正與自欺相對 誠意章只在兩箇自字上用功 觀朱子此語則可見矣

만약 一於善이라고 말하면 惡의 뜻에는 포함 되지 않지만, 이것은 뒤 말(無自欺)을 생략하는 것과 비슷하니 말의 의미가 완전하고 적당함에 흠이 있어 必自慊을 無自欺에 상대하는 것 보다는 못하다. 다만 傳語로 經語를 해석함에 이해가 빠르고 잘 갖추어져 있어 아무리 해도 다르게 쓸 수 없다.

하물며 語錄에 말하기를 誠과 不誠, 自慊과 自欺는 단지 털끝사이를 다투나, 自慊하면 一이요 自欺면은 二이며, 自慊은 바로 自欺와 더불어 상대되니, 誠意章은 단지 2개의 自字(自欺와 自慊)의 用 공부에 있다고 했으니, 주자의 이 말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致推極也 知猶識也 推極吾之知識 欲其所知無不盡也

格至也 物猶事也 窮至事物之理 欲其極處無不到也 此八者 大學之條目也

치는 미루어 지극히 하는 것이고, 지는 앎()과 같으니, 나의 지식을 미루어 지극히 하여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고자 하는 것이다. 격은 이름(나아감)이고, 物은 事와 같으니,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그 극처에 이르지 않음이 없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여덟 가지는 대학의 조목이다.

朱子曰

六箇欲與先字 謂欲如此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則便在格物上 欲與先字差慢 在字又緊得些子

欲과 先의 여섯字는 이와 같이 하고자(欲) 한다면 반드시 먼저(先) 이와 같이 해야 됨을 말한 것이니, 이것은 공부의 절차를 말한 것이다. 만약 致知이면 곧 格物에만 있는 것이니 欲과 先字을 쓰면 조금 느슨하고, 在字가 또한 조금 더 긴요하다.

 

○ 致知誠意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善與惡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致知誠意는 배우는 자의 두 개의 관문인데, 致知는 바로 夢과 覺의 관문이고, 誠意는 바로 선과 악의 관문이다. 致知의 관문을 통과하면 覺이요, 그렇지 못하면 夢이다. 誠意의 관문을 통과하면 선이요, 그렇지 못하면 악이다.

 

○ 格物是夢覺關 誠意是人鬼關 過得此二關 上面工夫一節易 如一節了 至治國平天下地步愈闊 但須照顧得到

格物은 夢과 覺의 관문이고, 誠意는 人과 鬼의 관문이다. 이 두 관문을 통과하면, 상면(正心 修身) 공부 일절은 쉽다. 만일 이 한 절을 끝내고 治國平天下에 이르면 경지(地步)가 더 넓어지니, 오직 반드시 비추어보고 되돌아보아야 이르게 될 것이다.

 

○ 格物是零細說 致知是全體說

格物은 작고 세세한 것을 말한 것이고 致知는 전체를 말한 것이다.

 

○ 格物致知於物上窮得一分之理則我之知亦知得一分物理 窮得愈多則我之知愈廣 其實只是一理 纔明彼則曉此

格物致知는 物에 一分의 이치를 궁구하여 알면 나의 앎이 또한 一分의 物理를 알게 되고, 더 많은 것을 궁구하여 알게 되면 나의 앎도 더욱 넓어지니, 그 實은 오직 하나의 이치다. 마침내 저것을 밝히면 이것도 깨닫게 된다.

 

○ 格物十事 格得九事通透 一事未通透不妨 一事只格得九分 一分不通透最不可 須窮盡到十分處

格物에서 열 가지 일에 나아가 아홉 가지 일을 通透(환히 앎)하고 한 가지 일을 通透지 못하는 것은 무방하나, 한 가지 일을 단지 九分만 알고 一分을 모른다면 가장 옳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끝까지 힘을 다하여 十分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 因其所已知 推之至於無所不知

이미 아는 것을 따라 그것을 미루어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 人多把這道理作一箇懸空底物 大學不說窮理 只說格物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如此方見得實體 如作舟行水 作車行陸 今試以衆力共推一舟於陸 必不能行

方見得舟不可以行陸也 此之謂實體

사람들은 저 도리가 하나의 허공에 매달린 물건으로 많이 알고 있다. 대학에서 窮理라고 하지 않고 오직 格物이라고 말하여, 바로 사람들이 사물에 나아가 이해할 것을 요구한 것이니, 이렇게 해야만 바야흐로 실체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배는 물에 가고 수레는 땅에 가는 것을, 지금 시험 삼아 많은 사람이 땅에서 배를 함께 밀어도 반드시 갈 수 없으니, 바야흐로 배는 땅에서는 갈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實體라고 이른다.

 

○ 格物窮理有一物便有一理 窮得到後遇事 觸物皆撞着這道理 事君便遇忠 事親便遇孝 居處便恭 執事便敬 與人便忠 以至參前倚衡 無往而不見這箇道理

若窮不至則所見不眞 外面雖爲善而內實爲惡

格物窮理는 하나의 物이 있으면 곧 하나의 理가 있어, 궁구해서 이른 후에 일을 만나고 물에 접해야 이 도리를 모두 만날 수 있으니, 事君에 곧 忠을 만나고 事親에 곧 孝를 만나고 居處에는 곧 恭하고 執事에는 곧 敬하며 與人에는 곧 忠하여, 앞에 있는 것을 참고하고 옆에 있는 것을 의지하여 가는 곳마다 이 도리를 알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만약 끝까지 하여 이르지 못하면 아는 바가 진실하지 못하니, 겉으로는 비록 善이 되나 內實은 惡이 된다.

 

○ 問物者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何者爲切 曰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皆人所不能無者 但學者須要窮格得盡 事父母則當盡其孝 處兄弟則當盡其友 如此之類 須是要見得盡 若有一毫不盡 便是窮格不至也

物에는 理가 있는데, 사람이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어떤 것이 가장 절실합니까? 라고 물으니, 말하기를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는 모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만 배우는 자는 반드시 끝까지 나아가고 힘을 다하는 것이 요구되니, 부모를 모실 때는 효를 다하고 형제간에는 우애를 다하는 이와 같은 것이 반드시 힘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티끌만큼이라도 다하지 않음이 있으면 곧 이것은 궁구하여 이르는 데 지극하지 못한 것이다.

○ 物謂事物也 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 便有一箇是一箇非 凡自家身心上 皆須體驗得一箇是非 若講論文字應接事物 各各體驗 漸漸推廣 地步自然寬闊 如曾子三省 只管如此體驗去

物은 사물을 말한다. 반드시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밝혀 끝까지 가야 곧 是와 非를 알 수 있으니 무릇 자기의 몸과 마음으로 반드시 하나의 是非를 모두 체험하여 是非를 얻어야 할 것이다. 만약 文字를 講論하고 사물을 응접할 때 하나하나 체험하여 점점 미루어 넓혀 나가면 자기의 위치(地步)가 자연히 넉넉하고 넓어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증자의 三省과 같은 것도 단지 이와 같이 체험을 주관하여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

 

○ 致知格物只是一事 非是今日格物 明日又致知 格物以理言也 致知以心言也

致知格物은 단지 같은 일이지, 오늘 格物하고 내일 또 致知하는 것은 아니다. 格物은 이치로서 말한 것이고, 致知는 心으로 말한 것이다.

 

○ 致知格物是窮此理 誠意正心修身是體此理 齊家治國平天下是推此理 要做三節看

致知格物는 이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고, 誠意正心修身은 이 이치를 체득하는 것이고,

齊家治國平天下는 이 이치를 미루어 나가는 것이니, 三節(窮, 體, 推)로 간주하여 보아야(要看) 할 것이다.

 

○ 於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之際 要常見一箇明德 隱然流行於五者之間 方分明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할 때에, 항상 하나의 明德이 남모르는 가운데 五者之間에 流行하는 것을 보아야(要見) 바야흐로 분명해질 것이다.

 

○ 自格物至平天下 聖人亦是略分箇先後 與人看 不成做一件淨盡無餘 方做一件

如此何時做得成

格物에서 平天下까지는 성인이 또한 先後를 간략하게 나눠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이지, 一件을 淨盡無餘(완벽하게)하여 완성하고 장차(方) 一件을 완성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언제 공부를 이룰 수 있겠는가?

 

○ 明明德於天下以上皆有等級 到致知格物處 便親切 故不曰致知者先格其物 只曰致知在格物也

천하에 명덕을 밝히는 것 그 이상은 모두 (공부하는) 등급이 있다. 致知하고 格物하는 것은 친밀하고 절실하기 때문에, 致知을 함에(欲致其知) 먼저 物에 나아감을(先格其物) 말하지 아니하고 단지 致知在格物이다 라고 말하였다.

 

○ 北溪陳氏曰

心以全體言 意是就全體上 發起一念慮處言 格物必如吾身親至那地頭 見得親切 方是格

心은 전체를 말한 것이고 意는 전체에 대해서(就) 한 생각을 내는 곳을 말한다. 格物은 반드시 내 몸이 직접 저 경지(那地頭)에 이르는 것과 같은 것이니, 친밀하고 절실하게 보고 터득해야 바야흐로 格(이르는 것)인 것이다.

 

玉溪盧氏曰

八者以心爲主 自天下而約之以至於身 無不統於一心 自意而推之以至於萬事萬物 無不管於一 心 曰格曰致曰誠 皆正心上工夫 曰修曰齊曰治曰平皆自正心中流出

팔(조목)은 마음으로 主을 삼는다. 천하로부터 요약하여 몸에 이르기까지 한 마음에 통솔되지 않은 것은 없고, 意로부터 미루어 萬事萬物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주관되지 않은 것은 없으니, 格, 致, 誠은 모두 正心 上의 공부요, 修와 齊, 治, 平은 모두 正心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 雲峯胡氏曰

孟子盡心章集註 ‘心者人之神明 具衆理而應萬事’ 卽章句所謂虛靈不昧以具衆理而應萬事 此章或問又曰 知者心之神明 所以妙衆理而宰萬物 其釋知字與釋明德相應 盡此心本具衆理而妙之則在知 此心能應萬事而宰之亦在知

맹자진심장 集註에 ‘心者는 사람의 神明으로 모든 이치를 갖추어 萬事에 應한다’고 한 것은 바로 (대학)章句에 이른바 (마음은) 虛靈不昧하여 모든 이치를 갖추어 萬事에 應한다는 것이고, 此章의 或問에 또 말하기를 知者는 마음의 신명이라 한 것은 모든 이치를 오묘하게 하고 만물을 주재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知者를 풀이한 것과 明德을 풀이한 것이 서로 응하니, 대개 이러한 마음은 본래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오묘하게 하는 것은 知에 있다. 이러한 마음은 만사를 應할 수는 있지만 주재하는 것은 또한 知에 있다.

 

具者其體之立有以妙之則其用行 應者用之行有以宰之則其體立 明德中自具全體大用 致知云者欲其知之至而全體大用無不明也

具者는 그 體를 세운 것으로 오묘하게 함이 있으면 그 用이 행해지고, 應者는 用을 행하는 것으로 주재함이 있으면 그 體가 세워지는 것이니, 명덕 중에 스스로 완전한 體와 큰 用이 갖추어진 것이다. 致知라고 말하는 것은 그 知가 완전한 체와 큰 用이 밝지 아니함이 없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大學前分事與物言 若事自事物自物 此獨言物 物猶事也 有一事必有一理 理本非空虛無用之物 大學敎人卽事以窮理 亦惟恐人爲空虛無用之學 所以章句釋明德則兼理與事 釋至善亦曰事理 釋格物亦曰窮至事物之理 心外無理 理外無事 卽事以窮理明明德第一工夫也 致知在格物 此在字又與章首三在字相應 大學綱領所在 莫先於在明明德而明明德工夫所在 又莫先於在格物

대학은 앞에서 事와 物을 나눠 말을 하여 事는 事이고 物은 物인 것 같았으나, 여기서는 유독 物만 말하였으니 物과 事는 같은 것이다. 一事가 있으면 반드시 一理가 있으니 理는 본래 공허하고 無用한 物이 아니다. 대학의 敎人에, 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게 한 것은 다만 오직 사람들이 공허하고 무용한 학을 할까봐 염려한 것이다. 때문에 章句에 명덕을 풀이할 때 理와 事을 兼하였다. 至善을 풀이할 때는 事理을 말하였고, 格物을 풀이할 때도 또한 事物의 이치에 끝까지 이른다고 말한 것이다. 心 外는 理가 없고, 理 外는 事가 없으니, 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명덕을 밝히는 第一의 공부다. 致知在格物의 이 在字는 또한 章首의 三在字와 서로 應하니, 대학강령의 在에는 在명명덕의 在보다 앞서는 것은 없고 명명덕의 공부의 在에는 또 在格物의 在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新安陳氏曰

大學八條目 格物爲知之始 致知爲知之極 誠意爲行之始 正心修身爲行之極 齊家爲推行之始 治國平天下爲推行之極 不知則不能行 旣知又不可不行 誠正修行之身也 齊治平行之家國與天 下也 知行者推行之本 推行其知行之驗歟

대학팔조목에서 格物은 아는 것의 시초이고, 致知는 아는 것의 다함이며, 誠意는 행의 시초이고, 정심수신은 행의 지극함이며, 齊家는 미루어 행하는 시초이고, 치국평천하는 미루어 행하는 지극함이니, 알지 못하면 행할 수 없고 이미 알면 또한 행하지 않을 수 없다. 誠, 正, 修는 몸으로 행하는 것이고, 齊, 治, 平은 家, 國, 天下에 행하는 것이니, 알고 행하는 것은 미루어 행하는 근본이이고, 미루어 행하는 것은 알고 행하는 것의 징험이다.

 

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 意誠而后心正

心正而后身修 身修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后天下平

사물의 이치가 이른 뒤에 앎이 지극해지고, 앎이 지극해진 뒤에 뜻이 성실해지고, 뜻이 성실해진 뒤에 마음이 바루어지고, 마음이 바루어진 뒤에 몸이 닦이고, 몸이 닦인 뒤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이 가지런해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평해진다(고르게 된다).

治去聲後倣此

治는 거성이니, 뒤에 있는 것도 이와 같다.

 

物格者 物理之極處 無不到也 知至者 吾心之所知

無不盡也 知旣盡則意可得而實矣 意旣實則心可得而正矣

물격은 물리의 지극한 곳이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고, 지지는 내 마음의 아는 바가 극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앎이 이미 극진해지면 뜻이 성실해질 수 있고, 뜻이 이미 성실해지면 (마음이) 바루어질 수 있다.

勿軒熊氏曰

知字就心之知覺不昧上說 意字是就心之念慮方萌處說

知는 마음이 知覺하고 不昧한 것에 관하여(就) 말한 것이고, 意는 마음이 생각하고 그 생각이 장차 싹터 나오는 곳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雲峰胡氏曰

章句可得二字 蓋謂知此理旣盡然後意可得而實 非謂知已至則不必加誠意之功也 意旣誠則心 之用可得而正 非謂意已誠則不必加正心之功也 然不曰知旣盡然後實其意 意旣實而後正其心 者 蓋知行二字貴於竝進 但略分先後 非必了一節無餘然後又了一節 是當會於言意之表也

章句에 可得 二字는 대개 이 이치를 이미 모두 안 연후에 意를 성실이 할 수 있다는 말이지, 앎이 이미 지극해지면 誠意의 공부가 필요 없다고 한 것은 아니다. 뜻이 이미 성실해 지면 마음의 쓰임을 얻어 바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이지, 意가 이미 성실하면 正心의 공부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앎을 이미 다 한 연후에 意를 誠實히 하고, 意를 이미 誠實히 한 연후에 마음을 바르게 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대개 알고(知) 행하는(行) 것은 竝進(동시 동작)을 강조한 것이며, 단지 선후를 간략하게 나눈 것뿐이지, 반드시 일 절을 완전히 마친 후에 또 일절을 완료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땅히 言意의 드러냄을 알아야 한다.

 

修身以上明明德之事也 齊家以下新民之事也

物格知至則知所止矣 意誠以下則皆得所止之序也

수신 이상은 명명덕의 일이고, 제가 이하는 신민의 일이다. 물격과 지지는 그칠 바를 아는 것이고, 의성이하는 모두 그칠 바를 얻는 차례이다.

新安陳氏曰

意誠心正身修 明明德所以得止至善之次序 家齊國治天下平 新民所以得止至善之次序也 皆之 一字包明明德新民而言 此四句包括此一節也 是二節可見三綱之統八目而八目之隸三綱矣

意誠心正身修은 명명덕이 至善에 머물게 되는 차례이다. 家齊國治天下平는 신민이 至善에 머무는 차례이다. 皆의 一字는 명명덕 신민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니, 이 四句는 이 一節를 包括한 것이다. 이 二節은 三綱領이 八條目을 통솔하고 八條目이 三綱領에 소속됨을 알 수 있다.

 

○ 朱子曰

致知者理在物而推吾之知以知之也 知至者理雖在物而吾心之知已得其極也

致知者 理가 物에 있고 내가 아는 것을 미루어 그 이치를 아는 것이고,

知至者 비록 理가 物에 있지만 내 마음의 앎이 이미 그 지극한 곳을 얻은 것이다.

 

○ 問物未格時 意亦當誠 曰固然 豈可說物未格 意便不用誠 但知未至時 雖欲誠意 其道無由 如人夜行 雖知路從此去 但黑暗行不得 所以要致知 知至則道理明白 坦然行之 今人知未至者 也知道善當好 惡當惡 然臨事不能如此者 只是實未曾見得 若實見得則行處無差

物에 아직 이르기 전이라도 意는 또한 마땅히 성실해야 하는지를 물으니 진실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찌 物에 이르기 전에 뜻을 성실히 안 한다고 말할 수 있겠나. 단지 아는 것이 지극하기 전에는 비록 뜻을 성실히 하려해도 그 길을 알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람이 밤에 길을 갈 때 비록 이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알지만 다만 어두우면 갈 수가 없는 것이니, 致知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아는 것이 지극해지면 道理가 명백해지고 평탄하게 가는 것이다. 지금 아직 앎이 지극하지 못한 사람이 善은 마땅히 좋아하고 惡은 마땅히 싫어하는 것을 알기는 알지만(也地道) 그러나 일에 임했을 때 그렇게 못하는 것은 다만 실제로는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이니, 만약에 실제로 안다면 간 곳이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 問物格知至 曰格物時 方是區處理會 到得知至時 却已自有箇主宰 會去分別取舍 初間 或只見得表不見得裏 只見得組不見得精 到知至時 方知得到 能知得到 方會意誠 可者必爲 不可者快不肯爲 到心正則胸中無些子私蔽 洞然光明正大 截然有主而不亂 此身便脩 家便齊 國便治而天下可平

物格知至를 물으니 왈, 格物을 할 때에는 바야흐로 區處(하나하나 단계별)를 이해하는 것이나, 知至가 되면 이미 스스로 主宰함이 있어 분별하여 취사할 줄 알게 된다. 처음에는 혹 단지 겉만 알고 속은 모르며, 단지 대강만 알고 정밀한 것은 알지 못한다. 知至에 이르면 바야흐로 도달함(到)을 알고 도달함을 알 수 있으면 바야흐로 意誠을 알아, 옳은 것은 반드시 하고 옳지 않은 것은 결단코 즐겨 하지 않을 것이다. 心正에 도달하면 가슴속에 조그마한 사사로운 가림도 없어져서, 막힘이 없어 光明正大해 지며, 분명하게 주관이 있어서 어지럽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곧 身이 脩되고 家가 齊되며, 國이 治되고 천하가 平이 되는 것이다.

 

○ 知至謂天下事物之理知無不到之處 若知一而不知二 知大而不知細 知高遠而不知幽深 皆非知之至也 須要無所不知 乃爲至耳

知至는 천하 사물의 이치에 앎이 이르지 않음이 없는 곳을 말한다니, 만약에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大는 알고 細는 모르고, 高遠은 알고 幽深은 모른다면 모두 知至가 아니다. 모름지기 알지 못하는 바가 없는 것이 되어야 곧 지극함이 되는 것이다.

○ 物格知至是一截事 意誠心正身修是一截事 家齊國治天下平又是一截事 自知至交誠意 又是一箇過接關子 自修身交齊家 又是一箇過接關子

物格知至는 한 단위의 일이고, 意誠心正修身도 한 단위의 일이고, 家齊國治天下平 또한 한 단위의 일이다. 知至로부터 誠意까지의 교차점도 또한 一箇 지나가면서 만나는 관문이고, 修身으로부처 齊家까지 교차점도 또한 한 개의 지나가면서 만나는 관문이다.

 

○ 知至意誠 是凡聖界分 未過此關 雖有小善 猶是黑中之白 已過此關 雖有小過 亦是白中之黑

知至誠意는 凡(일반인)과 聖(성인)의 경계 구분이고, 이 관문을 지나지 못하면, 비록 조금 착한 것이 있어도 黑 가운데 한 흰점이고 이미 이 관문을 지나면 비록 조금의 過가 있어도 白가운데 한 검은 점이다.

 

○ 意誠後 推盪得査滓 伶俐心盡是義理 意是指發處 心是指體 言意是動 心該動靜 身對心言則心正是內能如此 身修是外 若不各自做一節工夫 不成說我意已誠矣 心將自正 恐懼哀樂引將去 又却邪了 不成說心正矣 身不用管外面 更不顧而心與迹有異矣 須是無所不用其功

意誠후에 미루어 찌꺼기를 씻어 없애버리면 영리의 마음이 모두 義理일 것이다. 意는 (마음이) 발하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고, 心은 體를 가리킨다. 意는 動을 말하는 것이고 心은 動靜을 모두 갖추고 있다. 身과 心을 대조해 말해보면 心正은 안에서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고 身修는 밖에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니, 만약 각각 자기의 一節로 공부하지 않으면 내 뜻이 이미 誠實하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心은 장차 스스로 바로게하고자 하나 恐懼哀樂두렵고 무서움과 슬프고 즐거움)이 장차 이끌어 나간다면 또한 도리어 잘못될 수 있으니, 心正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身이 外面을 관장하지 못하면 다시 되돌아보지 않아 마음과 그 행적에 차이가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그 (성실하게 하는) 공부를 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 到正心 時節已好了 只是就好裏面 又有許多偏 如水已淘去濁 十分淸了 又怕於淸裏面 有波浪動盪處

正心에 이르게 되면 때가 이미 좋아지나, 단지 좋은 裏面에 대해서도 또한 많은 치우침이 있으니, 마치 물이 이미 濁한 것을 깨끗이 씻어 十分 깨끗하게 되었지만 또 깨끗한 裏面에 물결이 일어 심하게 흔들리는 곳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 意未誠時 如人犯私罪 意旣誠而心猶動 如人犯公罪 亦有間矣

뜻이 성실하지 않았을 때는 사람이 私罪를 범한 것과 같고, 뜻이 이미 성실해졌는도(猶) 마음이 동하면 사람이 公罪를 범한 것과 같으니 또한 차이가 있다.

 

○ 物格而後知至 至心正而後身修 著而字則是先爲此而後 能爲彼也 蓋卽物而極致其理矣而後 吾之所知無不至 吾知無不至矣而後 見善明察惡盡 不容有所自欺而意誠 意無不誠矣而後念慮隱微 慊快充足而心正 心得其本然之正矣而後 身有所主而可得而脩

物格而後知至부터 心正而後身修까지 而字을 붙이면 먼저 이것을 한 후에 저것을 할 수 있다. 대개 物에 나아가 그 이치를 지극히 이룬 이후에 내가 아는 바가 이르지 않음이 없고, 나의 앎이 이르지 않음이 없는 이후에 善을 밝게 알고 惡을 모 살펴서 스스로 속이는 바가 있음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뜻이 성실해지는 것이다. 뜻이 성실하지 않음이 없는 이후에 걱정이 거의 없게 되고, 유쾌하고 만족하여 마음이 바르게 될 것이고, 마음이 그 본연의 바름을 얻은 이후에 몸이 주장하는 바가 있고 몸이 닦여질 수 있는 것이다.

 

雙峯饒氏曰

上一節 就八目 逆推工夫 後一節 就八目順推功效

上一節(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은 팔조목에 나아가 역으로 미루어 하는 공부이고, 後一節(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은 팔조목에 나아가 順으로 미루어 한 공부의 功과 效果이다.

 

玉溪盧氏曰

物格則理之散在萬物而同出於一原者 無不明矣 知至則理之會在吾心而管乎萬物者無不明矣 此 明明德之端也 意誠則明德之發無不明矣 心正則明德之所存無不明矣 意誠心正而身修 此明明德 之實也 家齊則明德明於一家矣 國治則明德明於一國矣 天下平則明德明於天下矣 齊字有整然 肅然之意 父父子子兄兄弟弟夫夫婦婦 無一不正之謂也 國者家之推 家親而國踈故曰治 天下者 國之推 國小而天下大故曰平 所以齊之治之平之一而已矣

物格이 되면 理는 만물에 산재되어 있고 한 근원에서 같이 나온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知至가 되면 理가 내 마음에 모여 만물을 주관하는 것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은 명덕을 밝히는 단서이다. 意誠이 되면 명덕이 드러남이 확실해 지고 心正이 되면 명덕이 나에게 있음이 확실해 지니, 意誠心正이 되고 身修가 되니 이것은 명덕을 밝히는 實體이다. 家齊가 되면 一家에 명덕이 밝아지는 것이고, 國治가 되면 一國에 명덕이 밝아지는 것이고, 天下平가 되면 천하에 명덕이 밝아지는 것이다. 齊字는 整然 肅然의 뜻이 있으니 父父子子兄兄弟弟夫夫婦婦는 한 사람도 바르지 않음이 없다는 말이다. 國은 家를 미룬 것이나 家는 親하고 國은 踈하니 그러므로 治라고 말한 것이다. 天下는 國을 미룬 것이나 國은 작고 천하는 크므로 平이라고 말한 것이다. 齊하고, 治하고, 平하게 하는 이치는 하나일 뿐이다.

 

物格至身修則明德明而新民之體立 家齊至天下平則民新而明明德之用行 物格知至則知止之事 意誠則意得所止 心正身修則心身得 所止 是明明德得所止之序也 家齊國治天下平則家國天下各得所止 是新民得所止之序也 自物格以至心正 斂之不外乎方寸 自心正以至天下平 充之彌滿乎六合 八者之條目收來放去 惟一心耳

物格에서 身修에 이르면 명덕이 밝아져서 新民의 本體가 세워지고, 家齊에서 天下平에 이르면 民이 새로워져서 명덕을 밝히는 것이 적용되고, 物格知至이면 일의 머묾을 알게 되고, 意誠이면 뜻의 머묾을 얻고, 心正身修이면 마음과 몸의 머묾을 얻게 된다. 이것이 명덕을 밝힘에서 그 머묾을 얻는 순서이다. 家齊 國治 天下平이면 家 國 天下가 각각 그 머물 바를 얻는 것이니, 이것이 民을 새롭게 하는데 그 머물 바의 순서를 얻는 것이다. 物格으로부터 心正에 이르기까지는 그것을 수렴하면 마음의 밖에 두지 않으며, 心正으로부터 天下平까지는 그것을 채우면 온천지에 가득 차니, 팔조목을 거둬들이고(收來) 펼쳐 나가는(放出) 것은 오직 한마음일 뿐이다.

收來 : 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 致知在格物

放去 : 物格以后知至 ~ 國治以后天下平

 

東陽許氏曰

凡言必先而後 固是謂欲如此 必先如此 旣如此了然後如此 然而致知力行 竝行不悖 若曰必格盡天下之物然後 謂之知至 心知無有不明然後 可以誠意則或者終身無可行之日矣

聖賢之意 蓋以一物之格便是吾之心知於此一理爲至 及應此事 便當誠其意 正其心脩其身也 須一條一節逐旋理會 他日揍合 將來遂全其知而足應天下之事矣

무릇 반드시 先과 後를 말한 것은 진실로 이와 같이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이와 같이 해야 됨을 말한 것이며, 이미 이와 같이 다 한 연후에 이와 같이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致知와 力行은 병행해야 어긋나지 않는 것이니, 만약 반드시 천하의 사물에 다 이른 연후에 知至라고 말하고, 마음이 밝지 않음이 없는 연후에 誠意를 할 수 있다면 아무도 평생 실행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이다.

성현의 뜻은 아마 하나의 物에 나가는 것은 곧 내 마음이 이 한 가지 理에 이르게 되는 것을 아는 것이니, 이러한 일에 應하게 되면 곧 마땅히 그 뜻을 성실히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몸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一條 一節를 두루두루 이해하여 他日에 모두 모으면 장래에 마침내 그 앎이 온전하게 되고 천하의 일에 응할 수 있을 것이다.

 

自天子 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일체(한결같이)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

壹是 一切也

일시는 일체(칼로 가지런히 자른 것)이다.

漢書平帝紀 一切顔師古註云 猶以刀切物 取其齊整

漢書平帝紀에 一切는 顔師古의 註에 칼로 物을 자르는 것과 같으니, 가지런하게 정리가 된 것을 취한 것이라고 했다.

 

正心以上 皆所以修身也 齊家以下則擧此而措之耳

정심이상은 모두 수신하는 것(방법)이고, 제가이하는 이것을 들어 둘 뿐이다.

勉齋黃氏曰

天子庶人貴賤不同 然均之爲人則不可以不修身 誠意正心所以修身 治國平天下亦自齊家而推之

천자 서인이 귀천은 같지 않지만 모두 사람이라면 수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誠意正心은 수신을 하는 것이요, 治國平天下는 齊家로부터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雙峯饒氏曰

此一段是於八者之中揭出一箇總要處 蓋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是皆當以修身爲本 前兩段是詳說之 此一段是反說約也

이 一段은 팔조목 중에서 一箇의 가장 중요한 것을 들어 나타낸 것이니, 대개 천하의 근본은 國에 있고, 國의 근본은 家에 있고, 家의 근본은 身에 있으니, 이 모든 것은 마땅히 身修로서 근본을 삼아야 한다. 앞의 두 단락은(古之欲 明明德---.와 物格以后知至--.) 팔조목을 상세히 설명한 것이고, 이 一段은 돌이켜서 요약하여 설명한 것이다.

 

新安陳氏曰

此字指修身 言天子諸侯卿大夫士庶人一切皆以修身爲本而齊家以下之效不期而必至矣 單提修身而上包正心誠意致知格物之工夫 下包齊家治國平天下之效驗 皆在其中矣

此字(擧此而操之耳)는 수신을 가리키는 것이고, 天子諸侯卿大夫士庶人 일체 모두가 修身으로 근본을 삼으며, 齊家 이하 효험은 기대하지 않아도 반드시 이르게 됨을 말한 것이다. 단순히 修身만 제시하고 위로는 正心誠意致知格物의 공부를 포함하고 아래로는 齊家治國平天下의 효험을 포함하니 모두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未之有也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지엽이 다스려지는 자는 없으며, 후하게 할 것에 박하게 하고서 박하게 할 것에 후하게 하는 자는 아직 있지 않다.

本謂身也

본은 몸을 이르고,

接上文本字 末謂天下國家

위 文의 本字를 이은 것이고, 末은 天下와 國家를 말한다.

所厚 謂家也

후하게 할 것은 집안을 이른다.

三山陳氏曰 國天下本非所薄 自家視之則爲薄也

國과 天下는 본래 薄한 바가 아니나 家로부터 본다면 薄한 것이다.

 

新安陳氏曰 以家與國天下分厚薄

家와 國과 天下를 厚와 薄으로 나눈 것이다.

 

此兩節 結上文兩節之意

이 두 절은 윗글 두 절의 듯을 맺은 것이다.

雙奉饒氏曰

上一節與此節上一句 是敎人以修身爲要 下句是敎人以齊家爲要

위의 一節과 이 節의 上一句는 사람으로 하여금 修身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였고, 下句는 사람으로 하여금 齊家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였다.

 

周子曰

治天下有本 身之謂也 治天下有則家之謂也 得此意矣

천하를 다스리는 것에 근본이 있으니 身을 말한 것이고, 천하를 다스림에 법칙이 있다면 家을 말한다. 라고 말한 것은, 여기의 뜻을 터득한 것이다.

 

雲峯胡氏曰

以朱子之言推之 經一章中綱領第一節三句說工夫 第二節五句說功效 條目第一節六箇先字 是逆推功夫 第二節七箇后字 是順推功效 至此兩節前節則於工夫中拈出修身正結 後節則於功效中拈出身與家反結也

주자의 말로 미루어 본다면 經一章中 綱領 第一節 三句(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는 공부를 말한 것이고 第二節 五句(知止而后有定 定而后有能靜---) 공부한 功과 效를 말한 것이다. 條目 第一節 六箇先字(古之欲明明德---)는 工夫의 순서를 逆으로 미룬 것이고 第二節 七箇后字(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는 공부한 功과 效를 順으로 미룬 것이다. 여기의 兩節에 이르러 前節(自天子以至於庶人壹是--)은 곧 工夫 중에 수신을 집어 낸 것이니 바로 결론지은 것이고, 後節(其本亂而末治者--)은 곧 공부한 功과 效중에 身과 家를 집어 낸 것이니 반대로 결론지은 것이다.

 

新安陳氏曰

此兩節結八目 前於家言齊 正倫理也 此於家言所厚 篤恩義也 亦如書所謂惇叙九族 叙卽齊之意 惇卽厚之意歟

이 兩節은 八條目를 결론지은 것이다. 먼저 家에 齊를 말하여 倫理를 바르게 함이고, 여기에서 家를 厚하게 할 것을 말한 것은 恩義를 돈독히 한 것이니, 또한 서경에 이른바 惇叙九族(집안사람과 돈독하게 지내고 차례가 있어야 한다.)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叙는 齊의 의미이고 惇는 厚의 의미이다.

 

右經一章 蓋孔子之言而曾子述之 其傳十章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

이상은 경 1장이니, 공자가 말한 것을 증자가 전술하였고,  10장은 증자의 뜻을 문인이 기록한 것이다.

蓋字疑辭 則字決辭

蓋字는 '아마도'의 疑辭이고, 則字는 확실한 말이다.

 

舊本 頗有錯簡 今因程子所定而更考經文 別爲序次如左

凡傳文 雜引經傳 若無統紀 然文理接續 血脈貫通 深淺始終至爲精密

熟讀詳味久當見之 今不盡釋也

모든 전문은 경전을 섞어(두루) 인용하여 통기(조리)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문리가 이어지고 혈맥이 관통하여 깊고 얕음과 시와 종이 지극히 정밀하니, 익숙히 읽고 자세히 음미하면 오래됨에 마땅히 알 수 있을 것이므로 이제 다 해석하지 않는다.

新安陳氏曰

傳十章朱子有不盡釋處 然其不可不知者 未嘗不釋也 學者於其所釋者 熟讀精思則其不盡釋者自當得之矣

傳十章에 주자가 모두 해석하지 않은 것이 있지만, 몰라서는 안 되는 것은 해석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학자는 그 해석한 것을 熟讀하고 정밀하게 생각한다면 그 해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팔조목 끝

[출처] 八條目|작성자 주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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