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 工夫

第 1-2章 明明德 新民

bindol 2022. 5. 28. 05:33

一章

康誥曰 克明德

당고에 왈, 능히 덕을 밝힌다 하였다.

康誥周書 克能也 (惟乃丕顯考文王 克明德愼罪)

당고는 주서이다. 극은 능(잘함, 能書, 能筆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다.

(자신의 덕은 잘 밝히고 벌은 신중하게 한다.)

서경의 四大之書 : 虞書(요순이 포함) 夏書 商書 周書

朱子曰

此克字雖訓能 然比能字有力 見人皆有是明德而不能明 惟文王能明之 克只是眞箇會底意

이 克字는 비록 뜻은 能이나 能字에 비해 有力하다. 사람 모두가 이 명덕이 있으나 (그 명덕을) 밝히지 못하였는데, 오직 문왕이 능히 그 명덕을 밝혔다. 克은 단지 진실로 會의 뜻이다.

 

○ 西山眞氏曰

要切處在克之一字

제일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克의 一字에 있다.

 

○ 新安陳氏曰

康誥本文云克明德愼罰 此只取上三字 下文引太甲顧諟天之明命亦去先王字 皆引經之活法

당고 본문은 克明德愼罰(명덕은 능히 밝히고 罪는 삼가라)인데, 여기에는 단지 위의 三字만 취했고 하문 太甲顧諟天之明命의 인용에도 또한 先王 字를 제거 했으니 모두 경전을 활용하는 방법(斷章取義)인 것이다.

 

○ 東陽許氏曰

康誥者周武王封第康叔於衛而告之之書 克明德言文王之能明其德也 引之解明德 克字有力 明字卽上明者 德字包明德字

당고는 주나라 무왕이 동생인 강숙을 위나라 제후로 봉할 때 그에게 충고한 글이다. 克明德은 문왕이 능히 그 덕을 밝힘을 말한 것이다. 그것을 인용하여 명덕을 풀이한 것이다. 克字는 有力하니 明字 바로 위에 있는 明字 ‘밝히다’ 이다. 德字은 明德字를 포함하고 있다.

 

太甲曰 顧諟天之明命

태갑 왈, 이 하늘의 밝은 명령을 돌아본다 하였다.

하늘의 明命은 즉 天命()을 사람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明德(하늘이 준 것을 받는 것)이 된다.

=德 德也者 得也 得之於心, 덕은 얻는 것이다. 마음에 그것을(도리를) 터득하는 것이다.

大讀作泰 諟古是字

大는 泰로 읽고 諟는 엣날의 是이다.

 

太甲商書 顧謂常目在之也

태갑은 상서이다. 고는 항상() 눈이 거기에 있음(, 살핌)을 이른다.

常以目在之也 상은 눈으로 그것을 살피는(在 눈을 둠) 것이다.

朱子曰

常目在之古註語極好 如一物在此惟恐人偸去兩眼常常觀在此相似

常目在之는 古註인데 말이 지극히 좋다. 예를 들면 물건이 하나 여기 있는데, 사람이 오직 훔쳐 갈까봐 염려하여 두 눈을 항상 여기에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諟猶此也

시는 차와 같으니,

從古是字之說

옛 是字로 설명한 것이다.

 

或曰審也

혹 왈, 살피는 것이라고 한다.

廣韻註也 今不從

諟를 審(살핀다)으로 풀이하는 것은 광운의 주인데 지금은 따르지 않는다.

 

天之明命 卽天之所以與我而我之所以爲德者 常目在之則無時不明矣

하늘의 명명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주어서 내가 덕으로 삼은 것이니, 항상 눈이 여기에 있으면 때마다 밝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無時不明은 無不明之時의 도치

朱子曰

上下文都說明德 這裏却說明命 蓋天之所以與我便是明命 我所得以爲性者便是明德 命與德皆以明言 是這箇物本自光明 我自昏蔽了他

상하 문에는 모두 명덕이라 말하고 여기서는 다시 명명이라고 말한 것은 대개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은 곧 명명이고, 내가 부여 받아 본성으로 삼는 것은 곧 명덕이다. 命과 德을 모두 明으로써 말한 것은 저 물건(본성)이 본래 저절로 광명한데 내가 스스로 그것을(他) 어둡게 하고 (사욕에) 가린 것이다.

○ 顧諟者只是長存此心 知得有這道理 光明不昧 方其未接物 此理固湛然淸明 及其遇事應接 此理亦隨處發見 只要常提撕 省察 念念不忘 存養久之則道理愈明 雖欲忘之而不可得矣

顧諟라는 것은 오직 늘 이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다. 이 도리가(명덕) 있어 (그것이) 광명하고 불매한 것임을 안다면 지금 그것이 物에 접하지 않았을 때는 此理(명덕)는 맑고 청명하며 그것이 일을 만나 응접하게 되면 此理는 또한 처리에 따라 나타나니, 오직 항상 (명덕을)이끌어 내어 살펴야만 한다.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말고 存養하여 (명덕을) 오래 간직한다면 道理가 더욱 밝아지며 비록 그것을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 只是見得道理 長在目前 不被事物遮障了 不成是有一物可見其形象

가진 道理를 늘 목전에 두고 사물에 가려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하나의 물건으로 그 형상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雙峯饒氏曰

靜存動察 皆是顧 其靜也聽於無聲 視於無形 戒謹不睹 恐懼不聞 其動也卽物觀理 隨事度宜 於事親見其嘗孝 於事兄見其當弟 此之謂常目在之

靜일 때는 存하고 動일 때는 察하는 것 모두 顧이다. 靜일 때 無聲을 듣고 無形을 보고 不睹에 경계하고 근신하며 不聞에 몹시 두려워하며, 動일 때 物에 나아가 理를 觀察하고 일에 따라 마땅함을 헤아리는 것이다. 부모를 모실 때는 마땅히 효도를 드러내 보이고, 형을 섬길 때는 마땅히 공경을 보이는 것 이러한 것을 常目在之라 한다.

 

○ 玉溪盧氏曰

天之明命卽明德之本原 自我之得乎天者言曰明德 自天之與我者言曰明命 名雖異而理則一 日用動靜語默之間 孰非明德之發見 亦孰非明命之流行 日用動靜語默之間孰非顧諟明命之所 亦孰非明明德之所

天之明命는 바로 明德의 本原이며 내가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것은 명덕이라 하고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을 明命이라 하니,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이치는 같다. 일상생활에서 어디엔들 明德이 드러나지 아니 하며, 어디엔들 明命이 행해지지 아니 하겠는가. 일상생활에서 어디엔들 明命을 살피지 아니하며, 어디엔들 명덕을 밝히지 아니하겠는가.

 

○ 新案吳氏曰

言德則命在其中 故釋明德曰人之所得乎天 言命則德在其中 故釋明命曰天之所以與我而我之所以爲德

덕을 말하면 명은 그 가운데 있으니, 그러므로 명덕을 설명할 때 ‘사람이 하늘에서 부여 받은 것이다.’라고 했고, 명을 말하면 덕은 그 가운데 있으니, 그러므로 명명을 설명할 때 ‘하늘이 나에게 부여하여 내가 덕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 新安陳氏曰

傳引康誥帝典之克明 皆釋上一明字 乃明之之明而明德之本體則未嘗說被 惟以顧諟天之明命言之蓋明命卽明德之本原 顧諟卽明之之工夫也 貫天命己德而一之 或問謂天未始不爲人 人未始不爲天 可謂精矣 子思言天命之謂性 其亦祖述此意也歟

傳에 인용한 康誥나 帝典의 克明은 모두上의 一明字를 풀이한 것이다. 곧 밝게 한다는 明之의 明이고 명덕의 본체는 아직 설명되지 안했다. 오직 하늘의 明命을 살핀다. 는 것만 말했으니, 아마 明命은 바로 명덕의 본원이고 顧諟는 바로 그것을 밝히는 공부이다. 天命과 자기 德을 꿰뚫어 하나로 만든 것이다. 或問에 하늘은 애초 사람됨이 아님이 없고 사람은 애초 하늘 됨이 아님이 없다고 했는데 매우 정밀한 말이다. 자사가 천명은 성이라고 말했으니 그 또한 이 의미를 祖述(先代의 說을 根本으로 하여 그 뜻을 펴 敍述함)한 것이라고 본다.

 

○ 東陽許氏曰

顧諟動靜皆顧 一息之頃 一事之毫末 放過便不是顧 天之明命雖是就付與我處言 然此明命卽是萬物之理在裏面 故於應事處 才有照管不到便損了此明命

顧諟는 動일 때나 靜일 때나 항상 살핌이니, 순간이라도 조그마한 일이라도 방과하면 곧 顧가 아니다. 하늘의 明命은 비록 나에게 부여한 관점에 나아가 말한 것이나 이 明命은 곧 만물의 理가 이 안에 있으니, 그러므로 일에 응하는 곳에 조금이라도 비추어보고 주관해보고 하는 것에 이르지 못함이 있으면 곧 이 明命이 훼손될 것이다.

 

帝典曰 克明峻德

제전에 왈, 능히 큰 덕을 밝힌다 하였다.

帝典堯典虞書 峻大也

제전은 요전이니 우서이다. 준은 큼이다.

子는 공자를 칭한다면 帝는 堯을 칭함

新安陳氏曰

明德以此德本體之明言 峻德以此德全體之大言 一也 德之全體 本無限量 克明之 是盡己之性 通寬明徹 無有不明處而全體皆明也

明德은 이 德全體의 밝음으로 말했고 峻德은 이 德全體의 큰 것으로 말한 것이니 같은 것이다. 덕의 전체는 본래 양이 무한하고 그것을 능히 밝힌다면 자기의 본성을 다하여 通寬明徹하여 밝지 않은 곳이 없고 전체가 모두 밝은 것이다.

 

皆自明也

모두 스스로 밝힌 것이다.

結所引書 皆言 自明己德之意

인용한 바의 글이 모두 스스로 자신의 덕을 밝히는 뜻을 말했음을 맺은 것이다.

雙峯饒氏曰

引三書先後不倫 取其辭意 不以人代之先後拘 後凡引詩書 皆當以此例之

서경에서 셋을 인용함에 선후의 순서가 맞지 않는데 그 말의 뜻을 취한 것이다. 사람의 시대 선후에 매이지 않음은 뒤에 대체로 詩書의 引用이 모두 이 사례와 같다.

 

○ 玉溪盧氏曰

自明是爲仁 由己而由人乎哉之意 明者是自明 昏亦是自昏 玩一自字 使人警省 要而言之 克明德是自明之始事 克明峻德是自明之終事 顧諟明命之句在中間 是自明工夫 此章雜引三書而斷以一言 其文理血脈之精密如此

自明은 仁을 행하는 것이니 자기로 말미암지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겠는가의 의미이다. 明도 自明이고 昏 또한 自昏이니 自字를 잘 생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하고 살피도록 해야 한다. 요약하여 말한다면 克明德은 自明의 始事요 克明峻德은 自明의 終事이다. 顧諟明命의 句가 중간에 있는 것 이것은 自明의 공부다. 이 章은 서경에서 셋을 다양하게 인용하여 한 마디로 단언한 것이니 그 문리 혈맥이 상세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 東陽許氏曰

第一節平說明明德 第二節是明之之功 學者全當法此而用功 第三節言明其德 以至於大 此明明德之極功 皆自明也雖結上文 自字有力 明德須是自去明之方可

第一節은 明明德을 평이하게 설명을 했고 第二節은 (명덕을) 밝게 하는 功效이니 學者는 마땅히 온전하게 이것을 본받아 공부를 해야 한다. 第三節은 그 명덕을 밝게 하여 크게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明明德의 지극한 공효인 것이다. 皆自明은 비록 上文을 결론지은 것이지만 自字가 有力하니 明德은 반드시 스스로 밝혀 나가야 바야흐로 可한 것이다.

 

○ 臨川吳氏曰

此章康誥 言文王之獨能明其明德 以明人當求所以克明其德 發明明德之端也 太甲昇上文 言欲求所以克明其德者 必常目在乎天所以與我之明德 示明明德之方也 帝典承上文 言能常目在夫天所以與我之明德而明之則是能如堯之克明其大德矣 著明明德之效也而又結之 曰此皆自明之事也 蓋自明者 所以自新 使民皆有以明其明德者 所以新民 然欲使民皆有以明其明德而新民 必先有以自明而自新 故以自明二字結上文明德之傳而起下章盤銘自新之意也

此章은 康誥에 文王이 홀로 능히 자기의 명덕을 밝힌 것을 말하여, 사람들이 마땅히 자기의 덕을 능히 밝게 밝히기를 명료하게 보인 것이니, 명덕의 단서를 나타낸 것이고, 太甲은 上文을 이어 克明其德에서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명덕을 반드시 늘 살피게 하여 명덕을 밝게 하는 방법을 보여준 것이다. 帝典은 上文을 이어 능히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명덕을 항상 살펴 밝게 하면 능히 堯의 克明其大德이 됨을 말한 것이니 明明德의 功效를 나타낸 것이고 또 그것을 결론지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自明의 일이다. 고 했다. 아마 自明은 自新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자기의 명덕을 밝게 함이 있어 新民이 되나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자기의 명덕을 밝게 하여 新民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自明과 自新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自明의 두 글자는 上文 明德의 傳를 결론지었고 下章의 盤銘自新의 뜻을 일으켰다

 

右傳之首章 釋明明德

이상은 전문의 수장이니, 명명덕을 해석하였다.

此通下三章至止於信 舊本誤在沒世不忘之下

이장은 모두 아래 3장의 지어신까지 구본에 잘못되어 몰세불망의 아래에 있었다.

1장 끝


二章

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의 반명(목욕통에 새긴 글)에 왈, 만약 새롭게 하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하였다.

盤沐浴之盤

반은 목욕하는 그릇이고,

新定邵氏曰

日日盥頮人所同也 日日沐浴恐未必然 內則篇記子事父母 不過五日燂湯請浴

三日具沐而已 斯銘也其殆刻之盥頮之盤歟

매일 세수함은 사람들 모두 같다. 매일 목욕하는 것은 아마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내칙편에는 자식이 부모를 모실 적에 5일에 물을 데워서 浴을 청하고 3일에 沐(머리 감음)을 구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새겨졌다는 것은 아마도 세숫대야에 새긴 것일 것이다.

 

○ 雲峯胡氏曰

沐浴之盤 本孔註 邵說雖無關於日新大旨 然於盤字 或有小補云

목욕통이라고 한 것은 본래 孔氏(공영달)의 註인데 邵氏의 설은 일신의 큰 뜻에는 무관하나 盤字(새숫대야일 것이다)에는 조금 인정(도움)이 된다.

 

銘名其器以自警之辭也 苟誠也

명은 그 그릇에 글을 새겨() 스스로 경계하는 말이다. 구는 진실로 이다.

論語苟志於仁苟亦訓誠

논어에 ‘진실로(苟) 인에 뜻을 두다.’의 진실로 (苟)도 역시 뜻이 진실로 (誠)이다.

 

湯以人之洗濯其心以去惡 如沐浴其身以去垢

故 銘其盤言 誠能一日 有以滌其舊染之汚而自新則當因其已新者而日日新之

又日新之 不可略有間斷也

탕왕은 사람이 그의 마음을 씻어서 악을 제거하는 것은 마치 그의 몸을 씻어서 때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 그릇에 명한 것이다. 진실로 능히 하루에 그 옛날에 물든 것을 씻어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다면 마땅히 이미 새로워진 것을 인하여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여 조금이라도() 간단함이 있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新은 새롭게 되는 것 溫故而知新의 新도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새롭게 할 줄을 안다. 아는 것이 아니고 수양의 의미,

問盤銘見於何書

‘盤銘이라는 말이 어느 책에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朱子曰

只見於大學 緊要在一苟字 首句是爲學入頭處 誠能日新則下兩句工夫方能接續做去 今學者却 不去苟字上著工夫

오직 대학에만 있다. 꼭 필요한 것은 苟字에 있다. 首句(湯之盤銘)는 공부의 입문이니 진실로 능히 날로 새로워져야만 下兩句(康誥曰, 詩曰) 공부를 두루 접속하여 능히 계속 공부해 나아가는데, 요즈음 학자는 도리어 苟字에 나아가 밀착하여 공부를 하지 않는다.

 

○ 苟日新新是對舊染之汚而言日日新又日新之是要常常如此 無間斷也

苟日新의 新은 오래전부터 베어든 나쁜 것에 상대되는 것이고, 日日新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한다는 것은 항상 이와 같이하여 틈이 없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 西山眞氏曰

身有垢皆知沐浴以去之 心者神明之舍乃甘爲私欲所汚是以形體爲重心性爲輕也 豈不謬哉

몸에 때가 있으면 목욕을 하여 그것을 씻는 것을 모두 알면서, 마음은 神明의 집인데 이에 즐겨 사욕으로 더러운 바가 되면 이것은 형체(몸)는 중하게 여기고 마음은 가벼이 여기는 것이니 어찌 잘못이 아닌가?

 

○ 雙峯饒氏曰

所新雖在民作而新之之機實在我 故自新爲新民之本 我之自新有息則彼之作新亦息矣 所以釋新 民 先言自新相關之機 皆如此

새롭게 하는 것은 비록 백성을 그렇게 하는데 있으나 새롭게 하는 기틀은 진실로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근본이요, 내가 새롭게 하는 것에 쉼이 있으면 백성 또한 새롭게 하는 것이 그치게 된다. 신민의 해석은 먼저 자신이 새로워져야 함을 말하니 서로 관계의 기틀이 모두 이와 같다.

 

○ 雲峯胡氏曰

盤銘三句 苟字是志意誠確於其始 又字是工夫接續於其終

盤銘三句에 苟字는 의지가 처음에 진실로 확실한 것이고, 又字는 공부를 끝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 新安陳氏曰

德日新之蘊自仲虺發之湯采之爲此銘 伊尹又本之以告太甲曰惟新厥德終始惟一時乃日新 說者謂 孟子所言萊朱卽仲虺與斯道之傳者也 明明德爲體新民爲用體用元不相離 故於平天下以明明德於天下爲言由體而達於用 同一明也 於新民之端以日新又新爲言因用而原其體 同一新也 移明已德之明字以言明民德 又移新民之新字以言新已德 體用之不相離可見矣

덕을 새롭게 한다는 근거(蘊)는 중회로부터 나와 탕임금이 그것을 채택하여 이 銘을 만들었고, 이윤이 또 그 말을 근본으로 하여 태갑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오직 그 덕을 새롭게 하여 始終 한결 같이해야 늘 이에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다. 혹자(說者)는 말하기를 맹자가 말한 바는 래주 즉 중회가 유가의 도를 전하는데 간여했다는 것이다. 明明德은 體가 되고 新民은 用이니 體用은 원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平天下에 있어서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힘을 말로 삼았으니 본체에 의거하여 적용을 하니 동일한 明이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단서에는 날로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는 것을 말로 삼았으니 적용의 인함은 그 본체를 근원으로 하니 동일한 新이다. 자기의 덕을 밝게 한다는 明字를 옮겨 백성의 덕을 밝게 한다고 말하고,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新字를 옮겨 자기의 덕을 새롭게 한다고 말했으니 體用이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볼 수 있다.

 

康誥曰 作新民

당고에 왈,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새로워지는) 백성을 진작시켜라.

鼓之舞之之謂作 言振起其自新之民也

북을 쳐서 장단에 맞게 춤추게 하는 것을 作이라 이르니, 스스로 새로워지는 백성을 진작시켜 일으켜 세움을 말한 것이다.

논어 擧善而敎不能則勸의 勸이 권면으로 스스로 힘쓰게 하는 것 자발적 참여이다.

朱子曰

鼓之舞之如擊鼓然 自然能使人跳舞踊躍 上之人之於民 時時提撕警發之則下之觀瞻 感化各自 有以興起同然之善心而不能自已耳

鼓之舞之는 북을 치는 것 같이 하여 저절로 사람들로 하여금 춤추고 좋아서 뛰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백성에게 늘 잘 이끌어 조심히 드러내게 하면 밑에 있는 사람은 우러러 보고 감화되어 각자 스스로 흥기하여 착함 마음을 함께 함이 있어 스스로 그만 둘 수 없을 뿐이다.

 

○ 陳氏曰

自新之民 已能改過遷善 又從而鼓舞振作之 使之亹亹不能自已 是作其自新之民也 此正新民用功夫處

스스로 새로워지는 백성이 이미 능히 改過遷善하여 더욱 나아가 鼓舞振作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계속 힘써 스스로 그만두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백성을 진작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새로워지는 백성이 행하는 공부다.

 

○ 雲峯胡氏曰

前言顧諟 是時時提撕警覺其在我者 此所謂作 是時時提撕警覺其在民者也

앞에서 顧諟라 한 것은 늘 (백성을)인도하여 나에게 있는 것을 잘 타일러 깨닫도록 하는 것이고, 여기서 作이라 한 것은 늘 (백성을)인도하여 백성에게 있는 것을 잘 타일러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 新安倪氏曰

易繫辭云鼓之舞之以盡神 摘此四字 以釋作字 振起之卽孟子稱堯勞來匡直輔翼 使自得之 又從而振德之之意

역의 계사전에 鼓之舞之하여 마음을 다한다. 하니, 이 4자를 가져왔어 作字를 풀이 하였다. 振起는 바로 맹자가 칭하는 堯임금의 勞之 來之 匡之 直之 輔之 翼之 등으로 스스로 체득하여 더욱 나아가 덕을 진작시키는 뜻이다.

 

○ 東陽許氏曰

第二節章句 以新民爲自新之民 蓋民心皆有此善 才善心發見使是自新之機 因其欲新而鼓舞之 作字是前新字意

第二節 章句에 新民을 自新之民이라고 했으니 아마 백성의 마음에는 모두 이 善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善心이 보이면 이것으로 하여금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기틀이 된다. 그 새로워지려는 마음을 말미암아 鼓之舞之하는 것이니, 作字는 앞의 新字의 의미이다.

 

詩曰 周雖舊邦 其命維新

시경에 왈, 주나라가 비록 옛 나라이지만 그 명이 새롭다 하였다.

詩大雅文王之篇 言周國雖舊 至於文王 能新其德以及於民而始受天命也

시는 대아 문왕편이다. 주나라가 비록 옛 나라이지만 문왕에 이르러 능히 그 덕을 새롭게 하여 백성에게까지 미쳐서 비로소 천명을 받았음을 말한 것이다.

文王在上 於昭于天 周雖舊邦 其命維新 有周不顯 帝命不時 文王陟降 在帝左右

문왕이 위에 계시어, 오! 하늘에 밝게 계시니, 비록 舊邦이나 그 명은 새롭도다.

크게 밝지 않겠는가, 명이 때에 맞지 않겠는가. 문왕이 오르내리심이 상제 옆에 계시도다.

文王在上 하사 於昭于天 하시니 周雖舊邦 이나 其命維新 이로다.

有周不顯 가 帝命不時 인가 文王陟降 이 在帝左右 시니라.

 

賦也 於歎辭 昭明也 命天命也 不顯猶言豈不顯也 上帝也

不時猶言豈不時也 左右旁側也

周公追述文王之德 明周家 所以受命而代商者皆由於此 以戒成王

부이다. 오는 감탄사요, 소는 밝음이다. 명은 천명이다. 불현은 豈不顯과 같은 말이다. 제는 상제이다. 불시는 豈不時와 같은 말이다. 좌우는 곁이다. 주공이 문왕의 덕을 추술하여 주나라 왕실에서 천명을 받아 상나라를 대신한 것이 모두 이에서 말미암았음을 밝혀서 성왕을 경계한 것이다.

此章言文王旣沒而其神在上 昭明于天 是以 周邦雖自后稷始封千有餘年而其受天命則自今始也

차장은 문왕이 이미 별세하였으나 그 신이 위에 있어 하늘에 밝게 계시니, 이 때문에 주나라가 비록 후직이 봉해짐으로부터 천여 년이 지났으나, 천명을 받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시작됨을 말한 것이다.

文王在上而昭于天則其德顯矣 周雖舊邦而命則新則其命時矣 故又曰 有周豈不顯乎 帝命豈不時乎

天一升一降無時不在上帝之左右 是以 子孫夢其福澤而君有天下也

문왕이 위에 계시어 하늘에 밝게 계시면 그 덕이 드러나고, 주나라가 비록 舊邦이나 명인즉 새롭다면 그 명이 이때에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또 말하기를 주나라가 어찌 드러나지 않겠는가. 상제의 명이 어찌 이때에 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문왕의 신이 하늘에 계시어 한번 오르고 한 번 내림에 상제의 좌우에 있지 않을 때가 없었다. 이 때문에 자손들이 그 복택을 입어서 군주가 천하를 소유한 것이다.

始字貼新字

始字는 新字에 가깝다(貼).

 

○ 朱子曰

是新民之極 和天命也新

이것은 新民의 極이다. 天命에 和한다는 것은 新이다.

 

○ 北溪陳氏曰

三節有次第 盤銘言新民之本 康誥言新民之事 文王詩言新民成效之極

三節은 순서가 있으니 반명은 신민의 근본을 말한 것이고 당고는 신민의 일을 말한 것이고 문왕의 시는 신민의 증험이 지극한 것이다.

 

○ 雙峯饒氏曰

明命是初頭稟受底 以理言 命新是末梢膺受底 以位言 要之只是一箇 天下無性外之物

밝은 命은 처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을 이치로 말한 것이고 명이 새롭다는 것은 마지막에 받은 것이니 地位로 말한 것이다. 요약하면 오직 하나일 뿐이니 천하에 性外의 物은 없다.

 

○ 東陽許氏曰

第三節言文王明明德而及於民 政敎日新 初受天命

제 三節은 문왕이 명덕을 밝게 하여 백성에게 이르고 政敎가 날로 새로워져 처음으로 天命을 받음을 말한 것이다.

 

是故 君子 無所不用其極

이러므로 군자는 그 극(至善)을 쓰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다.

自新 新民 皆欲止於至善也

일신과 신민을 모두 지선에 머물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朱子曰

明明德 便要如湯之日新新民 便要如文王之周雖舊邦其命維新 各求止於至善之地而後已也

明明德은 곧 탕의 日新新民과 같이 해야 함을 요구하고 문왕의 周雖舊邦其命維新과 같이 해야 함을 요구하니, 至善之地에 머무름을 구한 후에야 그치는 것이다.

○ 玉溪盧氏曰

前言止至善 此言用其極 二義互相發 止則不紛紛擾擾矣 用則非槁木死灰矣

前言의 止至善과 此言의 用其極은 둘 다 그 뜻이 서로 發하는 것이니, 머무른다면 분란(紛紛擾擾)함이 없고, (其極을) 쓰게 되면 죽은 사회(槁木死灰)가 안 되는 것이다.

○ 雲峯胡氏曰

上章釋明明德 故此章之首曰 日新又新 所以承上章之意 下章釋止於至善 故此章之末曰 無所不用其極 又所以開下章之端 文理接續血脈貫通 此亦可見

上章에 明明德을 풀이했기 때문에 此章의 첫 머리에는 日新又新라고 말했으니 上章의 뜻을 이은 것이고, 下章에 止於至善을 풀이했기 때문에 此章의 말미에는 其極를 쓰지 않음이 없다고 한 것이니 또한 下章의 단서를 제시한 것이다. 文理가 接續하고 血脈이 貫通함이 여기에서 또한 볼 수 있다.

○ 臨川吳氏曰

此章盤銘 承上章言自明者所以自新而欲新民者 必先自新是發新民之端也 康誥承上文言自新 旣至則可推以作興自新之民 示新民之方也 文王詩承上文言旣能自新而推以新民則民德皆新而天 命亦新 著新民之效也

此章의 盤銘은 上章을 이어서 自明者는 스스로 새로워졌으나 백성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이 새로워져야 하며 이것이 백성을 새롭게 하는 단서를 보이는 것이다. 康誥는 上文을 이어 自新이 이미 이르렀으면 미루어 백성이 스스로 새롭게 하는 것을 진작시키는 것을 말한 것이니 新民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文王의 詩는 上文에 이어 이미 능히 自新하여 新民에 미룬 다면 民德이 모두 새로워지고 하늘의 명 또한 새롭게 되어 新民의 효과를 보인 것이다.

盤銘言自新 康誥言新民 文王詩自新新民之極也 極則至善之云也 用其極者求其止於是之謂也 故以用其極 結上文自新新民之義而起下章所止之說也

盤銘는 自新를 말한 것이고 康誥는 新民을 말한 것이며, 文王의 詩는 自新과 新民의 지극함이니, 지극함이 곧 至善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극함을 쓰는 자는 이것(至善)에 머무르는 것을 구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用其極으로 上文의 自新과 新民의 뜻을 결론짓고 下文의 머무르는 바의 說을 제기한 것이다.

 

右傳之二章 釋新民

이상은 전의 2장이니, 신민을 해석하였다.

東陽許氏曰

此章釋新民而章內五新字皆非新民之新 盤銘以自新言 康誥以民之自新言 詩以天命之新言 然新民之意 却只於中可見

此章은 新民을 풀이 했으나 章內 五新字는 모두 新民의 新字가 아니다. 盤銘은 自新으로 말했고 康誥은 民之自新으로 말했으며 詩에는 天命之新으로 말했으니, 新民의 뜻은 도리어 다만 그 가운데서만 볼 수 있다.

1~ 2 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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