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 工夫

第 6章 誠意

bindol 2022. 5. 28. 05:46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 必愼其獨也

 

이른바 자기의 뜻을 성실히 하는 자는 스스로 속이지 않으니, 마치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미워하는 것 같이 하며(惡惡如惡惡臭), 호색을 좋아하는 것 같이 하여야 하니, 이것을 자겸(스스로 만족함)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

논어 賢賢易色의 해석, 어진 사람을 어진 사람으로 존경하는데 호색하는 마음과 바꾼다(易好色之心.). 또는 易色=而色=如色 으로 여색과 같이 존경한다. 같은 의미.

==慊 만족과 불만족의 뜻이 있음

好惡上字 皆去聲 謙讀爲慊 苦劫反

好惡위의 자는 모두 거성이고, 謙은 慊으로 읽으니 고와 겁의 반절음()이다.

 

誠其意者 自修之首也

자기 뜻을 성실히 하는 것은 자수(스스로 자신을 수양)의 첫 번째(시작)이다.

雙峯饒氏曰

心之正不正 身修不修 只判於意之誠不誠 所以中庸孟子只說誠身 便貫了誠意正心修身 此章雖 專釋誠意而所以正心修身之要實在於此 故下二章第言心不正身不修之病而不言所以治病之方 以已具於此章故也

마음의 正 不正과 몸의 修 不修는 단지 뜻의 誠 不誠으로 판단하니 중용 맹자에 다만 誠身을 말한 것은 곧 誠意 正心 修身을 요약한 것이다. 차장은 비록 誠意만 풀이했지만 正心 修身의 요점이 실제로 여기(誠意)에 있다. 그러므로 아래 두 장에 차례로 마음의 不正과 몸의 不修의 병을 말하고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말하지 않은 것은 이미 이 장에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 雲峯胡氏曰

大學條目有八只 作六傳 格物致知二者實是一事 故統作一傳 自正心以下五者 工夫次第相接 故統作四傳 唯誠意獨作一傳 然誠意者自修之首 已兼正心修身而言矣 章末曰潤身曰心廣提出 身與心二字 意已可見

대학조목이 8가지이나 다만 六傳으로 한 것은, 格物致知 二者는 실제로 一事이다. 그러므로 一傳으로 통합을 하였고 正心부터 이하 五者는 공부 순서가 서로 접속이 되므로 四傳으로 통합하였으며 오직 誠意만 一傳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誠意는 自修의 첫째이니 이미 正心과 修身을 겸해서 말한 것이다. 章末에 曰潤身曰心廣라고 하여 身과 心 二字를 제시하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 新安陳氏曰

前章云 如琢如磨者自修也 誠意正心修身皆自修之事而誠意居其始 故曰自修之首

前章에 如琢如磨는 自修라고 했고, 誠意正心修身 모두 自修之事이며 誠意가 첫째이니 그러므로 自修의 첫째라고 말한 것이다.

 

毋者禁止之辭 自欺云者知爲善以去惡

무는 금지하는 말이다. 자기는 선을 하고 악을 제거해야 함을 알지만

無不毋勿은 각각 그 뜻이 있지만 통용해서 쓰이는 경우가 있음.

此知字帶從上章致知之知字來

이 知字는 上章에 연대해서 致知의 知字에서 온 것이다.

 

而心之所發有未實也

마음의 발하는 바가 아직 성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雲峯胡氏曰 毋自欺三字 釋誠意二字 自字與意字相應 欺字與誠字相反

毋自欺의 三字는 誠意二字을 풀이한 것인데 自字와 意字는 서로 應하고 欺字와 誠字는 서로 反한다.

○ 新安陳氏曰 自期自謾也

○ 東陽許氏曰 誠意是致知以後事 故章句曰知爲善以去惡而心之所發有未實也

誠意는 致知以後事이니 그러므로 章句에 善을 행하여 악을 제거할 줄을 알지만 心之所發에 아직 성실하지 못함이 있다. 있다.라고 말하였다.

 

謙快也足也

겸은 쾌함이니 만족함이다.

朱子曰 誠意章在兩箇自字 上用功

誠意章에는 두 개의 自字가 있는데 매우 중요하다.

新安陳氏曰 謙字與愜字同音同義 爲快字說不盡 又添足字 快而且足 方是自謙

謙字와 愜字는 同音同義이나 快字만으로는 설명이 부진하고 또 足字을 더하여 快하고 또 足이니 바야흐로 自謙인 것이다.

 

獨者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

독은 남은 알지 못하고 자신만이 홀로 아는 곳이다.

新安陳氏曰 地卽處也 此獨字指心所獨知而言 非指身所獨居而言

地는 바로 處이다. 이 獨字는 마음이 홀로 아는 바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 몸이 홀로 있는 바를 가리켜 말한 것은 아니다.

 

言欲自修者 知爲善以去其惡則當實用其力而禁止其自欺

使其惡惡則如惡惡臭 好善則如好好色

皆務決去而求必得之 以自快足於己 不可徒苟且以徇外而爲人也

스스로 닦고자 하는 자가 선을 하고 악을 제거해야 함은 알았으면 마땅히 실제로 그 힘을 써서 스스로 속이는 것을 금지하여, 가령(하여금) 악을 미워함에는 악취를 미워하는 것과 같이하고, 선을 좋아함에는 호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여, 모두 힘써 결단하여 버리고 구함에 반드시 얻어서 스스로 자신에게 만족하게 할 것이고, 한갓 구차히 외면을 따라 남을 위해서는(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不求自愜便是爲人

스스로 만족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남을 위하는 것이다.

 

然其實與不實 蓋有他人所不及知而己獨知之者

故必謹(愼之)於此 以審其幾焉

그러나 그 성실하고 성실하지 못함은 남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자기만이 홀로 아는 데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것을 삼가 그 기미를 살펴야 함을 말한 것이다.

新安陳氏曰

周子云 幾善惡己所獨知 乃念頭初萌動 善惡誠僞所由分之幾微處 必審察於此 以實爲善去惡 如別岐途之始分處 起脚不差 行方能由乎正路 否則起脚處一差 差毫釐而繆千里矣

幾는 자기만이 善惡을 아는 것이니 이에 처음 싹이 생길 때를 염두에 두고, 善 惡 誠 僞 등이 나누어지게 되는 幾微處인, 이것을 반드시 審察해야 진실로 선을 행하여 악을 물리칠 수 있으니, 갈림길에서 처음 나누어지는 곳을 분별하는 것과 같다. 처음 출발에 어긋나지 않아야 행동의 방향이 능히 올바른 길에 말미암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출발점이 조금 어긋나면 티끌만큼의 어긋남이 결국 천리나 어긋난다.

 

○ 朱子曰

幾者動之微 是欲動不動之間 便有善惡 便須就這處理會 若到發出處 更怎生奈何得

幾는 움직임의 미세한 것이므로 동과 부동의 사이이니 곧 선과 악이 있다. 반드시 이 곳(기미)에 나아가 이해해야 한다. 만약에 드러난 데 이르면 다시는 어떻게(怎生) 무엇을 얻을 수 있으리오.

 

○ 問知至了 如何到誠意又說毋自欺 曰 到這裏方可著手下工夫 不是知至了下面許多一齊掃去 下面節節有工夫在

앎에 지극한데 어찌하여 성의에 이르러 또 自欺하지 말라고 말합니까? 하고 물으니 曰, 이 속(격물치지)에 이르면 바야흐로 (격물치지) 이하 공부를 착수해야 하는 것이지, 알았다고 해서 이하의 허다한 모든 것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격물치지) 이하의 해야 할 절절한 공부가 있는 것이다.

 

○ 譬如一塊物外面是銀 裏面是鐵便是自欺 須表裏如一 方是不自欺 須是見得分曉 如知烏喙不可食 水火不可蹈則自不食不蹈 如寒欲衣饑欲食則自是不能已 人果見善如饑欲食寒欲衣 見惡如 烏喙不可食水火不可蹈則此意自是實矣

비유하건데 한 덩어리의 물건이, 외면에는 은이고 속은 철이면 곧 이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모름지기 표리가 한결같아야 바야흐로 이것이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이다. 반드시 체득하여 확실히 알게 되면, 예를 들면 부자(烏喙)는 먹지 못하는 것이며, 水火는 밟을 수 없는 것임을 안다면 자연이 먹지도 밟지도 아니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추우면 옷을 입으려 하고 배고프면 먹으려 한다면 자연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과연 見善을 배고프면 먹으려 하고 추우면 옷을 입으려 하는 것과 같이 하며, 見惡을 부자는 먹을 수 없고 수화는 밟을 수 없는 것과 같이 한다면 이러한 마음은 스스로 성실한 것이다.

烏喙藥名食之能殺人 烏喙는 약의 이름이며 먹으면 능히 사람을 죽인다.

 

○ 自欺是半知半不知底人 知道善我所當爲 却又不十分去爲善 知道惡不可爲 却又自家舍他不得 這便是自欺 不知不識之喚做不知不識 不喚做自欺

自欺는 半知 半不知의 사람이다. 선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바임을 알고 있으나 도리어 또한 십분 선을 하는 데 나아가지 아니한다든가, 악은 행해서 안 되는 것임을 알고 있으나 도리어 또한 스스로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는 곧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不知不識을 不知不識이라고 말해야지 自欺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新安陳氏曰 以上語以知爲重 見得物格知至 爲意誠之根基也

이상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物格知至가 意誠의 기초가 됨을 알 수 있다.

 

○ 纔說不自欺則其好善惡惡只要求以自快自足 如寒而思衣以自溫 饑而思食以自飽 非有牽强苟且姑以爲人之意也

곧 不自欺를 설명한다면 그 好善惡惡을 단지 自快自足을 찾아서, 추우면 옷을 입어 스스로 보온을 생각하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어 스스로 배부름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억지로 구차하게 우선 남을 위하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 如鑄私錢做 官會 此是大故無壯小人 豈自欺之謂耶 此處工夫極細 未便說到粗處 前後學者說差了 緣賺連下文小人閒居一節着了 所以差也

예를 들면 사사로이 돈을 주소해서 관에서 한 것처럼 하는 이러한 것은 대단히 無壯한 소인이니, 어찌 自欺라고 말할 수 있으랴. 여기(誠意章)에서는 공부를 세밀히 하여 조잡한 설명은 안 되는데, 前後學者들이 잘못 설명하는 것은 다음 문장의 小人閒居一節에 이어 보는 것 때문에 잘못한 것이다.

 

○ 如有九分義理 雜了一分私意 便是自欺 到得厭然掩著之時 又其甚者

만약 九分 義理라도 一分 私意가 섞이면 곧 自欺이니, 모른척하고 숨기고 드러내는 기회를 노린다면 또한 自欺가 심한 것이다.

 

○ 十分爲善有一分不好底意潛發於其間 便有邪徑 以長這箇 却是實全面善意 却是虛矣

十分 선을 행하는데, 그 사이에 一分 不好의 뜻이 숨어서 드러난다면, 바로 잘못됨에 연유되는 것이니, 그것이 자라나면 진실로 전체가 善意일지라도 도리어 이것은 헛되는 것이다.

 

○ 凡惡惡之不眞 爲善之不勇 外然而中實不然 或有爲而爲之或始勤而終怠 皆不實而自欺之患也

무릇 악을 미워하는 것이 진실하지 못하고 선을 행하는 용기가 없으면, 겉은 선을 행하는 것 같지만 마음은 진실로 그렇지 아니하여, 혹 하고자 하여 하드라도 혹 처음에는 힘을 쓰나 끝내 나태하여 모두 진실 되지 못하고 스스로 속이는 병이 되는 것이다.

○ 論自欺細處 且如爲善自家也知得是當爲也勉强去做 只是心裏又有些便不消如此做 也不妨底意思 如爲不善也知得不當爲而不爲 心中也又有些便爲 也不妨底意思 便是自欺 便是虛僞不實矣

自欺에 대해서 자세히 논해 본다면, 우선 선을 행하기를 스스로 마땅히 행하여 힘써 나아가야 함을 알지만 그러나 이 마음속에는 또한 조금은 곧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쇠하여 (자기의) 의사에 방해받지 아니하고, 불선을 행하기를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하며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지만 마음속에 또한 조금 곧 행함에 의사에 방해받지 아니하면 이것은 곧 自欺이며, 곧 허위이고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 自謙如孟子行有不慊於心 相類 亦微不同 孟子訓滿足意多 大學訓快意多 問 自謙只是眞實爲善去惡 無牽滯於己私 只是快底意 方始心下滿足 曰是

자겁은 맹자에 행동이 마음에 만족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과 서로 (같은) 류이나, 또한 조금은 같지 않다. 맹자는 만족의 의미가 많고, 대학에서는 흔쾌의 의미가 많다. 자겁은 오직 진실로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여 자기의 사사로움에 끌려 엉기게 함이 없도록 하여 오직 흔쾌한 마음으로 바야흐로 비로소 마음속에 만족하는 것입니까? 질문하니 曰 그러하다.

 

○ 自謙是合下好惡時 便是要自謙了 非謂做得善了 方能自謙 自謙正與自欺相對 所謂誠其意 便是要毋自欺 非是誠其意了 方能不自欺也 自謙者外面如此 中心也是如此 表裏一般 自欺者外面如此 中心其實有些子不願 只此便是二心 誠僞之所由分也

자겁은 바로(合下)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에(즉시에) 곧 스스로 겁(만족하고 흔쾌함)을 요구하는 것이지, 선을 행한 후에(결과) 바야흐로 자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겁은 정과 자기와 상대가 되니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곧 毋自欺를 요구하는 것이지, 뜻을 성실히 한 후에 바야흐로 不自欺不自欺 하는 것은 아니다. 자겁이라는 것은 모습이 이와 같고 마음속이 이와 같아 표리가 똑같은 것이고, 自欺라는 것은 모습은 이와 같으나 마음속은 실제로 조금 원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니, 오직 이것이 곧 두 마음이요, 진실과 거짓이 나누어지게 되는 바이다.

 

○ 謹獨則於善惡之幾 察之愈精愈密

근독은 선악의 기미 살피기를 더욱 精하고 더욱 密密 하게 하는 것이다.

 

○ 如與衆人對坐 自心中發一念 或正或不正 此亦是獨處

만약에 중인들과 더불어 앉아 있을 때에, 마음속으로부터 생기는 한 생각이 혹 정 혹 부정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또한 독처이다.

 

○ 北溪陳氏曰

誠者自表而裏眞實如一之謂 自欺誠之反也 大抵此章在自慊而無自欺 首言如好好色惡惡臭 是 就人情分曉處譬之 好色人所同好 好則求必得之 惡臭人所同惡 惡則求必去之而後快足吾意 意所快足處是自家表裏眞實恁地 非苟且徒爲此也

성이라는 것은 표리가 진실로 한결같은 것을 말하고, 自欺는 성실하고자 하는 것과 반대가 된다. 무릇 此章은 자겁과 무자기에 있는 것이니, 처음에 好好色惡惡臭와 같이 말한 이것은 사람의 감정에 나아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처지를 비유한 것이다. 호색은 사람들이 다 함께 좋아하고 악취는 사람들이 다 함께 싫어하니, 좋아하면 반드시 그것을 구할 것이고, 싫어하면 반드시 그것을 제거한 후에야 마음이 快足하며, 마음이 快足한 처지가 되는 바는 자기 스스로 표리가 진실하면 (자연이)(자연이) 이와 같이 되는 것이지, 구차하게 한갓 이렇게 (억지로)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人之好善惡惡亦須表裏眞實如此 自求快足 方是誠意 如稍有不眞實 胸次間便自覺有欠缺處 如何會快足 此便是自欺 果能自表而裏 斷斷然眞實恁地 始快足吾意 此便是自謙 便是誠 然自謙自欺皆自家心裏事 非他人所知而己獨知 所以君子貴 就那獨處便謹 審其幾之發也

사람들이 好善惡惡 함은 또한 틀림없이 표리가 진실함이 이와 같으니. 스스로 快足快足 함을 구해야 바야흐로 誠意가 된다. 만약 조금이라도 진실하지 못함이 있으면 가슴속에 곧 欠缺한 점이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데, 어찌 快足 함을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이 곧 自欺이다. 과연 겉으로부터 속까지 확실하게 진실하여 이와 같이 된다면 비로소 내 마음이 快足 함이니. 이것이 곧 自謙이고 곧 誠이다. 그러나 自謙自欺은 모두 자기 마음의 일이지, 타인이 알 바가 아니고 자기 혼자 아는 것이므로 군자는 獨處에 나아가 곧 謹愼 하고 기미의 싹을 살피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徽庵程氏曰 愼不但訓謹 有審之意焉

愼은 단지 謹(조심)뿐만 아니라 審(살핌)의 뜻도 있다.

 

○ 問毋自欺 還是須從戒謹恐懼上 做起 抑戒謹恐懼卽是毋自欺 境界

毋自欺는 모름지기 戒謹恐懼上으로부터 생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戒謹恐懼가 바로 毋自欺의 경계입니까?라고 물으니

潛室陳氏曰

戒謹恐懼與謹獨是兩項地頭 戒謹恐懼是自家不睹不聞之時 存誠養性氣象如此 謹獨是衆人不聞不睹之際 存誠工夫如此 中庸兼已發未發說 故動息皆有養 大學只就意之所發說 故只防他罅漏處

戒謹恐懼와 謹獨은 두 개의 분야이니, 戒謹恐懼는 스스로 보지도 듣지도 않을 때에 存誠養性의 氣象이 이와 같은 것이고, 謹獨은 衆人이 듣지도 보지도 않을 때에 存誠의 공부가 이와 같은 것이니, 중용에는 已發未發說을 아우르고 있다. 그러므로 動息에 모두 기름이 있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단지 마음이 생기는 데 나아가 설명을 하니, 그러므로 다만 그 마음이 새 나가는 곳을 막는 것이다.

 

雙峯饒氏曰

此章用功之要 在謹獨上 凡人於顯然處致謹 其意未必果出於誠 若能於獨處致謹 方是誠意

此章 공부의 요점은 謹獨上에 있다. 무릇 사람들이 드러난 곳에서는 조심하려 노력하지만 그 마음에는 반드시 과연 誠意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만약 獨處에서 능히 조심하려 노력한다면 바야흐로 이것이 誠意이다.

 

○ 雲峯胡氏曰

君子小人所以分 只在自欺與自慊上 兩自字與自修之自相應 自欺者誠之反 自修者不可如此 自 慊者誠之充 自修者必欲如此 獨字便是自字便是意字 所以中庸論誠首尾言愼獨 此章論誠意亦 兩言愼獨

군자와 소인이 나누어지는 바는 다만 自欺와 自謙에 있다. 두 개의 自字는 自修의 自字와 더불어 相應한다. 自欺라는 것은 성실하려는 것과 반대인데, 自修는 이와 같이 할 수 없다. 自謙은 성실하려는 마음을 채우는 것이니, 自修는 반드시 이와 같이 하고자 한다. 獨은 곧 自이고 곧 意이다. 중용에서 성을 논함에 首尾에 愼獨 말하고 있는데, 此章에서는 성의를 논함에 또한 두 번이나 신독을 말하고 있다.

 

○ 東陽許氏曰

誠意只是著實爲善著實去惡 自欺是誠意之反 毋自欺是誠意工夫 二如是誠意之實 自慊是自欺 之反而誠意之效 愼獨是誠意地頭

誠意는 단지 착실히 선을 하고 착실히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自欺는 誠意의 반대이고, 毋自欺는 誠意의 공부이니, 두 개의 如는 誠意의 실제이다. 自謙은 自欺의 반대이고, 誠意의 효험이니, 愼獨이 誠意의 분야이다.

 

○ 欺謙皆言自 是意之誠不誠皆自爲之 自欺者適害己 不自謙者徒爲人

欺謙에 모두 自을 말하는데, 이 뜻의 성과 불성은 모두 스스로가 하는 것이니, 自欺는 자신을 해치는 길이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갓 남을 위하는(남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 惡惡臭好好色人人皆實有此心 非僞也 二如字曉學者當實爲善去惡 若惡惡臭好好色之爲也

惡臭와 好色은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으니 거짓이 아니다. 두 개의 如字는 학자는 마땅히 진실로 爲善去惡하기를 惡臭와 好色하는 것같이 하도록 깨우쳐 준다.

 

小人閒居 爲不善無所不至 見君子而后 厭然揜其不善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然則何益矣 此謂 誠於中形於外 故君子必愼其獨也

 

소인은 한가로이 거처할 때에 불선한 짓을 하되 이르지 못하는바가 없다가 군자를 본 뒤에 겸연쩍게 그 불선함을 가리고 선함을 드러내나니, 남들이 자기를 보기를 마치 자신의 폐간을 보듯이 할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유익함이 되겠는가? 이것을 일러 마음속에 성실하면 외면에 나타난다. 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

閒音閑 厭鄭氏讀爲黶於簡反

閒의 음은 한이고, 厭은 鄭氏에 의하면 읽을 때는 黶으로 어와 간의 반자 안이다.

 

閒居獨處也

한거는 홀로 거처하는 것이다.

新安陳氏曰 獨處是身所獨居與上文己所獨知獨不同

獨處는 몸이 혼자 있는 바이고 상문의 자기의 獨知의 獨과는 같지 않다.

 

厭然消沮閉藏之貌

암연은 소저(기가 꺾여 위축됨)하여 은폐하고 감추는 모양이다.

雙峯饒氏曰 黶字有黑暗遮閉之意

黶은 깜깜하여 꽉 막힌 뜻이다.

 

新安陳氏曰 四字形容小人見君子羞愧遮障之情狀

消沮閉藏의 4字는 소인이 군자를 보고 부끄러워 가로막는 情狀을 형용한 것이다.

 

此言小人 陰爲不善而陽欲揜之

이는 소인이 몰래 불선을 하고 겉으로 이것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니,

閒居爲陰 君子爲陽

한거(남이 보지 않은 곳)는 음이 되고 군자(남이 보는 곳)는 양이 된다.

 

則是非不知善之當爲與惡之當去也

그렇다면 선을 마땅히 해야 함과 악을 마땅히 제거해야 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非不知乃其秉彝之天 不可泯沒者

비부지는 곧 떳떳한 천륜이니, 절대로 없앨 수 없는 것이다.

 

但不能實用其力以至此耳 然欲揜其惡而卒不可揜

欲詐爲善而卒不可詐則亦何益之有哉 此君子所以重以爲戒而必謹其獨也

다만 실제로 그 힘을 쓰지 못하여 이에 이를 뿐이다. 그러나 그 악을 가리고자 해도 끝내 가리지 못하고 거짓으로 선을 하고자 해도 끝내 속일 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또한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이는 군자가 거듭 경계로 삼아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는 까닭을 말한 것이다.

朱子曰

小人閒居爲不善是誠心爲不善也 揜其不善而著其善是爲善不誠也 爲惡於隱微之中而詐善於顯 明之地 將虛假之善來 蓋眞實之惡 自欺以欺人也 然人豈可欺哉

閒居爲不善便是惡惡不如惡惡臭 揜不善著其善便是好善不如好好色

君子小人之分却在誠其意處 誠於爲善便是君子 不誠底便是小人

소인한거위불선은 진실로 마음이 불선하기 때문이고, 엄기불선이저기선은 선을 행함이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미한 가운데 악을 행하고 남이 보는 앞에서 거짓으로 선을 하는 것은 헛되고 가짜인 선을 가지고 왔어 진실로 행한 악을 덮으려고 하는 것이니, 자기를 속이는 것으로 남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남을 속일 수 있겠는가. 한거위불선은 곧 악을 싫어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는 것보다 더 못하고, 엄불선저기선은 곧 선을 좋아하기를 호색을 좋아하는 것 보다 더 못하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뜻을 성실히 하는데 있으니, 선을 행함에 성실하면 곧 군자이고 불성실하면 곧 소인이다.

 

○ 雙峯饒氏曰

閑居爲不善自欺也 厭然則不自慊矣 揜其不善而著其善是又欺人也 自欺與欺人常相因 始焉自欺終焉必至於欺人 此謂誠於中形於外 此誠字是兼善惡說

한거위불선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숨기는 것은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엄기불선이저기선은 또한 남을 속이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은 항상 서로 말미암는 것이니 처음에는 자기를 속이고 나중에는 반드시 남을 속이는데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성어중형어외라고 이른다. 이 誠字는 선악을 겸하여 말하고 있다.

 

○ 厭然與心廣體胖爲對 厭然是小人爲惡之驗 心廣體胖是君子爲善之驗

숨기는 것과 심광체반은 상대가 되니, 숨기는 것은 소인이 악을 행한 증험이고 신광체반은 군자가 선을 행한 증험이다.

 

○ 雲峯胡氏曰

前章未分君子小人 此章分別君子小人甚嚴 蓋誠意爲善惡關 過得此關方是君子 過不得此關猶 是小人 傳末章長國家而務財用之小人卽此閒居爲不善之小人也 意有不誠 已害自家心術 他日 用之爲天下國家害也必矣

前章에는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此章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매우 엄하게 구분하였으니, 대개 성의가 선악의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 관문을 통과하면 바야흐로 군자이고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대로 소인이다. 傳의 末章(마지막 장)에 나라에 어른(군주)이 되어 재물을 쓰는 소인의 일에 힘을 쓰면 곧 이것이 한거위불선의 소인이다. 뜻에 성실하지 못함이 있으면 이미 자기의 마음에 해가 되니 후일에 그 마음을 쓰면 천하 국가의 해가 됨이 틀림이 없다.

 

○ 玉溪盧氏曰 兩言愼獨 讀上節固當直下承當 讀此節尤當痛自警省

신독을 두 번이나 말했는데, 위의 節을 읽으면 진실로 마땅히 바로 아래를 잇는 것이 마땅하고 이 節을 읽으면 더욱 마땅히 통절히 (자기 행동에 대하여) 스스로 깨쳐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 新安陳氏曰

上一節毋自欺說得細密乃自君子隱然心術之微處言之 此一節言小人之欺人說得粗乃自小人顯然 詐僞之著者言之 無上一節毋自欺而必自謙之工夫則爲惡詐善之流弊其極必將至此 所以君子必 先自愼其獨 至此又重以小人爲戒而尤必愼其獨

위의 一節에서 무자기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였으니 이에 군자 스스로 마음속의 은미한 곳을 말한 것이고, 이 一節에서는 소인이 남을 속이는 설명을 간단하게 하여 이에 소인 스스로 분명한 속임과 거짓의 드러냄을 말한 것이다. 위의 一節에서 무자기와 반드시 自謙의 공부가 없다면 악을 행하고 선을 속이는 나쁜 풍속이 그 극이 반듯이 이 지경에 이르는 것이니, 군자는 반드시 먼저 스스로 신독을 하는 것이며, 이 지경에 이르면 더욱 거듭 소인은 경계로 삼게 하고 더욱더 반드시 신독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증자 왈, 열 눈이 보는 바이며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니, 그 무섭구나!

引此以明上文之意 言雖幽獨之中而其善惡之不可揜如此 可畏之甚也

이것을 인용하여 윗글의 뜻을 밝힌 것이다. 비록 유독(조용하게 홀로 있음)의 가운데라도 그 선악의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두려울 만함이 심함을 말한 것이다.

朱子曰

此是承上文 人之視己如見其肺肝之意 不可說人不知 人曉然共知如此 人雖不知我已自知 自 是甚可皇恐了 其與十目十手所視所指何異哉

이것은 상문을 이어,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것을 내 양심을 보는 뜻과 같으니,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훤히 모두 알고 있음이 이와 같으니 사람들이 비록 모르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는 이미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니, 스스로 심히 두렵고 무서워할 만한 것이다. 그것이 어찌 열 눈과 열 손이 보고 가리키는 것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 玉溪盧氏曰

實理無隱顯之間 人所不知 己所獨知之地 卽十目十手共視共指之地 故爲善於獨者不求人知而人 自知之 爲不善於獨者 惟恐人知而人必知之 其可畏之甚如此 曾子所以戰兢臨履 直至啓手足而 後已者此也

진실한 이치는 모르거나 알거나 하는 사이가 없다. 사람들이 모르거나 자기만이 홀로 알거나 하는 경지라 하더라도, 곧 열 눈 열 손이 모두 보고 모두 가리키는 경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홀로 선을 행함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아니 하나 그러나 사람들이 저절로 그것을 알며, 홀로 불선을 행함을 오직 사람들이 알 것을 두려워하나 그러나 사람들이 반드시 그것을 알게 되니, 그 두려워함의 심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증자가 戰戰兢兢하고 如臨深淵 如履薄氷하여 바로 수족을 보여 줌에 이른 후에 그만 둠이 이것이다.

 

○ 雲峯胡氏曰

中庸所謂莫見乎隱莫顯乎微 蓋本諸此 上文獨字便是隱微 此所謂十目十手 卽是莫見莫顯

중용에서 莫見乎隱莫顯乎微이라고 말한 것은 대개 여기에 根本을 둔 것이다. 上文의 獨字가 곧 이 隱微이고, 열 눈 열 손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莫見莫顯이다.

 

○ 新安陳氏曰

幽獨之中 勿謂無視之無指之者 當常如十目所共視 十手所共指 可畏之甚釋其嚴乎

조용하게 홀로 있을 때에는 보는 이가 없고 가리키는 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곧 항상 열 눈이 모두 보고, 열 손이 모두 가리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주자의) 可畏之甚은 (증자의) 其嚴乎을 풀이한 것이다.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하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퍼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자신의 뜻을 성실히 하는 것이다.

胖安舒也 言富則能潤屋矣 德則能潤身矣

반은 편안하고 퍼짐이다. 부하면 집을 윤택하게 할 수 있고 덕이 있으면 몸을 윤택하게 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三山陳氏曰 財積於中則屋潤於外 德積於中則身潤於外矣 潤猶華澤也

재물이 많으면 집이 윤택해지고 덕이 쌓이면 몸이 윤택해진다. 윤은 호화롭고 윤택한 것과 같다.

 

○ 新安陳氏曰

此借富潤屋 以起下句德潤身之意 德如孟子所謂仁義禮智根於心 潤身如所謂 其生色 見面盎背是也 下文心廣體胖乃申言之

이것은 부윤옥을 차용해서 하구의 덕윤식의 뜻을 일으킨 것이다. 덕은 맹자가 말하는 인의예지는 마음에 뿌리를 둔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몸이 윤택하게 되는 것은 그 (인이예지의)色이 생기는(生) 것이 얼굴에도 드러나고 등에도 가득해지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래 글의 심광체반은 이에 거듭 말 한 것이다.

 

故心無愧怍則廣大寬平而體常舒泰 德之潤身者然也

蓋善之實於中而形於外者如此 故又言此以結之

그러므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광대하고 관평(너그럽고 평화로움)하여 몸이 항상 펴지고 태연하니,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함이 그러함을 말한 것이다. 선이 마음속에 성실하여 외면에 나타남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또 이것을 말하여 맺은 것이다.

朱子曰

富潤屋以下 是說意誠之驗如此 心本是闊大底物事 只因愧怍 便卑狹被他隔礙了 所以體不能得 安舒

부윤옥이하는 뜻을 성실이 한 증험이 이와 같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고, 마음은 본래 넓고도 큰 사물이나, 단지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곧 비속하고 좁아져 다른 사람에 의해 막히는 것이니, 몸이 능히 편안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 毋自欺是誠意 自慊是意誠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은 뜻을 성실히 하는 것이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은 뜻이 성실해진 것이다.

 

○ 小人閒居以下 是形容自欺之情狀 心廣體胖是形容自慊之意

소인한거 이하는 스스로 속이는 정상을 형용한 것이고, 심광체반은 스스로 만족함을 형용한 것이다.

 

○ 無愧怍 是無物欲之蔽 所以能廣大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물욕의 폐단이 없는 것이니, 능히 광대하게 되는 것이다.

 

○ 三山陳氏曰

心在內者也 以理之無歉 故能廣大 體在外者也 以心之旣廣 故能舒泰 人之一心少有所歉則視聽怵迫而擧動跼蹐 雖吾四體將不得其所安矣 皆自然之應也

마음은 안에 있는 것이니, 이치가 모자람이 없으므로 능히 廣大이고, 체는 밖에 있는 것이라, 마음이 이미 넓으므로 능히 舒泰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조금이라고 모자람이 있으면 보고 듣는 것이 출박(두렵고 궁함)하여 거동이 조심스러워 지니, 아무리 해도 나의 四體는 장차 안정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모두 다 자연의 응함이다.

 

○ 上說小人實有是惡 故其惡形見於外 此說君子實有是善 故其善亦形見於外

위는 소인이 실제로 악을 행함이 있는 것을 설명하여 그 악이 밖에 드러난 것이고, 여기서는 군자가 실제로 선을 행함이 있는 것을 설명하여 그 선이 또한 밖에 드러난 것이다.

 

○ 雙峯饒氏曰

心不正何以能廣 身不修何以能胖 心廣體胖卽心正身修之驗 所以能心廣體胖只在於誠其意 以此見誠意爲正心修身之要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어떻게 능히 마음이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몸이 닦아지지 않으면 어떻게 능히 몸이 편안해질 수 있겠는가. 심광체반은 바로 心正과 身修의 증험인 것이다. 능히 심광체반한 것은 다만 뜻을 성실히 하는데 있으니, 이것으로 誠意가 正心과 身修의 핵심인 것을 알 수 있다.

 

○ 玉溪盧氏曰

前兩言必愼其獨 此申言必誠其意 三言必字示人可謂眞切

앞에서는 必愼其獨을 두 번 말하고 여기서 거듭 必誠其意을 말하여 必字을 세 번이나 말한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 가히 眞切(진실하고 절실함)하다고 할 수 있다.

 

○ 仁山金氏曰 小人閒居以下自欺 敗露之可畏 德潤身心廣體胖自慊 快足之可樂

小人閒居 이하는 스스로 속이는 것이니 드러날 것을 두려하는 것이고, 덕윤신과 심광체반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니 快足의 즐거움이다.

 

雲峯胡氏曰

孟子說浩氣處與此章意合 不自欺卽自反而縮 自欺卽自反而不縮 厭然卽是氣餒 心廣體胖卽是浩然之氣

맹자의 호연지기 설명이 此章의 뜻과 부합되니,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 반성하여 곧게 하는 것이고, 스스로 속인다는 것은 곧 스스로 반성하여 곧게 하지 않는 것이다. 厭然은 곧 기가 주린 것이고, 심광체반은 바로 호연지기이다.

 

○ 新安陳氏曰 上文誠於中形於外 是惡之實中形外者 此是善之實中形外者

윗글에 誠於中形於外라고 하는 것은 악이 마음속에 가득 차면 밖에 나타나고, 여기서는 선이 마음속에 가득 차면 밖에 나타나는 것이다.

 

右傳之六章 釋誠意

이상은 전문의 6장이니, 성의를 해석하였다.

朱子曰

許多病痛都在誠意章 一齊說了 下面有些小病痛亦輕 可此章最緊切 若透過此一關 此去做工夫便易了 由是而之 便駸駸進於善而快不至下陷於惡矣

허다한 병통이 모두 誠意章에 있으니, 한꺼번에 순서대로 설명을 하였고, 하면에 있는 것은 조금 병통이 있으나 또한 가벼운 것이니 가히 此章은 매우 긴요하고 절실하다. 만약 이 한 관문을 통과한다면 통과한 후에는 공부를 하는 것이 쉬울 것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아가 곧 점점 선에 나아간다면 결단코 악에 빠지는 것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 雙峯饒氏曰

傳之諸章釋八事 每章皆連兩事而言 獨此章單擧誠意 蓋知至意誠固是相因 然致知屬知 誠意屬 行 知行畢竟是二事 當各自用力 不可謂知了便自然能行 所以誠意章不連致知說者爲此 正心誠 意雖皆屬行 然誠意不特爲正心之要 自修身至平天下皆以此爲要 故程子論天德與王道皆曰

傳의 여러 章 중 팔조목의 설명에서 章마다 모두 兩事로 連하여 말하였는데, 유독 此章만 성의 하나만 들었다. 대개 知至와 意誠은 진실로 서로 인연이 되지만 그러나 致知는 앎에 속하고 誠意는 행실에 속한다. 앎과 행실은 결국 두 개의 일이니 마땅히 각각 스스로 힘을 써야 할 것이며, 알기만 하면 곧 자연적으로 능히 행해질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誠意 章을 致知와 연하여 설명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심과 성의가 비록 모두 행실에 속하지만 성의는 다만 정심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수신으로부터 평천하까지 모두 성의를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정자가 천덕과 왕도를 논할 때 모두 왈

其要只在謹獨 天德卽心正身修之謂 王道卽齊家治國平天下之謂 謹獨卽誠意之要旨 若只連正心 說則其意促狹 無以見其功用之廣大如此也 此章乃大學一篇之緊要處 傳者於此章說得極痛切 始言謹獨 誠意之方也 中言小人之意不誠 所以爲戒也 終焉誠意之效驗所以爲勤也

그 근본은 다만 謹獨에 있다고 했다. 천덕은 바로 심정 수신을 말하는 것이고, 왕도는 바로 제가 치국평천하를 말한 것이다. 근독은 곧 성의의 요지이며 만약 단지 정심과 연하여 설명하면 그 뜻이 촉박하고 좁아져, 그 功用의 광대함을 이와 같이 볼 수 없다. 此章은 그래서 대학에서 긴밀하고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傳者가 此章에서 지극히 통절하게 설명을 한 것이니, 처음에 근독을 말한 것은 성의의 방법이고, 중간에 소인의 뜻이 성실하지 못하다고 말한 것은 경계를 한 것이고, 마지막에 성의의 효험은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한 것이다.

 

經曰 欲誠其意 先致其知 又曰 知至而后意誠 蓋心體之明有所未盡則其所發

必有不能實用其力而苟焉以自欺者

경문에 왈, 자신의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지식을 지극히 하라고 하였고, 또 왈, 지식이 지극한 뒤에 뜻이 성실해진다 하였으니, 심체(마음의 본체)의 밝음이 아직 미진한 바가 있으면 그 마음이 발하는 바가 반드시 실제로 그 힘을 쓰지 못하여 구차하게 스스로 속임이 있는 것이다.

朱子曰

大學雖使人戒夫自欺而推其本則必其有以用力於格物致知之地然後 理明心一而所發自然莫非眞 實 不然則正念方萌而私意隨起 亦非力之所能制矣

대학에서 비록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속이는 것에 경계를 두었으나, 그 근본을 미루어 본다면 반드시 격물치지의 분야에 힘을 쓴 연후에야 이치가 밝아지고 마음이 한결같아 그 드러남이 자연이 진실하지 않음이 없다. 그렇지 못하면 올바른 생각이 생겨도 사사로움도 따라 생기니 또한 그것을 능히 제압할 힘이 없는 것이다.

 

○ 若知有不至則其不至之處 惡必藏焉以爲自欺之主 雖欲致其謹獨之功 亦且無主之能爲而無地之可據矣 此又傳文之所未發而其理已具於經者 皆不可以不察也

만약 앎이 지극하지 못함이 있으면 그 지극하지 못한 곳에 악이 반드시 숨어 그것이 스스로 속이는 주인이 되어, 비록 그 근독의 공을 이루고자 하나 또한 주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의지할 수 있는 경지도 없어진다. 이것은 또한 傳文에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이치는 이미 經에 갖추어져 있으니 잘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 新安陳氏曰

此言知不至則意不誠

이것은 앎이 지극하지 않으면 뜻이 성실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然或已明而不謹乎此則其所明 又非己有而無以爲進德之基

그러나 혹 이미 밝게 알았다 하더라도 이것을 삼가지 않으면 그 밝힌 것이 또 자신의 소유가 아니어서 덕에 나아가는 기초로 삼을 수가 없다.

三山陳氏曰

於知已至後 亦非聽之自誠 蓋無一刻不用其戒謹之功

이미 앎이 지극해 진 것이 또한 저절로 성실해지는 것을 허락하는 것(聽)은 아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경계하고 조심하는 공부를 안해서는 안 된다.

 

○ 新安陳氏曰

此言知至後 又不可不誠其意 蓋誠意者進德之基本也

이것은 앎이 지극한 후에 또한 뜻을 성실히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됨을 말한 것이다. 아마도 뜻을 성실히 하는 것이 덕으로 가는 기본일 것이다.

 

故此章之指 必承上章而通考之然後

有以見其用力之始終 其序不可亂而功不可闕如此云

그러므로 이 장의 듯을 반드시 위장을 이어 통틀어 상고한 뒤에야 힘을 쓰는 처음과 끝을 볼 수 있으니, 그 순서를 어지럽힐 수 없고 공부를 빠뜨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玉溪盧氏曰

由致知方能誠意 此序之不可亂 旣致知又不可不誠意 此功之不可闕 誠意至平天下序皆不可亂 功皆不可闕 序不可亂則不可躐等而進 功不可闕則不可半途而廢云

앎을 이룸으로 말미암아야 바야흐로 능히 뜻이 성실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순서를 바르게 한 것이고, 이미 아는 것을 이루었으면 또한 뜻을 성실히 아니할 수가 없으니 이것은 공부를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성의로부터 평천하까지 순서가 모두 바르게 되어 있느니 공부도 모두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순서를 바르게 하면 등급을 뛰어넘어 나아갈 수는 없다. 공부를 빠뜨리지 아니한다면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다.

6 장 끝

[출처] 第 6章 誠意|작성자 주양일

'大學 工夫' 카테고리의 다른 글

第 8章 修身 齊家  (0) 2022.05.28
第 7章 正心 修身  (0) 2022.05.28
第 4-5章 格物致知  (0) 2022.05.28
第 3章 止於至善  (0) 2022.05.28
第 1-2章 明明德 新民  (0) 2022.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