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章
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 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
자 왈, 쟁송을 다스림(聽)은 내 남과 같으나 반드시 백성들로 하여금 쟁송함이 없게 하겠다. 하였으니, 실정(질실성)이 없는 자가 그 거짓말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크게 두렵게 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일러 근본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猶人 不異於人也 情實也
引夫子之言而言聖人能使無實之人 不敢盡其虛誕之辭 蓋我之明德 旣明
유인은 남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정은 실이다(情僞=眞僞=誠僞). 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인이 실정이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그 허탄한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명덕이 이미 밝아져서
此推本言 明明德爲本 乃傳者言外之意
이것은 본을 미루어 말한 것이니, 명명덕이 본이 되고 전에는 이외의 의미를 말하였다.
自然有以畏服民之心志 故訟不待聽而自無也 觀於此言 可以知本末之先後矣
자연히 백성들의 심지를 두렵게 하고 복종시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쟁송 듣기(다스리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다. 이 말을 살펴본다면 본말의 선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朱子曰
聖人說聽訟我也無異於人 當使其無訟之可聽方得 聖人固不曾錯斷了事 只是他所以無訟者 却不在於善聽訟 在於意誠心正 自然有以薰炙漸染大服民志 故自無訟之可聽耳
성인이 聽訟에는 나도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으니, 마땅히 聽訟이 없어야 만이 바야흐로 옳은 것이다. 성인은 진실로 일찍이 일에 대해서 단정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여기에서 송사를 없앤다고 하는 것은 곧 聽訟을 잘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意誠心正하여 자연히 薰炙點染(교화를 받아 점점 물들게 함)하여 백성의 마음을 크게 감복시키는데 있으니, 그러므로 저절로 聽訟이 없을 뿐이다.
○ 使民無訟 在我之事本也 此所以聽訟爲末
백성으로 하여금 송사를 없도록 한다는 것은 나의 일로써 本이고, 여기서 聽訟은 末이 된다.
○ 無情者 不得盡其辭便是說那無訟之由 然惟先有以服其心志 所以能使之不得盡其虛誕之辭
無情者가 그 말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들이 송사를 안 할 이유를 설명한 것이지만 그러나 생각하건대 먼저 그 마음을 감복시킴이 있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들로 하여금 그 허망한 말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 如成人有其兄死而不爲衰者 聞子皐將爲成宰 遂爲衰 子皐又何曾聽訟了致然 只是自有感動人處耳
성땅에 어떤 사람이 그의 兄死에 복(齊衰)을 입지 않는 자가 있었는데, 子皐(高柴 : 공자제자))가 장차 成宰로 온다는 소문을 듣자 마침내 복을 입었으니, 자고가 또한 어찌 聽訟을 한 후에 그렇게 했겠는가. 단지 저절로 사람을 감복시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 雙峯饒氏曰
聽訟末也 使無訟理其本也 傳者擧輕以明重 然引而不發 知此則見明德新民之相爲本末矣 聞無情曰情與僞對情實也 僞不實也 論語曰 民莫敢不用情
聽訟은 末이고, 하여금 訟事을 없애는 것은 그 本을 다스리는 것이다. 傳은 가벼운(간단한 것) 것을 들어 무거운(중요한) 것을 밝힌 것이나 인용을 하고는 밝히지는 안았으니, 이것을 안다면 명덕과 신민이 서로 본말이 됨을 알 수 있다. 無情을 물으니 曰 ‘정과 위는 서로 대가 되니 정은 실(진실)이고, 위는 불실(거짓)이다.’ 논어 曰 ‘백성들이 감히 정을 쓰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 玉溪盧氏曰
有訟可聽非新民之至善 無訟可聽方爲新民之至善 無訟則民新矣 使民無訟 惟明明德者能之 聽訟使無訟之本末先後 卽明德新民之本末先後也 經文物有本末上有知止能得一節 前章釋止至善而知止能得之義 已在其中 經文物有本末下有終始先後 又有修身爲本及本亂末治者否矣 此言知本則不特終始先後之義在其中而爲本及本亂末治者否之意 亦在其中矣
송사가 있어 재판하는 것은 신민의 지선이 아니고 청송을 없게 하는 것이 바야흐로 신민의 지선이 되는 것이니 송사가 없는 것이 백성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백성으로 하여금 송사가 없는 것은 생각하건데 (자기의) 명덕을 밝히는 자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고, 聽訟과 백성으로 하여금 송사를 없게 하는 것의 본말선후는 바로 명덕 신민의 본말 선후인 것이다. 경문에 物有本末 위에는 知止能得의 一節이 있고, 前章에는 止至善을 설명하여 머묾을 암을 체득한(知止能得) 뜻이 이미 그 가운데에 있다. 경문에 物有本末 아래는 終始先後가 있고 또 修身爲本과 本亂末治者否가 있으니, 이것은 근본을 안다고 말하면 終始先後의 뜻이 그 가운데 있음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근본이 된다는 것과 本亂末治者否의 의미도 또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 東陽許氏曰
本卽明明德也 我之德旣明則自能服民志而不敢盡其無實之言 如虞芮爭田不敢履文王之庭是文王之德大畏民志自然無訟
본은 바로 명명덕이다. 나의 덕이 이미 밝으면 저절로 능히 백성들이 마음으로 감복되어 감히 無實(거짓)의 말을 하지 못한다. 虞와 芮의 爭田에서 감히 문왕의 조정에 이르지 못함은 문왕의 덕이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경외함이 있게 하여 자연 송사가 없는 것이다.
○臨川吳氏曰
上章烈文以新民之所止言之而著明明德之效者 是能新民者皆本於明明德也 故此章言聖人能使民德自新而無實之人不敢盡其虛誕之辭 自然有以畏服其心志 是以訟不待聽而自無者 蓋本於能明其明德也 故朱子曰觀於此言可以知本末之先後
上章의 烈文(詩)는 신민이 머무는 바로 말을 하여 명명덕의 효험을 들어낸 것이니 이것은 능히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모두 명명덕에 본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此章에 성인이 능히 백성들로 하여금 그 덕을 스스로 새롭게 하여 無實의 사람이 감히 허망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니, 자연히 그 마음을 감복시켜 경외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聽訟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저절로 없어진 것이니 대개 능히 (자기의) 명덕을 밝히는데 근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이 말을 잘 살펴보면 본말의 선후를 알 수 있다.’고 했다.
右傳之四章釋本末
이상은 전의 4장이니, 본말을 해석하였다.
新安陳氏曰
此章釋本末以結句四字知之 知本之當先則自知末之當後矣
此章은 본말을 해석하여 結句의 四字(此爲知本)를 알게 하였다. 근본을 아는 것을 마땅히 우선하면 저절로 末을 마땅히 후에 해야 함을 안다.
此章 舊本 誤在止於信下
이 장은 구본에 잘못되어 지어신 아래에 있었다.
此謂知本
程子曰 衍文也
정자 왈, 연문이다.(衍文=羨文 羨 끼어들 연, 남을 연)
五章
此謂知之至也
이것을 일러 지식이 지극하다는 것이다.
此句之上 別有闕文 此特其結語耳
右傳之五章 蓋釋格物致知之義而今亡矣
이 구의 위에 별도로 빠진 글이 있고, 이것은 다만(特) 맺음말일 뿐이다.
이상은 전문의 5장이니, 격물치지의 뜻(義=意, 趣味=趣意=趣義)을 해석한 것 같은데(蓋 추즉) 지금은 없다.
此章 舊本 通下章誤在經文之下
이 장은 구본에는 아래 장을 통틀어 잘못되어 경문의 아래에 있었다.
間嘗竊取程子之意 以補之 曰
所謂致知在格物者 言欲致吾之知在卽物而窮其理也
근간에(間) 내 일찍이 정자의 뜻을 속으로 취하여 빠진 부분을 그것을 보충하여 왈,
이른바 지식을 지극히 함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는 것은 나의 지식을 지극히 하고자 한다면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함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卽物如卽事卽景隨吾所接之事物也
卽物은 사물에 접하고 환경에 접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내가 접하는 사물에 따른 것이다.
蓋人心之靈莫不有知而天下之物莫不有理 惟於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也
是以 大學始敎
인심의 영특함은 앎이 잊지 않음이 없고 천하의 사물은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지만 다만 이치에 대하여 아직 궁구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그 앎이 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에서 처음 가르칠 때에
한문과 한글 人心之靈은 사람의 영명한 마음(人之靈心), 人理所固有 사람의 이치가 본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이치이다. 人之所固有理
須看始敎字 此是大學第一件下工夫處
마땅히 始敎를 잘 봐야하니 이것은 大學에서 제일 먼저 공부하는 것이다.
必使學者 卽凡天下之物 莫不因其已知之理
반드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서 이미 알고 있는 이치를 인하여(따라서)
已知卽上文人心之靈莫不有知之知
已知는 바로 상문의 영묘한 인심이 알지 못함이 없는 知이다.
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則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
더욱 궁구하지 않음이 없게 하여, 그 극에 이름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힘쓰기를 오래하여 하루아침에 활연히 관통함에 이르면 모든 사물의 표리와 정조가 이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내 마음이 전체와 대용이 밝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新安陳氏曰
久字與一旦字相應用力積累多時然後 一朝脫然通透 吾心之全體卽釋明德 章句所謂具衆理者 吾心之大用卽所謂應萬事者也
久字는 一旦字와 더불어 相應하는 것이니 힘씀을 쌓아 감이 오랜 然後에 하루아침에 (무지에서) 벗어나 통달하게 된다. (앎은 사선이 아니고 계단 형태) 吾心之全體는 바로 밝은 덕을 설명한 것이니, 章句에 모든 이치를 갖춘 것이고 吾心之大用은 바로 모든 일에 응하는 것이다.
此謂格物 此謂知之至也
이것을 격물이라 이르며 이것을 지지지라 이른다.
問所補第五章何不效其文體 朱子曰 亦嘗效而爲之 竟不能成
묻기를 第五章을 보충함에 어찌하여 그 문체를 본받지 않았습니까.
주자 왈, 나도 또한 일찍이 본받으려고 했으나 끝내 하지 못했다.
○ 大學不說窮理而謂之格物 只是使人就實處窮究
대학에 窮理라 말하지 않고 物格이라 말한 것은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實處에 나아가 窮究하도록 한 것이다.
○ 格物只是就一物上窮盡一物之理 致知便只是窮得物理盡後我之知識亦無不盡處
格物은 오직 어떤 물건에 나아가 그 물건의 이치를 끝까지 궁구하는 것이고, 致知는 곧 다만 물건의 이치를 다 안 후에, 나의 지식이 또한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大學是聖門最初用功處 格物又是大學最初用功處 試考其說就日用間 如此作工夫久之 意思自別
대학은 聖人의 門에 (들어가는데) 처음으로 힘을 쓰는 곳이고, 格物은 동시에(又) 대학에 (공부하는데) 처음으로 힘을 쓰는 곳이다. 그 말을 익히고 깊이 헤아려 날로 씀에 나아가 그와 같이 공부를 오래 하면 뜻이 저절로 구별될 것이다.
○ 問經文物格而後知至 却是知至在後 今乃云因其已知而益窮之則又在格物前 曰
經文에는 物格而後知至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앎에 이른 이후에 있는데. 지금 이에 말하기를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인하여 더욱 궁구한다고 하면 또한 격물하기 전에 있는 것인가를 묻자 曰
知元自有 纔要去理會 便是這些知萌露 若懵然全不向著 便是知之端未曾通 纔思量著 便這箇骨子透出來 且如做些事錯 纔知道錯 便是向好門路 却不是方始去理會箇 知只是如今須著 因其端而推致之 使四方八面千頭萬緖無有些不知 無有毫髮窒礙 孟子所謂 知皆擴而充之若火之始然 泉之始達 擴而充之 便是致字意思
知는 원래 있는 것이다. 이해를 하는데 기본으로 필요한 것은 곧 저 작은 앎의 싹이 드러남이다. 만약 몽매하여 전혀 드러남이 없다면 곧 이것은 앎의 단서가 아직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생각이나 헤아림이 생긴다는 것은 곧 저 (앎의) 알갱이가 透出하여 나오는 것이니 또한 만약에 이 작은 일에 착오가 생기어 조금이라도 잘못을 알게 되면 바로 好門路(올바른 곳?)로 향하게 되나 다시 곧 이해로 나아가는 올바른 것은 아니다. 앎은 단지 지금 드러난 것이니 그 실마리로 말미암아 미루어 나간다면 만사 사소한 것이라도 모르는 것이 없고 티끌만이라도 막힘이 없으니 맹자 소위 知는 모두 넓혀 채워 나간다면 불이 처음 붙는 것과 같고 샘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다. 는 것이고 넓혀 채워 나단다는 것이 바로 致字의 뜻이다.
○ 表者人物所共由 裏者吾心所獨得 有人只就皮穀上用工 於理之所以然者 全無見處 有人思慮向裏去多 於事物上都不理會 此乃說玄說妙之病 二者都是偏 若到物格知至則表裏精粗無不盡
表者는 남과 내가 공유하는 것이고 裏者는 내 마음에만 있는 것이니, 어떤 사람이 단지 (본질적인 현상은 추구하지 아니하고) 피상적으로만 공부를 하여 이치의 소이연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생각만하여 마음속으로만 많이 나아가 사물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니 이것이 곧 說玄說妙之病(한 쪽으로 치우치는 병?)이다. 二者는 대개 한 쪽으로만 치우친 것이다. 만약 物格에 이르러 앎이 지극하게 되면 表裏精粗가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北溪陳氏曰
理之體具於吾心而其用散在事物 精粗巨細 都要逐件窮究其理 若一事不理會則此心闕一事之理 一物不理會則闕一物之理非揀 精底理會而遺其粗 大底理會而遺其小也 頭緖雖多 然進亦有序 先易而後難 先近而後遠 先明而後幽
理의 體는 내 마음에 갖추어져 있고 그 用은 사물에 산재해 있으니, 精粗巨細가 모두 사건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함이 요구된다. 만약 一事라도 이해하지 못하면 내 마음은 一事의 이치를 빠뜨린 것이며 一物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면 一物의 이치를 빠뜨린 것이니 분간(分揀)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精은 이해하고 그 粗는 생각 안하고, 大는 이해하고 그 小는 빠뜨린 것이다. 頭緖(실마리)가 비록 많으나 그러나 進(공부)에는 또한 순서가 있으니, 先易하고 後難하며, 先近하고 後遠하며 先明하고 後幽해야 한다.
○ 西山眞氏曰
大學校人以格物致知 蓋卽物而理在焉 庶幾學者有著實用功之地 不至馳心於虛無之境 若不就事物上推求義理則極至處亦無緣知得盡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침에 格物致知로 한 것은, 아마 物에 나아가면 理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배우는 자는 實에 나아가 노력을 하는 처지에 있어야지 허무의 경지에 마음을 썼어는 안 된다. 만약 事物에 나아가 義理를 推求하지 않으면 지극한 경지에 이름에 앎에 대한 아무 연고가 없는 것이다.
○ 雙峯饒氏曰
格物窮至那道理恰好閫奧處 自表而裏自粗而精 然表之中又有裏 精之中又有至精 透得一重 又有一重 此如爲子必孝 爲臣必忠 此是臣子分上顯然易見之理 所謂表也 然所以爲孝爲忠則非一字所能盡 如居則致其敬 養致樂 病致憂 喪致哀祭致嚴 皆是孝裏面節目 所謂裏也 然所謂居致敬 又如何而致敬 如進退周旋愼齊 升降出入揖遊 不敢噦噫嚔咳 不敢欠伸跛倚 寒不敢襲 癢不敢搔之類 皆是致敬中之節文 如此則居致敬又是表 其間節文之精微曲折又是裏也
格物은 저 도리가 恰好하고 閫奧한 곳에 궁구하여 이르는 것이니, 表에서 裏로 粗에서 精으로 이른 것이다. 그러나 表의 中에는 또 裏가 있고 精의 중에도 至靜이 있으니, 一重(한 곳)을 꿰뚫으면 또 一重이 있다. 이것은 자식은 효도를 하고 신하는 충성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은 자식과 신하의 분수 상에서 완연히 드러나고 쉽게 알 수 있는 이치로 소위 表이다. 그러나 효를 하고 충성을 한다는 것은 一字로써 다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예를 들면 (부모와) 함께 있을 때는 致其敬 養致樂 病致憂 喪致哀 祭致嚴 등은 모두 효의 裏面의 節目이니 소위 裏이다. 그러나 소위 居致敬은 또 어떻게 해야 致敬을 하는가. 예를 들면 進退周旋愼齊 升降出入揖遊(폄) 不敢噦噫嚔咳 不敢欠伸跛倚 寒不敢襲 癢不敢搔之 등은 모두 致敬 중의 節文이다. 이와 같으면 居致敬은 또 表가 되고 그 사이 절문의 精微 曲折이 또 裏가 되는 것이다.
딸꾹질 얼噦, 한숨 쉴 희噫, 재채기 체嚔, 기침 해咳,
하품 흠欠, 기지개 켤 신伸, 비스듬히 설 피跛, 기댈 의倚
然此特敬之見於外者耳 至於洞洞屬屬如執玉奉盈 如弗勝 以至視於無形 聽於無聲 又是那節文裏面骨髓 須是格之又格 以至於無可格 方是極處 精粗亦然 如養親一也而有所謂養口體 有所謂養志 口體雖是粗 然粗中亦有精 養志雖是精 然精中更有精 若見其表不窮其裏 見其粗不窮其精 固不盡 然但究其裏而遺其表 索其精而遺其粗 亦未盡 須是表裏精粗無所不到 方是格物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다만 敬이 밖에 드러난 것일 뿐이다. 공경하고 삼가하여 조심스러움에 이르러 구슬을 쥐고 있는 듯 가득찬 물그릇을 잡고 있는 듯, 견뎌내지 못한 듯하여 (부모의) 無形을 봄에 이르고 (부모의) 無聲에 들음에 이름은 또한 저 절문의 裏面 알갱이가 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나아가고 또 나아가 더 나아갈 수 없음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극처가 되는 것이니, 精粗도 또한 그러하므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도 똑 같다. 소위 養口體와 養志가 있으니 口體가 비록 粗이나 그러나 粗 중에 또 精이 있으니 養志가 비록 精이나 그러나 精 중에 다시 精이 있다. 만약 그 表를 보고 그 裏를 궁구하지 아니하고, 그 粗를 보고 그 精을 궁구하지 않으면 진실로 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 裏만 궁구하고 그 表를 빠뜨리고 그 精을 찾고 그 粗를 버리면 또한 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모름지기 表裏精粗가 이르지 않음이 없어야 바야흐로 格物이 된다.
○ 玉溪盧氏曰
心外無理 故窮理卽所以致知 理外無物 故格物卽所以窮理 知者心之神明乃萬理之通會而萬事萬物之主宰 言窮理則易流於恍惚 言格物則一歸於眞實 表也粗也理之用也 裏也精也理之體也 衆理之體卽吾心之體 衆理之用卽吾心之用 心之全體大用無不明則明明德之端在是矣 格物知至雖二事而實一事 故結之曰 此謂物格 此謂知之至也
마음 밖에는 이치가 없으므로 이치를 궁구함은 곧 앎을 지극하게 이루는 것이고, 이치의 밖에는 사물이 없으므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은 곧 이치를 궁구함이니, 앎은 마음의 신령한 밝음이며 만 가지 이치를 통솔해서 모으고 만사와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 이치를 궁구한다고만 말을 하면 황홀경에 빠지기 쉽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고 말해야 한결같이 참되고 실질적인 데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겉과 거친 곳은 이치의 용이고, 속과 정밀한 곳은 이치의 체이며, 모든 이치의 체는 내 마음의 체이고, 모든 이치의 용은 내 마음의 용이니, 마음의 전체와 큰 작용이 밝지 않음이 없다면, 밝은 덕을 밝히는 단서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격물치지는 비록 두 가지 일이나, 실제는 한 가지 일이다. 그러므로 결론에 왈, 이것을 일러 격물이라 하고 이것을 일러 앎이 이르렀다 고 한 것이다.
4-5장 끝
[출처] 第 4-5章 格物致知|작성자 주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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