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 工夫

第 7章 正心 修身

bindol 2022. 5. 28. 05:49

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則不得其正 有所恐懼則不得其正

有所好樂則不得其正 有所憂患則不得其正

 

이른바 몸을 닦음이 자기 마음을 바룸에 있다는 것은, (마음)에 분치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공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우환 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程子曰 身有之身 當作心 ○ 忿懥怒也

정자 왈, 신유의 신은 마땅히 심이 되어야 한다(정약용은 신으로 환원, 몸에도 분노함이 있다고 주장, 수신과 연결된다).

분치는 노함이다.

懥字廣韻玉篇並陟利反

치자는 광운옥편에 모두 척리반(치)이다.

○ 雙峯饒氏曰 忿者怒之甚 懥者怒之留

분은 성냄이 심한 것이고 치는 성냄이 풀리지 않고 머무른 것이다.

 

蓋是四者 皆心之用而人所不能無者 然一有之而不能察

대개 이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작용이니, 사람에게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라도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살필 수 없으면

三山饒氏曰

章句緊要說一察字 亦非從外撰來 蓋因下文心不在焉一句發出察者 察乎理也

장구에 察字를 중요하게 설명한 것은, 단지 밖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아니고, 대개 하문의 心不在焉의 一句에 말미암아 나온 察이니 이치를 살펴야 한다.

 

○ 新安陳氏曰 察之一字 乃朱子推廣傳文之意 使學者有下手處耳

察의 一字는 이에 주자가 전문의 뜻을 미루어 넓이여 학자들로 하여금 궁구하도록 한 곳이다.

 

則欲動情勝而其用之所行 或不能不失其正矣

욕심이 동하고 정이 치우쳐서 그 씀의 행하는 바가 혹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욕심이 동하고 정이 치우쳐서 그 작용의 행하는 바가 혹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問有所忿懥恐懼好樂憂患 心不得其正是要 無此數者 心乃正乎

程子曰 非是謂無 只是不以此動其心 學者未到不動處 須是執持其志

忿懥 恐懼 好樂 憂患하는 바가 있어 마음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 중요한 골자라면 이러한 것이 없어야 마음이 이에 바르게 되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정자 왈, 없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러한 것으로 그 마음이 동요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자는 동요되지 않은 곳에 이르지 못하면 모름지기 그 뜻을 잘 지켜야 한다.

 

○ 朱子曰

大學格物誠意都已練成 到得正心修身章都易了 意有善惡之殊 意或不誠則易於爲惡 心有偏正 之異 心有不正則爲物欲所動 未免有偏處 却未必爲惡

대학에서 格物 誠意를 모두 이미 수련하여 터득하였다면 正心 修身章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쉽게 된다. 뜻에는 선악의 차이가 있으니, 뜻이 혹 성실하지 않으면 악을 행하기가 쉽고 마음에는 치우침과 바름의 차이가 있으니 마음이 바르지 못함(치우침)이 있으면 물욕에 동요당해서 치우침을 면할 수는 없지만 다시 반드시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 四者只要從無處發出 不可先有在心下 須看有所二字 如有所忿懥 因人有罪而撻之纔了 其心便平 是不有 若此心常常不平 便是有

네 가지는 단지 無處(없는 곳 즉외부)로부터 나온 것이지 먼저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니니, 모름지기 有所의 두 글자를 헤아려야 한다. 예를 들면 忿懥하는 바가 있다면 남이 죄가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꾸중을 한 후에는 그 마음이 곧 평정되니 (분치가 마음속에) 없어진 것이고, 만약 이 마음이 늘 평정하지 못하면 곧 (분치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 所謂有所 是被他爲主於內 心反爲他動也

이른바 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것에 의해서 마음속에 주인이 되어 마음이 도리어 그것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 心纔繫於物 便爲所動 所以繫於物者有三 事未來先有箇期待之心 或事已應過 又留在心下不能忘 或正應事時 意有偏重 都是爲物所繫縛 便是有這箇物事 到別事來 到面前 應之便差了 如何心得其正 聖人之心瑩然虛明 看事物來 若大若小四方八面 莫不隨物隨應 此心元不曾有這物事

마음이 조금이라도 물에 매이게 되면 곧 (마음이) 움직이는 바가 되니, 물에 매이는 까닭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 것과, 혹 일이 이미 지나갔는데 다시 마음에 남아 잊지 못하는 것과, 혹 바로 일에 응했을 때 마음이 치우침이 있는 것 등인데, 모두가 물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곧 이와 같은 物事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별개의 일이 생겨 면전에 이르게 되면 그것에 응하는데 곧 차별이 생기니 어떻게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성인의 마음은 밝고 虛明하여 사물을 보게 되면, 큰 것인가 작은 것인가 四方八面을 物에 따르고 應함에 따르지 아니 함이 없으니, 이와 같은 마음은 원래 일찍이 저 物事에 있는 것은 아니다.

 

○ 如顔子不遷怒 可怒在物 顔子未嘗爲血氣所動而移於人也 則豈怒而心有不正哉

예를 들어 안자의 불천노는 노하는 것은 물에 있으므로, 안자는 일찍이 혈기에 움직이는 바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노하여 마음에 바르지 못함이 있겠는가.

 

○ 今人多是才怒 雖有可喜事 亦所不喜 才喜雖有當怒之事來 亦不復怒 便是蹉過事理了 蓋這物事纔私 便不去 只管在胸中 推盪終不消釋 使此心如大虛則應接萬務 各止其所而我無所與 可也 看此一章只是要 人不可先有此心耳

지금 사람은 조금 화가 나면 비록 기뻐할 일이 있어도 단지 기뻐하지 않은 뿐이고, 조금 기쁘면 비록 마땅히 성낼 일이 있어도 다만 다시 성을 내지 않음이 많으니, 곧 사리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대개 저 物事에 작은 사사로움을 곧 제거하지 못하고 단지 마음속에 남아 있어 없애고자 하나 끝내 소멸되지 않으니 이 마음으로 하여금 크게 비우면 많은 일에 응접함에 각 그 (본연의) 자리에 머물러 내가 참여하는 바가 없음이 가능할 것이다. 이 一章을 살펴보면 단지 사람들은 먼저 이러한 마음을 가지지 않아야 함을 요구할 뿐이다.

 

○ 問忿好自己事 可勉强不爲 憂患恐懼自外來 不由自家 曰便是自外來 須要我有道理處之 事來亦合當憂懼 但只管累其本心 亦濟甚事 孔子畏於匡 文王囚羑里 死生在前 聖人元不動心處之恬然

성내고 좋아하는 것은 자기의 일이니 힘써 아니할 수 있지만, 우환과 공구는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합니다 고 물으니, 왈, 곧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모름지기 내가 도리에 맞게 처리함을 요구하니, 일이 닥치면 또한 합당하게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마는, 그러나 단지 본마음에 연루된다면 또 무엇으로(甚) 일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공자는 광(땅)에서 두려워하였고, 문왕은 유리에서 감금되어, 생과 사가 앞에 있었으나 성인은 원래 부동심이라 대처함에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 或問大學不要先有恐懼中庸却要恐懼何也

西山眞氏曰 中庸只是未形之時 常常持敬 令心不昏昧而已 大學之恐懼却是俗語恐怖之類自與中庸有異

누가 묻기를 대학에는 먼저 공구가 있음을 요구하지 아니하는데 중용에는 반대로 공구를 요구하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하니 서산진씨 왈, 중용에서는 단지 (어떤 物事가) 나타나기 이전에, 항상 공경을 지니고, 마음으로 하여금 혼매하지 않도록 할 뿐이고, 대학의 공구는 반대로 속된 말로 외부의 공포와 같은 것이니, 저절로 중용의 것과는 다름이 있다.

 

○ 喜怒憂懼乃心之用 非惟不能無 亦不可無 但平居無事之時不要先有此四者在胸中 如平居先有四者卽是私意 人若有些私意塞在胸中 便是不得其正 須是涵養此心 未應物時 湛然虛靜如鑑之明 如衡之平 到得應物之時 方不差錯 當喜而喜當怒而怒當憂而憂當懼而懼 洽好則止 更無過 當如此方得本心之正

喜怒憂懼는 곧 마음의 작용이니, 다만 없을 수는 없지만 또한 아니할 수도 없다. 다만 평소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먼저 이 네 가지가 마음속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평소에 먼저 이 네 가지가 마음속에 있으면 이것은 곧 사욕이니, 사람이 만약에 이 작은 사욕이 가슴속에 막혀 있으면 곧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이 마음을 잘 길러 물에 응하기 전에는 고요하게 虛靜하여 거울이 맑은 것과 같이 저울이 균형이 맞는 것처럼 되어 물에 응할 때에 이르게 되면 바야흐로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마땅히 기뻐할 때는 기뻐하고 當怒而怒當憂而憂當懼而懼하여 만족하면 그치고 다시는 지나침이 없을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바야흐로 본마음의 바름을 얻을 것이다.

 

○ 玉溪盧氏曰

心者身之主而明德之所存也 未應物之前 寂然不動 無所忿懥恐懼則心之本體無不正而明德之本 體無不明 方應物之際 感而遂通當忿懥而忿懥 當恐懼而恐懼則心之妙用無不正而明德之妙用無不明 旣應物之後 依舊寂然不動 未嘗有所忿懥恐懼則心之本體終始無不正而明德之本體終始無不明也 人患不識其本心耳 唯虛故靈 纔失其虛便失其靈 此心之所以爲心而明德之所以爲明德也

마음은 몸의 주인이고, 명덕이 머무는 곳이다. 물에 응하기 전에는 고요하게 움직이지 아니하다가 분치 공구하는 바가 없으면 마음의 본체는 바르지 않음이 없고 명덕의 본체는 밝지 않음이 없으나, 바야흐로 물에 응할 때에는 감응을 하여 완전히 통하여 마땅히 분치할 때는 분치하고 마땅히 공구할 때는 공구한다면 마음의 오묘한 작용이 바르지 않음이 없고 명덕의 오묘한 작용이 밝지 않음이 없는 것이고, 이미 물에 응한 이후에는 이전에 의지한 것처럼 고요하게 움직이지 아니하여, 일찍이 분치하고 공구하는 바가 있지 않으면 마음의 본체는 시종 바르지 않음이 없고, 명덕의 본체는 시종 밝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사람들은 본마음을 알지 못함을 근심할 뿐이다. 오직 虛하기 때문에 靈한 것이므로, 그 虛를 조금 잃으면 곧 그 靈을 잃는 것이니 이것이 마음이 되고 명덕이 되는 이유이다.

 

○ 雲峯胡氏曰

心之體無不正 所謂正心者正其心之用爾 在正其心此正字 是說正之之工夫 蓋謂心之用或有不正 不可不正之也 不得其正此正字 是說心之體本無不正而人自失之者也 曰正其 曰其正 自分體用 心之體本如大虛 或景星慶雲 或熱風雷雨而大虛自若 人之一心豈能無喜怒憂懼 然可怒則怒 怒過不留 可喜則喜 喜已而休 喜怒憂懼皆在物而不在我 我雖日接乎物而不物(動)於物 此所以能全其本體之虛而無不正也

마음의 본체는 바르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마음의 작용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在正其心의 正字는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를 설명한 것이니, 대개 마음의 작용이 혹 바르지 않음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한 것이고, 不得其正의 正字는 마음의 본체가 본래는 바르지 아니 함이 없지만 사람이 스스로 그 바름을 잃어버린 것을 설명한 것이다. 正其와 其正은 저절로 체용으로 나누어진 것이니 마음의 본체는 본래 大虛하여 혹 景星하고 慶雲하며 혹 熱風하고 雷雨하드라도 大虛는 自若하여 사람의 한 마음이 어찌 喜 怒 憂 懼가 없겠는가마는 그러나 성낼 만하면 성내고, 성을 낸 후에는 잊어버리고 기뻐할 만하면 기뻐하고 기뻐한 후에는 잊어버리니, 喜 怒 憂 懼는 모두 물에 있지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비록 날로 물에 접 하드라도 物에 動하지 아니할 것이니, 이것이 본체의 虛를 온전히 하여 바르게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或疑中庸首章先言存養而後言省察 大學誠意言省察而欠存養 殊不知此章正自有存養省察工夫 忿懥恐懼等之未發也 不可先有期待之心 其將發也 不可一有偏繫之心 其已發也 不可猶有留滯之心 事之方來 念之方萌 是省察時節 前念已過 後事未來是存養時節 存養者存此心本體之正 省察者惟恐此心之用或失之不正而求以正之也 宜仔細看章句之二察字及三四存字

혹 중용에서는 首章에 먼저 존양을 말한 후에 성찰을 말하고, 대학의 성의에서는 성찰을 말하고 존양이 빠진 것(欠)을 의심을 하니, 특히 此章에 바로 존양과 성찰의 공부가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분치와 공구 등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먼저 기대의 마음이 있으면 안 되고 그러한 마음이 장차 일어날 때는 조금이라도 편중되고 매이는 마음이 있으면 안 되고 그러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는 마땅히 잊지 않는 미련의 마음이 있으면 안 된다. 일에 임하여 생각이 바야흐로 생기는 것은 성찰의 시간이고, 생각이 지나간 후나 일이 아직 생기지 않을 때는 존양의 시간이니, 존양이라는 것은 이 마음의 본체의 올바름을 간직하는 것이고, 성찰이라는 것은 오직 이 마음의 작용이 혹 상실하여 바르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바르게 할 것을 구하는 것이니, 마땅히 자세히 章句의 두 개의 察字와 서 너 개의 存字를 살펴야 한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고 보이지(爲見)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爲聞)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心有不在則無檢其身 是以君子必察乎此而敬以直之 然後此心常存而身無不修也

마음이 보존되지(主一無適) 않음이 있으면 그 몸을 검속(점검)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이를 살펴서 경으로서 마음을 곧게 하니(주역 敬以直內 義以方外), 그런 뒤에 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맹자 存心養性 求放心) 몸이 닦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朱子曰 心若不存 一身便無主宰

주자 왈, 마음이 만약 보존되지 못하면, 몸은 곧 주재함이 없다.

○ 敬是常要此心在這裏 直是直上直下無纖毫委曲

경은 항상 이 마음이 이 속에 존재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직은 위에도 똑바로 아래에도 똑바로 하여 티끌만큼도 왜곡됨이 없는 것이다.

 

○ 問 視而不見聽而不聞 只是說知覺之心 却不及義理之心

曰 才(纔)知覺 義理便在此 才昏便不見了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음은 단지 지각하는 마음을 설명한 것이고 의리의 마음에는 미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라고 물으니 왈, 조금이라도 지각을 하면 의리도 곧 있지만 조금이라도 (지각이) 혼미하면 곧 보이지 않는다.

 

○ 雙峯胡氏曰

四不得其正 言心不正也 視不見以下 言身不修也 言此而不言所以正心修身者 已具於誠意章故 也 聲色臭味事物之粗而易見者耳 心之精神知覺 一不在此則於粗而易見者已不能見 況義理之 精者乎 傳者之意蓋借粗而明精矣

네 가지로 그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바르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視不見이하는 身不修를 말한 것이다. 이것을 말하면서 正心과 修身은 말하지 않은 까닭은 이미 誠意章에 갖추어 있기 때문이다. 聲 色 臭 味는 사물의 조잡한 것으로 보기에 쉬울 뿐이다. 마음의 정신 지각은 조금이라도 없으면 조잡하고 보기 쉬운 것도 이미 능히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의리의 정밀한 것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傳者의 의도는 아마 조잡한 것을 가지고 정밀한 것을 밝히려 했을 것이다.

 

○ 蛟峯方氏曰

上一節說有心者之病 心不在焉一節說無心者之病 上節說心不可有所偏主 此節說心不可無所存 主 不可有者私主也 不可無者主宰之主也 心有存主則群妄自然退聽而心正身修矣 然則中虛而 有主宰者 其正心之藥方也歟

上一節은 有心者(마음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의 病痛을 설명하였고 心不在焉의 一節은 무심자(마음이 주인이 없는)의 病痛을 설명하였다. 上節은 마음이 치우치게 주장하는 바의 주인이 있음이 불가함을 설명하였고, 此節은 마음에 보존해야 하는 주인이 없음이 불가함을 설명하였다. 있어서는 불가하다는 것은 사사로운 욕심의 주인이고,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주재의 주인이다. 마음에 보존해야 하는 주인이 있으면 여러 망상이 자연 물러나게 되어 마음은 바르게 되고 몸은 닦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虛하게 되고 주재자 있게 되는데 이것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처방일 것이다.

 

○ 新安陳氏曰

朱子於此又下一察字 且曰敬以直之 以足大學本文未言之意 提出正心之要法 以示萬世學者

주자는 여기에서 또 아래에 察字를 쓰고, 또한 왈, 경으로 (마음을) 바르게 한다. 라 하고 대학본문에서 말하지 않은 뜻을 만족시켰으니, 마음을 바르게 하는 중요한 법을 제출하여 만세 학자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此謂修身在正其心

右傳之七章 釋正心修身

이것을 일러 몸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룸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상은 전문의 7장이니, 정심수신을 해석하였다.

此亦承上章以起下章 蓋意誠則眞無惡而實有善矣 所以能存是心以檢其身

이 또한 위장을 이어서 아래 장을 일으킨 것이다. 뜻이 성실해지면 참으로 악이 없고 진실로 선이 있을 것이니, 이 때문에 마음을 보존하여 그 몸을 검속할 수 있다.

朱子曰 意誠然後心得其正 自有先後

의성 연후에야 마음이 바름을 얻는 것이니 저절로 선후가 있는 것이다.

○ 新安陳氏曰 此言意誠以後心可得而正 蓋其序之不可亂者

이것은 意誠 이후에야 마음을 얻어 바르게 되는 것이니, 대개 그 순서가 어긋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然或但知誠意而不能密察此心之存否則又無以直內而修身也

그러나 혹 다만 성의만을 알고 이 마음의 보존되고 보존되지 않음을 치밀히 살피지 못한다면 또 안을 곧게 하여 몸을 닦을 수가 없다.

 

新安陳氏曰 此言誠意又不可不正其心 乃其功之不可缺者

이것은 성의는 또 그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에 그 공부가 빠질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 或謂 意誠則心正 朱子曰 不然 這幾句連了又斷 斷了又連 雖若不相連綴 中間又自相貫 譬如一竿竹雖只是一竿 然其幹又有許多節 意未誠則全體是私意 更理會甚正心 然意雖誠了 又不可不正其心

혹자가 뜻이 성실하면 마음이 바르게 됩니까. 하고 말하니 주자 왈, 그렇지 않다. 저 몇 句는 연결에 또 끊어지고, 끊어짐에 또 연결되어, 비록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 같지만 중간에 또한 저절로 서로 관통되어 있으니, 비유하면 한 개의 대나무 장대가 비록 단지 한 개의 장대이지만 그러나 그 줄기에는 또 많은 마디가 있는 것과 같다. 뜻이 성실하지 못하면 전체가 사사로운 뜻이니, 다시 어찌(甚) 마음을 바로 해야 함을 알 수 있겠나. 그러나 비록 성실했다 하더라고 또한 그 마음을 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或謂誠意則心之所發已無不實 又何假於正心之功 雲峯胡氏曰 意欲實而心本虛 實其意則好惡不偏於方發之初 虛其心則喜怒不留於已發之後 新安陳氏曰 下一句 只說得末一邊 未見得四者 心之用先本自虛中發出 當添一句 云虛其心則本體不偏於未發之先 妙用不留於已發之後

혹자가 뜻을 성실히 하면 마음의 드러남이 이미 바르지 않음이 없는데, 또 어느 결에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를 해야 합니까. 하고 말하니 운봉호씨 왈, 뜻은 성실히 하고자 하고 마음은 본래 비워 있으니, 그 뜻을 성실히 하면 (마음이) 막 처음 들어 날 때 좋아함과 미워함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을 비우면 (마음이) 이미 들어난 후에는 기쁨이나 성냄이 남아 있지 않는다. 신안진씨 왈, 아래의 一句는 단지 末一邊을 설명한 것이고, 네 가지는 마음의 작용으로 먼저 본래부터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一句를 첨가하여, 그 마음을 비우면 본체(마음)는 發하지 않은 선입견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묘한 작용이 이미 發한 이후에는 남아 있지 않는다.

 

○ 東陽許氏曰 蓋意誠以下言誠意然後能正心 然或以下言旣誠意又須正心

동양허씨 왈, 대개 意誠이하는 誠意 이후에야 능히 마음을 바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然或이하는 이미 誠意를 했으면 또한 반드시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自此以下竝以舊文爲正

이로부터 이하는 모두 옛글을 옳은 것으로 삼는다.

7 장 끝

[출처] 第 7章 正心 修身|작성자 주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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