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45> 매화의 향기를 읊은 송나라 왕안석의 시

bindol 2022. 6. 1. 05:55

은은한 향기가 풍겨오기 때문이리

 

- 爲有暗香來·위유암향래



담 모퉁이의 매화 몇 가지가(墻角數枝梅·장각수지매)/ 추위를 이겨내고 홀로 피었네.(凌寒獨自開·능란독자개)/ 멀리서도 눈(雪)이 아님을 알 수 있음은(遙知不是雪·요지부시설)/ 은은한 향기가 풍겨오기 때문이리.(爲有暗香來·위유암향래)

위 시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중국 북송 때 문필가·정치인 왕안석(王安石·1021~1086)의 ‘매화(梅花)’로, 그의 시문집 ‘왕임천문집(王臨川文集)’에 들어있다. 위 작품은 매화를 소재로 한 일반적인 시가 아니다. 자연의 이치와 세상살이의 근원이 담겨 있다.

평소 눈길을 주지 않던 담장 모퉁이에 하얀 매화가 피어 있지 않은가. “그까짓 추위쯤”이라면서 핀 꽃인 능한화(凌寒花)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겨울이어서 눈송이로 착각할 수도 있다. 눈 못지않게 하얗기 때문이다. 가히 능설지백(凌雪之白)이다. 그런데 예민한 촉수를 가진 시인은 금방 알아차린다. 매화만의 은은한 향기, 즉 ‘암향(暗香)’ 때문이다. 암향은 자신을 보여주려고 안달하지 않는, 숨어 있는 향기다. 숨어 세상 바깥에 나오지 않는 선비의 향기다. 자극적이고 화사한 향기보다 더 멀리, 더 오래가는 암향은 매화만의 것이다. 필자가 매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 향기와 화려하지 않은 꽃의 모습 때문이다. 묵매(墨梅)는 더 깊다. 묵까지 더하면 최고의 암향이다.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겸 시인인 왕면(王冕·1287~1359)은 묵매 한 점을 그려놓고 읊었다. “우리 집안 벼루 씻던 연못가의 매화나무에(吾家洗硯池頭樹·오가세연지두수)/ 송이송이 꽃이 피면 옅은 묵향이 배인다네.(朶朶花開淡墨痕·개개화개담묵흔)/ 사람들이 자태 예쁘다 칭찬함은 필요 없고(不要人誇好顔色·불요인과호안색)/ 그저 맑은 기운 천지에 가득 남기려 할 뿐이네.(只留淸氣滿乾坤·지유청기만건곤)” 왕면은 매화의 그 밝은 색깔조차 화사함으로 여겨 내친다. 매화의 색까지 담담한 묵흔으로 지웠다. 옛 시인들은 이처럼 치열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겉치레에 대해 경계했다. 지금 한 송이씩 피어나는 지리산 화개동 매화는 3월이면 온 골짜기를 은은하게 수놓는다. 매화의 ‘능한’과 ‘능설지백’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 정신이 읽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