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54> 봄날 발걸음이 더뎌진다는 고려 때 시인 진화의 시

bindol 2022. 6. 1. 14:59

온 강 가득 내리는 봄비 줄기마다 푸르네

 

- 江春雨碧絲絲·일강춘우벽사사



작은 매화 떨어지자 버들가지 어지러이 늘어지는데(小梅零落柳僛垂·소매령락류기수)/ 한가로이 푸른 산기운을 밟노라니 걸음걸음 더디네.(閑踏晴嵐步步遲·한답청람보보지)/ 어부의 집은 문 닫힌 채 사람 소리 없고(漁店閉門人語少·어점폐문인어소)/ 온 강 가득 내리는 봄비 줄기마다 푸르네.(一江春雨碧絲絲·일강춘우벽사사)

위 시는 고려 시대 시인 진화(생몰 미상)의 시 ‘野步(야보·들길을 걸으며)’로, ‘동문선’ 권20에 수록돼 있다. 엊그제와 그제 이틀간 봄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차밭을 덮고 있는 묵은 고사리를 베어내면서 보니 매화가 떨어지고 있었다. 차산 아래 개울에 있는 버들가지가 늘어져 바람에 어지러웠다. 사방을 빙 둘러싸고 있는 지리산은 봄비를 맞아 점점 푸른 기운을 띠어가고 있다.

진화는 이러한 때 들길을 걸으니 걸음이 더뎌진다고 감정을 풀어놓는다. 시인은 대체로 감각이 예민하고 감성이 풍부하다고 한다. 봄기운을 온 몸의 감각으로 느끼니 걸음이 빨라질 수가 없다. 강가 주민도 고기를 잡으러 나갔는지 마을은 사람소리가 들리지 않고 적막하다. 강이 푸르니 그 위에 내리는 빗줄기도 푸르다. 이보다 어찌 봄을 더 잘 만끽할 수 있겠는가. 시 내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진다.

‘고려사’ 열전13에 진화의 할아버지 진준(陳俊) 편이 있다. 여기 보면 “진화는 시를 잘 지었으며, 시어가 맑고 아름다웠다. 젊은 시절 이규보와 이름을 나란히 떨치니, 당시에 ‘이정언(李正言)·진한림(陳翰林)’이라 일컬었다”고 했다. 위 시 역시 맑고 아름다운 시어로 봄비 내리는 풍경을 읊고 있다. 그의 시는 ‘동문선’ ‘동인시화’ ‘기아’ 등에도 실려 있다.

18세기 시인 이규상(李奎象·1727~1799)도 ‘田家行(전가행)’에서 봄날을 읊었다. 전체 4행 중 3, 4행이다. “시골 아낙 역시 봄빛을 사랑할 줄 아나 봐(田婦亦知春色愛·전부역지춘색애)/ 진달래꽃 한 가지를 비녀에 꽂아서 귀가하네(鵑花一朶揷釵歸·견화일타삽채귀)”라고 읊었다. 만물이 아름다운 봄날 시골 아낙의 순박함을 시로 잘 그렸다. 옛 시인들은 현대시 표현기법과 달리 짧은 시구 속에 많은 내용을 담아 독자가 상상 나래를 펼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