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56> 조선 3대 기인 중 한 명인 정렴, 배꽃을 보고 읊다

bindol 2022. 6. 2. 05:28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56> 조선 3대 기인 중 한 명인 정렴, 배꽃을 보고 읊다

 
꽃 무성히 핀 게 지난해와 비슷하네(繁華似昔年·번화사석년)

집 모퉁이에 피어난 배나무(屋角梨花樹·옥각리화수)/ 꽃 무성한 게 지난해와 비슷하네.(繁華似昔年·번화사석년)/ 봄바람이 (나의)오랜 병 애처로운지(東風憐舊病·동풍련구병)/ 약 달이는 창가로 불어오네.(吹送藥窓邊·취송약창변)

위 시는 정렴(鄭磏·1506~1549)의 시 ‘梨花(이화·배꽃)’로, 그의 문집인 ‘북창집(北窓集)’에 실려있다.

시인은 오랜 병으로 자리보전해 있다. 봄이 왔는데도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지 못하는 신세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하얀 배꽃이 가득 피었다. 지난해 봄에도 그렇게 꽃이 무성했다. 바람이 시인 쪽으로 불어 창가에서 약 달이는 내음이 확 끼쳐온다. 봄바람이 처량하게 있는 시인이 애처로워서 원기를 북돋워주려고 그런 모양이다. “여보게, 뭣 하는가. 꽃 지기 전에 얼른 일어나라”고 말이다. 필자가 은거하고 있는 섬진강 변의 배나무 밭에 하얀 물감을 뿌린 듯 배꽃이 만개해 있어 정렴의 위 시가 생각났다. 그의 삶과 시 내용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민했지만 44세로 단명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포천현감에 부임했지만 1545년(명종 즉위년) 부친인 좌의정 정순붕(鄭順鵬·1484~1548)이 윤원형·이기 등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이고 귀양 보내자 사직하고 물러났다. 위 시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세상을 떠나기 전 지은 것으로 보인다.

홍만종은 ‘해동이적(海東異蹟)’에서 정렴을 “유·불·선 삼교(三敎)뿐만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산수(算數) 및 산수화에 능통했는데 스승도 없었고 제자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렴은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분야 및 불교·도교에 정통했고, 그림·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매월당 김시습·토정 이지함과 더불어 조선 3대 기인으로 꼽힌다.

부친의 정치적 삶에 염증을 느낀 그는 도사처럼, 방외인으로 바람처럼 살고자 했다. 산으로 은둔해 살며, 만년에 방술(方術)에 심취했다고 한다. 그는 무병장수를 지향하는 우리나라 최초 도교 수련서인 ‘북창비결(北窓秘訣)’을 지었다. 약의 이치에도 밝아 ‘정북창방(鄭北窓方)’이라는 처방서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