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57> 세종 때 금속활자 주조에 대한 뜻을 밝힌 변계량
이로 말미암아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고
- 조해훈 시인·고전인문학자
- 由是而無書不印·유시이무서불인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공정대왕(恭定大王·태종)께서 이전에 활자를 만드셨는데 지금 우리 주상 전하(세종)께서 뒤를 이어 더욱 치밀하게 조사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니, 문교(文敎)가 날로 진작되고 세도(世道)가 갈수록 마땅히 융성해질 것이다. 재정과 국방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국가의 급선무로 삼았던 한나라와 당나라 임금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이니, 실로 우리 조선에 무한한 복이 될 것이다.
恭惟我恭定大王作之於前, 今我主上殿下, 述之於後, 而條理之密, 又有加焉者. 由是而無書不印, 無人不學, 文敎之興當日進, 而世道之隆當益盛矣. 視彼漢唐人主, 規規於財理兵革, 不啻霄壞矣, 實我朝鮮萬世無疆之福也.(공유아공정대왕작지어전, 금아주상전하, 술지어후, 이조리지밀, 우유가언자. 유시이무서불인, 무인불학, 문교지흥당일진, 이세도이륭당익성의. 시피한당인주, 규규어재리병혁, 불시소괴의, 실아조선만세무강지복야.)
위 문장은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쓴 ‘鑄字跋·주자발’로, ‘동문선’ 권103에 있다. 금속활자를 만든 뜻에 대해 변계량이 간략히 썼다. 그의 문집 ‘춘정집(春亭集)’에는 ‘대학연의주자발(大學衍義鑄字跋)’로 돼 있다.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92년 1월 서적원(書籍院)이 설치돼 활자 주조와 서적 인쇄를 맡았다. 태종이 1403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해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주조하고 서적을 간행했다. 세종이 1420년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해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다. 위 문장의 앞 문장에는 세종이 경자자를 주조한 이야기가 나온다. 변계량은 경자자를 주조한 결과 인쇄하지 못 하는 책이 없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므로 문교가 날로 진작되고 세도가 갈수록 융성해질 것이라 했다. 그럼으로써 세종 대에 그 많은 책이 나왔다. 조선이 문헌의 나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은 금속활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압서사가 매달 여는 인문학 특강에 최근 고서 장정(裝幀)의 장인인 팔령(八嶺) 강안구 선생을 초청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과정에 위 내용이 언급돼 간단히 정리해 봤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공정대왕(恭定大王·태종)께서 이전에 활자를 만드셨는데 지금 우리 주상 전하(세종)께서 뒤를 이어 더욱 치밀하게 조사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니, 문교(文敎)가 날로 진작되고 세도(世道)가 갈수록 마땅히 융성해질 것이다. 재정과 국방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국가의 급선무로 삼았던 한나라와 당나라 임금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이니, 실로 우리 조선에 무한한 복이 될 것이다.
恭惟我恭定大王作之於前, 今我主上殿下, 述之於後, 而條理之密, 又有加焉者. 由是而無書不印, 無人不學, 文敎之興當日進, 而世道之隆當益盛矣. 視彼漢唐人主, 規規於財理兵革, 不啻霄壞矣, 實我朝鮮萬世無疆之福也.(공유아공정대왕작지어전, 금아주상전하, 술지어후, 이조리지밀, 우유가언자. 유시이무서불인, 무인불학, 문교지흥당일진, 이세도이륭당익성의. 시피한당인주, 규규어재리병혁, 불시소괴의, 실아조선만세무강지복야.)
위 문장은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쓴 ‘鑄字跋·주자발’로, ‘동문선’ 권103에 있다. 금속활자를 만든 뜻에 대해 변계량이 간략히 썼다. 그의 문집 ‘춘정집(春亭集)’에는 ‘대학연의주자발(大學衍義鑄字跋)’로 돼 있다.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92년 1월 서적원(書籍院)이 설치돼 활자 주조와 서적 인쇄를 맡았다. 태종이 1403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해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주조하고 서적을 간행했다. 세종이 1420년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해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다. 위 문장의 앞 문장에는 세종이 경자자를 주조한 이야기가 나온다. 변계량은 경자자를 주조한 결과 인쇄하지 못 하는 책이 없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므로 문교가 날로 진작되고 세도가 갈수록 융성해질 것이라 했다. 그럼으로써 세종 대에 그 많은 책이 나왔다. 조선이 문헌의 나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은 금속활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압서사가 매달 여는 인문학 특강에 최근 고서 장정(裝幀)의 장인인 팔령(八嶺) 강안구 선생을 초청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과정에 위 내용이 언급돼 간단히 정리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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