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고전 속 정치이야기] 난정집서(蘭亭集序)

bindol 2022. 6. 10. 05:55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수려한 글자가 뜬구름처럼 유유하다가, 갑자기 놀란 용처럼 꿈틀거리다가 똬리를 틀고 있다. 천하제일행서이자, 왕희지(王羲之)를 서성(書聖)으로 만든 작품 난정집서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글씨는 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영화(永和)9년 3월 3일, 소흥 회계산 뒷자락 난정의 유상곡수(流觴曲水)에서 41명의 명사가 모여 지은 시를 모아 시집을 만들었다. 좌장인 왕희지가 서문을 지었다. 이 작품으로 왕희지는 천하에서 행서 제1인자가 됐고, 난정집서는 최고의 시집이 됐다. 그러나 난정집서의 진품은 당대 이후에 사라졌다. 역사의 기록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천하제일행서는 당태종 이세민의 소릉에 들어있어야 한다. 근세에 고고학자들이 소릉을 열자고 제안했으나, 결국은 무산됐다. 이세민은 유난히 서성의 작품을 좋아했다.

고금의 서예작품을 통틀어도 선(善)과 미(美)가 완비된 것은 왕일소(王逸少)의 작품뿐이라고 평가했다. 점 하나를 끌어당겨 선으로 끌고 나오고, 가득한 안개가 이슬로 맺히는 것 같다. 끊어졌다가 이어지면서 바람을 탄 용이 또아리를 틀기도 한다. 비스듬히 넘어질 것 같다가도 어느새 자세를 바로잡으니, 아무리 오래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하나하나 더 또렷이 떠오르니, 마음도 손도 이미 그를 따라간다. 그러나 난정집서만은 당태종이 차지하지 못했다. 난정집서를 바치면 누구든지 관작과 상을 내리겠다고 선포했다. 모사품을 바치는 사람도 상을 받았다. 당시 난정집서는 왕씨가문에서 대를 이어 전해지다가, 왕희지의 7세손 지영(智永)화상을 거쳐 남북조시대를 건넜다. 후손이 없었던 지영이 제자인 소흥 영흔사(永欣寺) 주지 변재(辨才)에게 물려줬다. 변재는 그것을 깊이 숨겨두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어느 날 영흔사로 떠돌이 스님이 찾아왔다.

그는 채옹(蔡邕), 이사(李斯), 종요(鍾繇) 등의 거작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자존심이 상한 변재는 진장품 난정집서를 그에게 보여줬다. 떠돌이가 급히 손을 씻고 향을 피운 후 난정집서에 절을 올렸다. 떠돌이는 바로 이세민이 파견한 어사 소익(蕭翼)이었다. 난정집서는 황궁을 들어갔다. 이세민이 죽은 후, 천하제일행서는 비단으로 곱게 싸서 옥갑에 넣었다. 이세민의 순장품이 돼 그를 따라 소릉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무측천도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해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다. 황가의 후손들이 소장했던 왕희지의 여러 작품들이 무측천의 손에 들어갔다. 서성의 작품은 각석을 한 후 원래 소장자에게 돌려줬다.

진(晋)의 서예작품은 중국서예사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남은 작품은 많지 않다. 왕희지의 원환첩(遠宦帖), 아들 왕헌지(王獻之)의 중추첩(仲秋帖), 삭정(索靖)의 월의첩(月儀帖), 육기(陸機)의 평복첩(平復帖) 등을 제외하고, 정무(定武)의 난정(蘭亭), 선익(蟬翼)의 난정, 독고장로(獨孤長老)의 난정은 모두 후세인의 모작이다. 진정한 진대의 글씨를 보려면 민간에 산재한 비석을 보는 것이 더 좋다. 소흥출신으로 위대한 문학가였던 노신(魯迅)은 아Q정전의 원형인물인 아계(阿桂)와 자주 골동품을 거래했다. 뒷면에 영화10년 태세(太歲) 갑인(甲寅)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벼루를 구했다. 두부에 쌍어(雙魚)가 있고, 양쪽에 8마리의 물고기가 나란히 줄을 짓는다. 노신은 이 벼루를 일본인 계청(階靑)에게 선물했다.

계청은 이 벼루에 진귀한 보물이라는 글을 새겼다. 노신에게는 진전연(晋큨硯)이라는 명품 벼루 하나가 더 있었다. 뒷면에는 ‘영화9년’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중에 그것을 일본인 무자소로(武者小路)에게 선물했다. 무자소로는 매우 기뻐하며 부강철재(富岡鐵齋)의 그림 한 폭을 답례로 줬다. 소흥 박물관에는 이러한 옛 벼루가 아직도 남아 있다. 거기에 새겨진 태강(太康)7년, 종씨조(鐘氏造), 태흥(太興)4년과 같은 명문(銘文)은 정교하고도 아름다워 진대 글씨의 면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수려한 소흥의 강산을 배경으로 보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