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고전 속 정치이야기] 단판승부(單板勝負)

bindol 2022. 6. 22. 05:03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일본의 전국시대 말기에 활약했던 다께다 신겐(武田信玄)은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었다. 그러나 아들 가쓰요리(武田勝賴)는 아버지의 능력을 이어받지 못했다. 1575년 4월, 가쓰요리는 중원진출의 요로를 장악한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공격하려고 정예군 1만 5000명을 이끌고 나가시노(長蓧)를 포위했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의 연합군 3만 5000명을 이끌고 나가시노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렌꼬가와(連子川)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신겐은 죽었지만 다께다군은 여전히 막강했다. 

1572년 미까다가하라 전투에서 신겐에게 혼이 난 적이 있던 이에야스는 가쓰요리가 뒤를 이은 후에도 도망치기에 바빴다. 노부나가도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장비로 무장했지만, 그의 군대는 대부분 신병이었다. 신겐에게 훈련을 받은 다께다군과 정면으로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노부나가는 비책을 준비했다. 그의 주력부대는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했다. 당시의 전투는 칼, 창, 활 등의 구식무기끼리 격돌하는 양상이었다. 오랫동안 이러한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기 위한 훈련과 실전의 경험이 중요했다. 그러나 총은 무사가 아니라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원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했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은 대부분 미노(美濃)와 오와리(屋張) 일대에서 징집한 농민군이었지만, 단기간의 사격 훈련으로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연합군의 수는 다께다군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그에 비해 다께다군은 기마부대가 주력이었다. 기마전을 펼치려면 넓고 평탄한 지형이 필요했다. 그에 비해 소총부대는 일정한 엄호물이 있어야 했다. 

노부나가는 적의 강점을 무력화시키고 아군의 강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시따라하라(設樂原)의 서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다께다군의 주력인 기마부대를 막기 위해 진지 앞에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가쓰요리가 기마부대로 공격을 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노무나가는 가쓰요리를 유인하기 위해 기습, 고육계, 반간계를 활용했다. 가쓰요리의 가신 간리 신고로오(甘利新五郞)가 노부나가에게 투항했다. 노부나가는 그가 위장투항자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노부나가의 가신 사꾸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신고로오의 앞에서 노부모리를 심하게 꾸짖으며 채찍으로 얼굴을 때렸다. 노려보는 노부모리의 눈초리에는 살기가 비칠 정도였다. 가신들은 노부나가가 너무 심했다고 비난했다. 노부나가 진영 제1선의 좌익인 노부모리는 그날 밤 가쓰요리에게 자신의 진지를 공격하면 내응하겠다고 연락했다. 신고로오는 노부모리가 모욕을 당한 사실을 가쓰요리에게 알렸다. 노부모리군은 노부나가 진영의 핵심이었다. 그의 부대가 마루야마(丸山)에 버티고 있는 한 다께다군은 오른쪽 옆구리에 창이 박힌 꼴이었다. 반대로 노부모리의 부대가 다께다군에게 붙는다면 왼쪽에서 연합군의 진지로 밀고 들어갈 수 있었다. 가쓰요리는 속으로 이겼다고 부르짖었다. 

1575년 5월 16일, 다께다군의 작전회의가 개최됐다. 공격 여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주장인 가쓰요리는 노부모리의 투항을 사실로 인정하고 강공을 펼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오랜 전투 경험을 쌓은 참모들은 적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반대했다. 가문의 흥망이 걸린 중요한 문제인 만큼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심하던 가쓰요리는 공격을 결정했다. 5월 20일, 가쓰요리는 주력을 출격시켰다. 렌꼬가와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했다. 21일은 결전의 날이었다. 다께다군은 이른 새벽에 공격신호를 기다렸다. 갑자기 후방에서 수 백 발의 총성이 울렸다. 노부나가가 간밤에 파견한 이에야스의 가신 사까이 다다쓰구(酒井忠次)가 산위의 다께다군을 기습했다. 후퇴가 불가능했다. 가쓰요리는 이를 악물고 공격명령을 내렸다. 용기는 좋았지만 다께다의 주력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노부나가의 소총부대에 의해 궤멸되고 말았다. 적이 던진 작은 이익에 눈이 멀었던 결과였다.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