健康 常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bindol 2022. 7. 11. 05:06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중앙일보

입력 2022.07.11 00:24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가까운 이들이 세상을 등질 때마다 나이듦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성찰을 안겨준다. 괴테는 바이마르에서 80세가 지나서 『파우스트』를 완성했지만 그 같은 내공은 여간해선 쉽지 않은 일이다. 생의 끝까지 누구나가 오체불만족이 아니길 바라지만 오롯하게 존재의 의지로 일상을 살다 떠나는 것은 절대 녹록지 않다. 자기 몸 하나 지탱할 최소한의 건강도 허락되지 않거나, 신이 내린 가장 가혹한 형벌이라는 기억의 유실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품 안에서 지극히 평온한 모습으로 다음 생을 기약하는 죽음을 꿈꾸지만, 대개는 질환의 고통 속에서 병원 혹은 낯선 요양원에서 속절없이 생을 마감하는 노인들이 점차 늘고 있는 통한의 현실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늙음에 만족할 때 늙음을 지탱할 수 있지만, 그 반대라면 늙음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된다’고 했으니 삶의 형편에 따른 늙음의 삶의 질은 시대를 구분하지 않았나 보다.

긴 병에 효자 없다. 먹고사는 일들로 척박한 경쟁 사회 속에서 아픈 부모를 부양할 자식들의 고단함을 배려한다면, 나아가 의학적으로 전문적인 치료나 호스피스의 심리적 도움을 받는 것이 부모에게는 더 평안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가족의 품을 떠나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마감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먹먹한 일이다. 엄마를 떠올리며 ‘모란이 지면 작약이 온다’하던 어느 시인의 쓸쓸한 희망과 달리 몇 년씩 기약 없는 질병과 씨름하며 온 가족이 간병에 매달리다 보면 힘들어 지치고 종국에는 우울증을 앓기도 한다. 가족 간의 불화도 잦아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초고령사회 진입 눈앞에 둔 한국
요양병원 환자 서비스는 획일적
요양병원 진료기능 개편·강화해
노인에 대한 국가의료 강화해야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작가 김훈은 최근 “나는 ‘너’와 ‘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우리’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우리’라는 단어를 너무나 자주 너무나 쉽게 너무나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부모를 통하지 않는 ‘우리’가 있을까. 가족의 탄생이 가능할까. ‘우리’라는 단어의 테두리에 언제부터인가 자식의 존재보다 부모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리사랑이라지만 우린 이기적이다.

매서운 겨울 서산에 가파르게 지는 해처럼 우리의 고령화 속도는 OECD 회원국 중 으뜸이다. 고령사회 진입 속도는 프랑스 115년, 미국 73년, 독일 40년, 일본은 24년인 것에 반해 우리는 17년이라는 매우 짧은 시간에 도달했다. 더더욱 암울한 문제는 초고령사회 진입에는 이보다 더 빠른 7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동체 나이의 무게에 한국 사회의 숨이 턱 하니 차오른다.

고령화는 결국 요보호대상 노인 인구의 증가를 의미한다. 독거노인의 수는 급속하게 늘고 있으며 자식이 있으나 부양할 여력이 없거나 후안무치한 불효 앞에 방치된 노인들은 또 그 얼마인가. 그 누구도 비켜가기 힘든 늙음의 순리 앞에서 국가와 사회의 역할은 막중해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제기는 있으나 이를 해결할 정책은 요원하다. 언론에서는 연일 요양병원에서의 노인인권 문제와 시설 및 식사의 열악한 문제가 쏟아져 나온다. 요양병원 수와 진료비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입원 환자군에 대한 의료 서비스는 획일적이다. 요양병원 대상 환자군을 구분하고, 그에 따른 적합한 의료 서비스가 제공돼야 하지만 노인을 위한 요양 정책은 여전히 답보상태다.

고령사회 의료의 현실적 대안이 되어버린 요양병원의 진료기능 강화에 다수가 공감하고 있지만 국가의 정책은 더디기만 하다.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요양병원 기능 개편을 해야 한다. 그것이 근대화 시절, 국가와 가족을 위해 죽도록 일만 하다 속절없이 고령이 된 노인을 위한 나라의 당연한 책무이다.

가뭄 속 갈라진 논 마냥 골진 피부의 주름은 나이듦의 표상이다. 제 몸 간수하기도 힘겨운 육신의 마모다. 그러나 이보다 더 서글픈 일은 움켜쥔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세월 앞에서의 무기력함이다. 내면의 혼란을 수습할 시간도 없이 부모와의 풍경은 여백이 없다. 나무처럼 생과 죽음 사이의 이층이 굳어지면 잎은 잡아맨 가지를 놓아 버리고 하늘을 향해 애절하게 날아갈 것이다. 그 누가 예외가 있겠는가.

적어도 나이 들어 아픈 노인이 외로움 속에 당면한 질환의 의료 서비스조차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 노인의료 서비스의 수요는 날이 갈수록 증가할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세금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