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죽이는 미술관?
“아, 이건 좀….”
전남도립미술관이 난데없는 동물 학대 논란에 휘말렸다. 링거팩에 금붕어를 한 마리씩 넣고 밀봉해 매단 뒤 서서히 죽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출품작(‘Fish’) 때문이다. 전시 개막 열흘 만에 금붕어 15마리 중 5마리가 폐사했다. 일부 시민에게서 “잔인하다” “남녀노소 보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고, 동물보호 단체까지 가세했다. 미술관은 결국 금붕어를 모두 회수했다.
예술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건 때로 터무니없는 일처럼 보인다. 특히 전복과 충격을 기치로 삼는 현대미술에서는 더욱더. 그러나 미술관이 9월까지 여는 이번 기획전 주제가 ‘애도’라는 점에서 이번 살생(殺生)은 논리적 타당성이 결여돼 있다. 죽음·이별 등의 상실을 삶으로 승화하는 작품을 선보인다는 기획 취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자기모순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Fish’를 만든 유벅(64·본명 유성일) 작가는 본지 통화에서 “매일같이 어획하면서도 죽어가는 금붕어는 안타까워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드러내려 했다”면서 “도덕성을 지적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 너머를 봐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동물을 활용해 메시지를 던지는 현대미술 작품은 많다. 영국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는 2012년 런던 전시장에 나비 수백마리를 풀었다. 전시 기간 5개월 동안 꽃과 과일이 비치된 전시장에서 알을 낳고 죽고 또 부화하는 나비를 통해 생명의 순환을 은유한 작품(‘사랑의 안과 밖’)이다. 2018년에는 이강소 작가가 서울 전시장에 닭을 풀어놓고 바닥에 발자국을 찍게 하는 퍼포먼스(’무제 75031′)를 진행했다. 두 전시 모두 동물단체의 반발을 불렀으나 이번 소동과는 결이 다르다. 최소한 밥은 줬고, 죽음을 강제하지 않았다.
죽음을 표현하는 것과 실제로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물론 금붕어는 저등생물로 간주되고, 횟집만 가도 저보다 심한 참혹은 널렸다. 그러나 미술관과 횟집은 달라야 한다. 한 네티즌은 “표현의 자유가 한 존재의 생명권을 앞선다는 오만함”을 지적했다. 이번 논란은 공공미술관에 요구되는 더 예민한 감각을 역설한다. 미술관은 작품으로 그 사회의 민도(民度)를 드러내는 곳이고, 우리가 목도하는 대부분의 재앙은 “금붕어쯤…”과 같은 윤리적 빈틈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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