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庸

<제2장>

bindol 2022. 7. 27. 05:19

 

<제2장>

仲尼曰君子 中庸 小人 反中庸

 

 

仲尼曰君子(중니왈군자)는 中庸(중용)이요
小人(소인)은 反中庸(반중용)이니라

중니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중용이요
소인은 중용에 맞선다.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君子之中庸也(군자지중용야)는
君子而時中(군자이시중)이요
小人之反中庸也(소인지반중용야)는
小人而無忌憚也(소인이무기탄야)니라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때에 알맞게 하고
소인이 중용에 맞서는 것은
소인으로서 기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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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君子中庸 小人反中庸

 

仲尼曰: “君子中庸, 小人反中庸1.

중니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中庸을 하고 소인은 中庸을 거스른다.

 

中庸者, 不偏不倚, 無過ㆍ不及而平常之理, 乃天命所當然2, 精微之極致也. 唯君子爲能體之,

小人反是.

중용이라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과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으로

평상의 이치다. 그래서 천명의 당연한 것으로, 정일하고 은미함의 극치다. 오직 군자는

그것을 체득할 수 있지만, 소인은 이것에 반대가 된다.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군자가 中庸을 함은 군자로서 때로 맞게 하는 것이요. 소인의 中庸이란 소인으로서 기탄이

없는 것일 뿐이다.”

 

「王肅」本, 作’小人之反中庸也‘, 程子亦以爲然. 今從之3.

「왕숙」본에선 ‘小人之反中庸也’라가 쓰여 있는데, 정자께선 또한 그러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걸 따른다.

 

○ 君子之所以爲中庸者, 以其有君子之德, 而又能隨時以處中也. 小人之所以反中庸者,

以其有小人之心, 而又無所忌憚也.

군자가 중용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군자의 덕이 있고 또한 때에 따라 中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인이 반중용을 하는 까닭은 소인의 마음이 있고 또한 꺼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蓋中無定體, 隨時而在, 是乃平常之理也. 君子知其在我, 故能戒謹不睹ㆍ恐懼不聞, 而無時不中.

小人不知有此, 則肆欲妄行, 而無所忌憚矣.

대저 중용엔 정해진 형체가 없어 때에 따라 있는 것이니, 이것이 곧 평상의 이치다.

군자가 나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것에서

두려워하니, 때마다 中하지 않음이 없다. 소인은 이것을 알지 못해 욕망을 방자히 하고

행동을 망령되이 하여 꺼리는 것이 없는 것이다.

 

『荀子』 「不苟」曰: “凡人之患, 偏傷之也. 見其可欲也, 則不慮其可惡也者; 見其可利也,

則不顧其可害也者. 是以動則必陷, 爲則必辱, 是偏傷之患也.

『순자』「불구」편에서 “사람의 근심은 치우쳐 상하는 데에 있다. 하고자 하는 것을 보면 안

좋아질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이익이 될 만한 것을 보면 해가 될 만한 것을 고려하질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움직이면 반드시 함정에 빠지며, 행위를 하면 반드시 욕받이가

되니, 이것이야말로 치우쳐 상하는 근심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右第二章. 此下十章, 皆論中庸以釋首章之義. 文雖不屬, 而意實相承也.

 

오른쪽은 제2장이다. 이 이하 10장은 다 중용을 이야기하며 1장의 뜻을 푼 것이다.

문맥이 비로 이어지지 않으나 문장의 뜻은 실제로 서로 이어진다.

 

變和言庸者, 游氏曰, “以性情言之, 則曰‘中和’; 以德行言之, 則曰‘中庸’.”

是也. 然中庸之中, 實兼中和之義.

‘和’를 바꿔 ‘庸’으로 말한 것은 유씨가 “성정으로 그것을 말하면 ‘中和’이고, 덕행으로 그것을

말하면 ‘中庸’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中庸의 中은 실제로 中和의 뜻까지 겸하고

있다.

 

주자 주를 보면 王肅(195~256 삼국시대 魏에서 벼슬을 함, 字는 子雍)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王肅이란 사람은 當代에 일가견을 가지고 금고문 논쟁에 참여했던 대학자입니다.

노자에 주를 단 王弼(226~249, 字는 輔嗣, 삼국시대 魏)과 먼 친척이죠. 그 王肅本에는

‘小人之中庸’의 사이에 反자가 들어가서 ‘小人之反中庸’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구태여

反자를 넣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 구절의 ‘小人反中庸’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냥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仲尼는 공자의 字이고 丘는 이름입니다.

중니라는 字로써 공자를 칭했다는 것은 친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집안사람들이 인용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방편적 二分, 우주적 실체로의 二分

 

앞 1장에서는 中和思想이 나왔는데, 2장에서 갑자기 中庸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삶은 항상 평범하게 보입니다. 뭔가 자극적이고 흥분되는 일이 있을 수 없어요. 지루함이 일상화 된 것만 같은 이런 상태를 소인들은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中庸을 하지만 소인은 反中庸을 하지요. 여기서 中庸은 동사적으로 쓰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군자와 소인의 매우 명백한 이원론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동양에는 이원론이 없다고 하는 것은 헛소리 입니다. 모든 논의의 전개에 있어서 이원론적인 대립이 없으면 논리가 전개되지 않아요. 군자가 있으면 소인이 있고, 선인이 있으면 악인이 있어야 되고, 道가 있으려면 非道가 있어야 됩니다. 今古의 대비라든가 君子·小人의 대비는 모두 동일한 이원론적인 논법입니다. 군자와 소인의 문제는 이미 『論語』에 잘 쓰였던 이분적 논리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논리전개상의 방편적 二分과 우주의 실체로서의 二分은 좀 다른 문제라는 것만 기억해 두세요.

 

時中이라는 상황성에 대해

 

여기서 ‘時中’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항상 상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약속 어기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어느 날 다리 밑에서 애인을 만나기로 했는데, 마침 그때 폭우가 내려서 갑자기 물이 쏟아지듯 밀려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약속을 지키겠다고 용감하게 계속 그 자리를 지키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尾生之信). 이것이 과연 中庸일까요?

인간의 행위에는 반드시 ‘상황성’이 있고, 그 상황성은 ‘시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中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중간Middle의 개념이 아니예요. 아리스토텔레스의 ‘Golden mean4’이라는 것을 버틀란트 럿셀이 웃기는 얘기라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아고라에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으로 사람들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용기가 무엇인가?”, “무서운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도 용기냐?”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문답을 통해서 자기가 알고 있었던 것이 무지스러웠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인데 문답법의 과정도 中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무지를 자각해 가는 과정을 근세에 헤겔은 변증법으로 설명했습니다. 자기가 처음 생각했던 것이 正이고 거기 새로운 질문으로 反이 주어지며 그 안티테제에 대해서 ‘아! 그것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아서 正도 反도 아닌 신테제(synthesis: 合)로 가게 되는 것을 변증법Dialectic이라고 합니다. Dialogue와 다이알렉틱은 어원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란 만용과 비겁의 ‘골든 민’이라고 했는데, 매우 그럴 듯한 것 같지만 너무도 유치한 말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덕목에 기하학적인 中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L.A시장의 퇴임연설에서 “나는 시장 재임기간 동안에 정직Honesty과 부정직Dishonesty의 중도를 걸어왔다5”는 말을 했는데, 럿셀이 이것을 인용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中庸論을 비꼬았습니다. 그 말은 깡패들하고 적당히 해쳐먹고 살았다는 말밖에 안 되는 거예요.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中은 기하학적인 직선상의 가운데가 아니고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입니다. 즉 변화하는 세계에서 기하학적 발란스가 아닌, 동적 평형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죠.

 

 

중용의 다양한 예

 

손가락 끝에서 어떤 물체를 올려놓고서 중심을 잡는다는 것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물체의 중심이 잡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썩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농구선수가 손가락 끝에서 공을 돌릴 때 손가락 끝이 미세하지만 공의 무게 중심을 따라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동적 평형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동질성Equality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이퀄리티는 순간의 이상적인 관념일 뿐이에요. 이퀼리브리엄이 존재하는 것은 이질성Inequality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불급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죠. 과불급이 있기 때문에 中庸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것이고, 여기서 과불급에 대한 비판은 과불급이 평형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벗어나는 상태에서 생깁니다. 이퀼리브리엄의 상태는 특정한 포인트로 표시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변화의 진동 폭은 필연적인 거예요. 그러나 정도를 지나치면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치달아 버리고 그게 곧 中庸의 상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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