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庸

<제1장>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bindol 2022. 7. 27. 05:27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이요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요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니라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에 따름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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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

 

天命之謂性,

하늘이 명한 것, 그것을 性이라고 말하고,

 

命, 猶令也. 性, 卽理也.

命은 令과 같다. 性은 곧 理다.

 

天以陰陽ㆍ五行化生萬物,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낳아 기름에

 

氣以成形, 而理亦賦焉, 猶命令也.

氣는 형체를 만들고, 理 또한 부여 받으니, 명령을 받은 것과 같다.

 

於是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이에 사람과 사물이 태어남은 각각 그 부여받은 理를 얻음에 따라

 

以爲健順ㆍ五常之德, 所謂性也.

건순과 오상의 덕을 삼았으니, 이것을 性이라고 말한다.

 

 

率性之謂道,

性을 따르는 것, 그것을 道라 말하며,

 

率, 循也. 道, 猶路也.

率은 따른다는 것이다. 道는 路와 같다.

 

人物各循其性之自然, 則其日用事物之間,

사람과 사물은 각각 그 본성의 자연함을 따르니, 일용 사물의 사이에

 

莫不各有當行之路, 是則所謂道也.

각각 마땅히 가야만 할 길이 아님이 없으니, 이것을 道라고 말한다.

 

 

脩道之謂敎.

道를 닦는 것, 그것을 가르침이라 말한다.

 

脩, 品節之也. 性ㆍ道雖同,

脩는 그것을 품절한다는 것이다. 性과 道는 비록 같으나,

 

而氣稟或異,

기질의 품부 받은 것에 따라 혹 다르기 때문에

 

故不能無過ㆍ不及之差.

지나침과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없을 수 없다.

 

聖人, 因人物之所當行者而品節之,

성인은 사람과 사물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따라 그것을 품절하여

 

以爲法於天下, 則謂之敎.

천하를 본받으니, 이것을 ‘敎’라고 말한다.

 

若禮樂刑政之屬, 是也.

예악형정의 부류와 같은 것들이 이것이다.

 

蓋人知己之有性,

대저 사람이 자기가 소유한 성을 알지만

 

而不知其出於天;

그것이 하늘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知事之有道,

일마다 도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而不知其由於性;

그것이 본성에서 유래한 것을 알지 못하며,

 

知聖人之有敎,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而不知其因吾之所固有者裁之也.

그것이 나의 고유한 것을 따라 재제해야 함을 알지 못한다.

 

故子思於此, 首發明之,

그렇기 때문에 자사는 이것을 처음에 드러내 밝혔으니,

 

而董子所謂道之大原出於天,

동중서의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배출되었다’는 말이

 

亦此意也.

또한 이런 뜻이다.

 

○ 『中庸纂疏』卷一曰: “蓋人之所以爲人, 道之所以爲道,

『중용찬소』에 “대저 사람이 사람 된 까닭과 도가 도 된 까닭과

 

聖人之所以爲教, 原其所自,

성인이 가르치려는 까닭을 그 유래한 것에서부터 파고들어 가면

 

無一不本於天而備於我.

하늘에 근본하고 나에게 갖춰지지 않음이 없다.

 

學者知之則,

그러니 배우는 사람이 그걸 안다면,

 

其於學知所用力, 而自不能已矣.

그 배움에 힘을 쓸 줄을 알아 스스로 그만 둘 수 없다.

 

故子思於此首發明之,

그렇기 때문에 자사는 이것을 처음에 드러내 밝힌 것이니,

 

讀者宜深體而黙識也.”

읽는 자는 마땅히 깊이 체득하여 묵묵히 알아가야 한다.

 


2.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道也者(도야자)는
不可須臾離也(불가수유이야)니
可離(가리)면
非道也(비도야)라

<도>라고 하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닌 것이다.



是故 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是故(시고)로 君子(군자)는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불도)하며
恐懼乎其所不聞(공구호기소불문)이니라

이러하므로 군자는
그가 보여지지 않는 곳을 조심하며
그가 들리지 않는 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莫見乎隱(막견호은)이며
莫顯乎微(막현호미)니

숨기는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故 君子 愼其獨也

 

 

故(고)로 君子(군자)는
愼其獨也(신기독야)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그가 홀로 있음을 삼가는 것이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喜怒哀樂之未發(희노애락지미발)을
謂之中(위지중)이요
發而皆中節(발이개중절)을

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은 것
이것을 <중>이라 하고
나타나 모두 절도에 맞은 것을 <화>라고 한다.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謂之和(위지화)니
中也者(중야자)는
天下之大本也(천하지대본야)요
和也者(화야자)는
天下之達道也(천하지달도야)니라

이것을 <화>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라고 하는 것은
천하가 도에 달한 것이다.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致中和(치중화)면
天地位焉(천지위언)하며
萬物育焉(만물육언)이니라

<중>과 <화>에 이르면
천지가 여기에 자리잡고
만물이 여기서 자라나는 것이다.

 

 

1장-2.  (愼獨)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道者, 日用事物當行之理,

도라는 것은 일용 사물의 마땅히 행해져야할 이치로

 

皆性之德而具於心, 無物不有,

다 性의 덕이며 마음에 구비되어 물건마다 소유되지 않음이 없고

 

無時不然, 所以不可須臾離也.

언제든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若其可離, 則豈率性之謂哉!

만약 도가 떠날 수 있다면 어찌 性을 따르라고 말할 수 있으랴!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이런 이유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是以君子之心常存敬畏, 雖不見聞,

이런 이유로 군자의 마음은 항상 경외감을 지녀 비록 보고 듣지 못했을지라도

 

亦不敢忽, 所以存天理之本然,

또한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아 천리의 본연함을 보존하여

 

而不使離於須臾之頃也.

잠깐 사이에 떠나지 않게 해야 한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숨겨진 것보다 드러나는 게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나타나는 게 없기 때문에 군자는 홀로됨에

삼가는 것이다.

 

隱, 暗處也. 微, 細事也.

隱은 어두운 곳이다. 微는 작은 일이다.

 

獨者,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

‘獨’이란 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나만 홀로 아는 곳이다.

 

言幽暗之中, 細微之事,

그윽하고 어두운 중에 작은 일 가운데에

 

跡雖未形而幾則已動,

자취가 비록 드러나지 않아도 기미가 이미 발동된 것이니

 

人雖不知而己獨知之,

사람들이 비록 알지 못하고 나만 홀로 알더라도

 

則是天下之事無有著見明顯而過於此者.

이것은 천하의 일로 훤히 드러나며 밝게 나타나서 이보다 지나친 것이 없다.

 

是以君子旣常戒懼,

이런 이유로 군자는 이미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함으로

 

而於此尤加謹焉.

이에 더욱 삼감을 더하는 것이다.

 

所以遏人欲於將萌,

인욕이 장차 자라날 것을 막아야 하는 까닭은

 

而不使其潛滋暗長於隱微之中,

은미한 중에 잠기듯 불어나고 은근히 자라나

 

以至離道之遠也.

도에서 떠남이 멀어짐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1장 - 3.

 

1장-3. 중화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희ㆍ노ㆍ애ㆍ락이 발동되지 않은 것을 ‘中’이라고 하고 발동되어 다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 한다. 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통달한 도다.

 

喜怒哀樂, 情也. 其未發, 則性也.

희노애락은 情이다. 발동되지 않은 것은 性이다.

 

無所偏倚, 故謂之中.

치우쳐지고 기울어지는 것이 없는 것을 ‘中’이라 하고,

 

發皆中節, 情之正也,

발동되어 다 절도에 맞으니, 情의 바름으로

 

無所乖戾, 故謂之和.

어그러짐이 없는 것을 ‘和’라 한다.

 

大本者, 天命之性,

大本이라는 것은 천명의 성으로,

 

天下之理皆由此出, 道之體也.

천하의 이치가 다 이로부터 나오니, 道의 본체다.

 

達道者, 循性之謂,

達道는 性을 따름을 말하니,

 

天下古今之所共由, 道之用也.

천하고금에 공유하는 것으로 道의 쓰임이다.

 

此言性情之德, 以明道不可離之意.

이것은 성정의 덕을 말하여 ‘도가 떠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화가 지극하면 천지가 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진다.

 

致, 推而極之也.

致는 미루어 지극히 하는 것이다.

 

位者, 安其所也.

‘位’란 있는 곳에서 편안하다는 것이다.

 

育者, 遂其生也.

‘育’은 태어난 것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自戒懼而約之,

경계하고 두려워함으로부터 요약하여

 

以至於至靜之中無所偏倚,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치우치고 기울어짐도 없는

 

而其守不失, 則極其中而天地位矣.

지킴을 잃지 않는 데에 이르면 中을 지극해지고 천지가 자리 잡는다.

 

自謹獨而精之,

홀로됨을 삼감으로부터 정밀히 하여

 

以至於應物之處無少差謬,

물건에 응하는 곳에 조금도 어긋남과 오류가 없어

 

而無適不然, 則極其和而萬物育矣.

가는 곳마다 그렇지 않음이 없음에 이르면 和가 지극해지고 만물이 길러진다.

 

蓋天地萬物, 本吾一體.

대저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하나의 몸이다.

 

吾之心正, 則天地之心亦正矣;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또한 바르고,

 

吾之氣順, 則天地之氣亦順矣.

나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 또한 순해진다.

 

故其效驗, 至於如此.

그렇기 때문에 공효의 체험이 이와 같음에 이르는 것이다.

 

此學問之極功, 聖人之能事,

이것이 학문의 지극한 공이고, 성인의 능한 일로,

 

初非有待於外, 而修道之敎亦在其中矣.

애초에 외물을 기다릴 게 없이 ‘修道’의 가르침이 또한 그 가운데 있다.

 

是其一體一用, 雖有動靜之殊,

이것은 하나의 체와 하나의 용이 비록 움직이고 고요함이 다르지만

 

然必其體立而後用有以行,

반드시 체가 선 이후에 용이 행해지면

 

則其實亦非有兩事也.

그 실제는 또한 두 가지 일이 아닌 것이다.

 

故於此合而言之, 以結上文之意.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합하여 그것을 말함으로 윗 문단의 뜻을 결론지었다.

 

右第一章.

오른쪽은 제 1장이다.

 

子思述所傳之意以立言:

자사께서 전하신 뜻을 기술함으로 입론을 삼아

 

首明道之本原出於天而不可易,

처음엔 도의 본원이 하늘에서 나와 바꿀 수 없다는 것과

 

其實體備於己而不可離,

실체가 자기에게 갖춰져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밝히셨고

 

次言存養ㆍ省察之要,

다음은 존양과 성찰의 요체를 말하셨으며,

 

終言聖神功化之極.

끝에는 성신의 공적인 교화의 극치를 말씀하셨다.

 

蓋欲學者於此反求諸身而自得之,

대저 배우는 사람은 이에 도리어 자신의 몸에서 구하여 스스로 얻어

 

以去夫外誘之私, 而充其本然之善.

외부 유혹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본연의 선을 채우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楊氏所謂一篇之體要, 是也.

楊時가 ‘한 편의 요체다’라고 했던 것이 이것이다.

 

其下十章, 蓋子思

이 아래로 10장은 대개 자사께서

 

引夫子之言, 以終此章之義.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1장의 뜻을 맺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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