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동 교수의 新經筵

‘혼魂백魄’ 초청하는 제사 다시 만나는 부모 마음

bindol 2022. 9. 28. 06:39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에 있는 한 종가 며느리들이 제사에 쓸 놋그릇을 볏집으로 닦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귀성·귀경전쟁이 벌어진다. 10시간 넘게 걸려도 우린 고향으로 향한다. 도로는 한바탕 몸살을 앓는다. 그래도 우리는 추석명절을 챙긴다. 왜 그럴까.

그 중심에 제사가 있기 때문이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와 친척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사에 참여하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제사 때문에 여러 복잡한 일이 일어난다. 며느리는 기독교 신자, 시어머니는 불교 신자인 가정에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제사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고, 며느리는 한사코 거부한다. 이 때문에 불거지는 갈등이 이만저만 아니다. 또 여러 형제 중에서 장남이 교회에 다니면 영락없이 제사 문제 때문에 가족 간에 불화가 일어난다. 제사가 너무 많은 가정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도 제사를 꼭 지내야 하느냐 하는 반응도 있다. 조상의 신령이 직접 와서 제사상의 음식을 먹는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때문에 제사는 우상숭배나 미신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제사는 생기충전의 기회

제사의 본래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우리 민족은 50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줄기차게 제사를 지내왔을까.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제사의 기능은 다음 네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제사는 생기충전(生氣充電)의 기회다. 사람들의 삶은 경쟁으로 인한 긴장의 연속이다. 긴장이 계속되면 피곤해서 견디기 어렵다. 가끔 그 긴장을 풀어줘야 한다. 긴장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다. 부모는 경쟁 상대가 아니다. 부모를 만나면 긴장이 풀린다. 부모를 만나 긴장을 풀면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다시 얻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안 계시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부모가 안 계시면 생기를 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럴수록 더욱 외롭고, 더욱 그립고, 더욱 보고 싶어진다. 이런 문제를 풀어줄 해결책을 찾아낸 것이 바로 제사다. 제사는 부모와 만나는 자리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반문할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를 만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사람들은 종종 돌아가신 부모의 사진을 꺼내 본다. 사진은 종이에 불과하다. 그 종이에 생전 부모의 얼굴이 박혀 있다 하더라도 실제 부모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므로 의미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진을 보는 순간은 부모와 만나는 시간이다. 그 만남은 마음에서의 만남이다. 부모와의 만남은 언제나 가능하다.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부모는 부모의 몸이 아니다.

‘장자(莊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가 일찍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목격한 일이다. 돼지새끼들이 죽어가는 어미돼지의 젖을 빨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그 새끼들이 순식간에 모두 그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 까닭은 그 어미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이를 본 공자는 말했다.

“돼지새끼들이 그 어미를 사랑한 것은 그 몸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 몸을 부리는 것을 사랑한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부모를 그리워할 때는 그 몸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몸을 그리워한다면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을 방부처리해서 계속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부모의 몸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운 것은 부모의 마음이다. 그런데 부모도 사람이기 때문에 부모에게도 두 마음이 있다. 본심과 욕심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참으로 그리운 것은 부모의 본심이다. 본심은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한마음이다. 한마음에서는 남과 나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 마음은 욕심에 가려져 잘 나타나지 않지만, 자녀를 대하는 부모에게서 가장 잘 나타난다.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은,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고, 석가모니가 말하는 자비(慈悲)이며, 예수가 말하는 사랑이다. 사람들이 부모를 좋아하는 것은 그 마음 때문이다. 그 마음은 천지에 가득한 하늘의 마음이고, 우주에 가득한 우주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부모의 몸이 돌아가신 뒤에도 우주에 가득하다. 그 마음은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그 마음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만날 수 있다. 하느님에게서 받는 사랑과 부모에게서 받던 사랑은 일치한다.

祭如在, 祭神如神在

부모의 사랑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사진을 꺼내서 보는 것도 좋지만, 옛날에는 사진이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제사다. 옛사람들은 부모가 돌아가신 날을 부모와 만나는 날로 정했다. 부모의 제사를 지낼 때 공자는 부모와 만났고,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논어(論語)’ 팔일편(八佾篇)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자가 조상을 제사 지내실 때는 조상이 앞에 계시는 것처럼 하셨고, 천신이나 산천의 신을 제사 지내실 때는 신이 앞에 있는 것처럼 하셨다(祭如在, 祭神如神在).”

조상이 앞에 있는 것처럼 하셨다는 것은 없는데 있는 것처럼 했다는 뜻이 아니다. 공자가 제사 지내는 모습을 보는 사람의 눈에는, 공자 앞에 조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적었을 뿐이다. 물론 공자의 앞에 조상의 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자는 조상의 몸을 만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만난 것이다. 부모를 만나 생전처럼 부모의 사랑을 듬뿍 느끼는 것, 그것이 제사를 지내는 가장 중요한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