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新朝鮮'수난사

bindol 2022. 10. 13. 16:55
조선일보 | 오피니언
[이규태코너] '新朝鮮'수난사
 
입력 2004.07.07 18:45:34 | 수정 2004.07.07 18:45:34

일제 탄압 속에서 산고(産苦) 끝에 탄생했다가 종적을 감추었던 종합잡지 ‘신조선(新朝鮮)’ 창간호가 77년 만에 발견되었다. 창간호의 목록만이 당시 신문에 보도되었을 뿐 실물이 없어 한국언론사에서 증발할 뻔했던 민족문화재다. ‘신조선’이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해보자. 이 창간호를 발행한 날이 1927년 2월 10일이다. 당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노선으로 갈라져 있던 국내의 민족운동을 통합전선으로 발족한 것이 신간회(新幹會)요, 그 신간회가 발족한 것이 1927년 2월 15일이고 보면 ‘신조선’과 신간회는 탄생이 같다. 곧 ‘신조선’은 통합민족전선인 신간회의 기관지로 기획됐을 것이 자명해진다. 더욱이 신간회 회장이 이상재(李商在) 조선일보 전 사장이요, 발기인이 조선일보 사장인 신석우(申錫雨)이며, 총무가 조선일보 주필인 안재홍(安在鴻)일 뿐 아니라 신간회 지방조직이 조선일보 지사 지국을 뼈대로 이루어졌던 것으로만 미루어 봐도 ‘신조선’의 사상적 성격이 부각된다. 그것을 두고보고 있을 총독부가 아니요, 창간을 방해했을 단적인 증거로 그 창간호가 잡지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조선일보’ 2305호 부록으로 표지도 없는 기구한 몰골이었음을 들 수 있다. 그 후 탄압으로 5년이 지난 1932년에야 제3호가 속간되었으니 격년간(隔年間)이라는 기구한 잡지가 되고 말았다. 속간 명분은 조선일보 4000호 발행 기념이었다. ‘조선신문사상 특기할 만한 4000여호의 역사를 가진 조선일보와 4000여년 장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민중’을 조선민족문화로 결속하는 수단으로 속간 명분을 삼았다. 그 짧은 속간사마저도 검열로 41자와 35자 두 군데 삭제를 당하고 있다. 조선 남녀가 뚫어질 듯 앞을 노려보며 험한 바다에서 조종간을 돌리는 그 속간호 표지에서부터 자극 받았음인지 신조선은 잠적하고 3년 후 백조가 험한 산맥을 넘는 표지의 ‘조광(朝光)’ 창간호로 명맥을 잇는다. 당시 잡지사상 가장 많은 408면이라는 면수에 가장 많은 120명이라는 필자를 동원, 74면이라는 가장 방대한 특집으로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그 특집이 ‘신라 천년’이었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