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한중 국경선

bindol 2022. 10. 13. 16:21

[이규태코너] 한중 국경선

조선일보
입력 2004.07.09 18:33
 
 
 
 

18세기 초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유럽판 지도에 한·중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라 그 강에서 100~200리 북쪽으로 올라가 그려져 있어 국경선을 둔 논란의 불씨가 될 것 같다.

국경을 가르는 성에는 토성(土城) 전성(?城) 석성(石城)이 있고, 통나무를 엮어 잇는 책성(柵城)이 있다. 그 지도에 표시된 국경선은 당시 발해만에서 시작 동해까지 이르는 2000여리의 책성을 따라 그은 것이다. 이 책성 이남은 청나라에서 공인한 한국영토요, 얼마 전에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고구려 유적들이 집결돼 있는 지안(集安) 환런(桓仁)을 포함한 간도지방은 한국영토였다는 물증이기도 하다.

연행기록들에 보면 압록강과 책성 간의 완충지대에는 피인(彼人)으로 불리는 야인들이 사냥을 하며 토굴에서 살고 있었다. 평안도에서는 피인이 왔다하면 울던 아기가 울음을 멈추었고, 계집아이 꾸짖을 때 피인한테 시집보낸다고 을렀던 바로 그 피인이다. 이 책성에 난 가장 큰 책문(柵門)이 압록강에서 120리 북쪽 국경마을에 있는 고려문(高麗門)이다. 중국에서 변방에 있다해서 변문(邊門)으로 불리기도 한 이 마을 지명이 고려문인 것도 책문에서 비롯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고려문이 나있는 산도 고려산이요, 많이들 기르고 있는 오리도 고려압(高麗鴨)이며, 그 고려문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들국화도 고려국(高麗菊)이라 했다. 연암(朴趾源)이 이곳을 지나갈 때 집이 20~30채였다 했는데, 8년전 가보니 2000여호가 들어선 국경도시가 돼 있었으며, 조선 사행들이 유숙했다던 각씨루(却氏樓)의 후손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고 들었다. 40여호의 조선인촌이 이곳에 형성돼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피로인(被虜人)들 수용소가 이곳에 있었고, 그 후손들이 한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것이라 한다.

 

이처럼 한·중 간 완충지대를 사대(事大)하는 조선의 열세를 기화로 18~19세기에 야금야금 저희네 땅으로 가로챈 것이며, 우리 조정의 불찰도 있긴 하지만 고구려를 둔 역사 강도질을 당하고 있는 작금 이 국경의 원상복구를 국가차원에서 제기해야 한다고 본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