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11> 세종이 사가독서 위해 독서당 세운 뜻 적은 조위(曺偉)

bindol 2022. 10. 21. 17:05
만 리 길을 가려는 사람은 화류마와 녹이마 같은 좋은 말을 미리 찾아서 반드시 꼴과 콩을 배불리 먹이고 안장과 고삐를 정돈한 후에야 연나라나 초나라처럼 먼 곳에 갈 수 있다.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이 뛰어난 인재를 미리 기르는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이것이 독서당을 세운 이유이다.

適萬里者, 豫求驊騮騄駬之種, 必豊其芻豆, 整其鞍鞁, 然後可達燕楚之遠, 爲國家者, 豫養賢才, 赤何以異於此? 此讀書堂之所由作也.(적만리자, 예구화류녹이지종, 필풍기추두, 정기안비, 연후가달연초지원, 위국가자, 예양현재, 역하이이어차? 차독서당지소유작야.)

점필재 김종직의 처남이자 제자인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가 쓴 ‘讀書堂記’(독서당기) 앞부분으로, 그의 문집 ‘매계집(梅溪集)’ 권4에 있다.

세종은 뛰어난 인재를 선발해 휴가를 주고 마음껏 독서하도록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세조 때 잠시 폐지됐다가 성종 때 부활했다. 조위는 이때 채수·권건·허침·유호인·양희지 등과 함께 8인이 사가독서에 선발돼 인왕산 기슭 장의사에서 독서를 했다. 당시 사가독서를 위한 공간이 따로 없었다. 성종이 1492년(성종 23) 용산의 버려진 사찰을 수리하고 독서당으로 삼으면서 독서당 역사가 시작됐다.

독서당 낙성식은 1493년 5월 12일 열렸다. 이날의 실록에 따르면 성종이 독서당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기문(記文)을 붙였다. 그리하여 조위의 글은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조위의 이 글은 사가독서제를 통한 인재 양성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 제도는 미래의 국가 경영에 필요한 인재를 기르기 위한 제도임을 천명했다. 조선은 건국 후 인재 선발을 위해 과거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선발한 인재의 재교육에도 상당한 신경을 썼다.

필자는 조위의 이 기문을 읽다 끝부분 문장에 마음이 끌렸다. “오늘 한 권의 책을 읽고도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고, 내일 한 권의 책을 읽고서도 또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이 읽은들 무엇 하겠는가?(今日讀一書, 猶此人也, 明日讀一書, 亦猶此人也, 雖多, 亦奚以爲?(금일독일서, 유차인야, 명일독일서, 역유차인야. 수다, 역해이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