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용천(龍川)
압록강의 강구(江口)를 용만(龍灣)이라 한 데서 그 북쪽 기슭인 의주의 옛 지명이 용만이요, 그 남쪽 기슭인 용천도 용만이었다. 용만의 섬들이 용천의 산형(山形)과 이어진 것이 용이 굽이친 것처럼 보았던 데서 용만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선지 용천을 둘러싼 산도 용골산(龍骨山)이요, 그 용머리가 용안산(龍眼山)이며 감싸고 있는 샘이 용천(龍泉)으로, 이곳에 관가들이 모여 있다. 이 풍수용이 승천할 때 낸 발톱 자국이 나 있다는 용암(龍岩)이 있다. 풍수용이 지배하는 고을이라서인지 그 성쇠도 용과 무관하지 않다.
국경지대라 역사적으로 거란·여진·몽골·청나라의 침입에 맨 처음 짓밟힌 땅이요, 개화기에는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는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 기지였다. 따라서 외환과 재앙이 잦았고 그러했을 때마다 풍수용의 용안(龍眼)을 찔러 용을 놀라게 한 것으로 보았으며, 용골산성에 들어가 대치함으로써 풍수용의 보우를 받을 것으로 알았다.
용천에는 이색적인 석수(石獸)상 두 개가 있다. 전해오기로 잦았던 재앙을 풍수적으로 막기 위한 용천고을 사람들의 비원(悲願)이 서린 돌짐승인 것이다.
외래 문물에 자주 접한 탓으로 용천 사람들은 진취적이요, 옳고 그른 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1915년 조사에 보면 평안도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고을에서 서당이 104개로 가장 많았으며, 신식 학문을 가르치는 사립학교가 10개나 되었다.
3·1운동 때 전국적으로 시위밀도도 높아 28회에 2만7000명이 만세를 불렀고, 28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 아니라 1927년의 일본 농장을 상대로 한 그 유명한 소작쟁의는 용천 기질의 표출이다. 그 뭣보다 용천하면 상기되는 것은 종로 네 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차열형(車裂刑)도 마다 않겠다 전제하고 임금으로부터 말단 아전에 이르는 시폐(時弊) 상소를 올린 15세 소녀 기생 초월(楚月)이다.
숙종 때 올린 이 언론의 서슬은 전후 후무한 날카로움으로 역시 용천 기질의 표출이다. 지금 어떤 뭣이 풍수용의 눈을 깊이 찔러 이런 대참사를 야기시켰는지 민족 감정의 단절을 뛰어넘는 아픔의 공명(共鳴)이 메아리치고 있는 용천이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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