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梨花學堂舍

bindol 2022. 10. 24. 05:07

[이규태코너] 梨花學堂舍

조선일보
입력 2004.03.25 17:30
 
 
 
 

한국 근대 여성교육의 발상지인 이화학당의 초기 10여년 동안의 당사(堂舍)가 복원된다.

ㄷ자형으로 근 200평에 7개 방을 갖춘 기와집인 이 당사에 대해 당시 육영공사에 초빙돼왔던 길모어는 “설립자인 스크랜튼 부인이 커다란 한옥을 짓고 짧은 시간 안에 신교육을 받고 싶은 관심 있는 소녀들을 주변에 끌어모았다” 했다. 스크랜튼은 “내가 있는 어디서든지 가르쳐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내가 사는 집으로 학생을 모으되 우선 6명을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했으니 그 한옥은 선교사로 부임한 스크랜튼 부인의 사저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처음부터 그런 큰 집에 살았을 리는 없고 학교를 시작하고서 증축했을 확률이 높다. 학교문을 열자 여섯 아이는커녕 한 명의 학생도 나타나지 않아 1년을 허송한 후에야 나타난 첫 학생이 벼슬아치의 첩으로 민 황후가 영어통역을 할 부인을 필요로 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야심많은 여인이었다.

두 번째 이 당사에 맡겨진 학생은 기르자니 굶길 것 같고 팔아먹자니 나이가 어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가난뱅이의 딸이요, 셋째는 괴질로 시구문 밖에 버려진 죽어가는 소녀였다. 물론 이름도 없어 들어온 순서로 퍼스트·세컨드·서드로 이름을 삼았다.

 

초기 학생들은 그 당사에서 기숙, 수년간 나들이를 억제받았다. 먹고 살 수 없어 버려지다시피한 고아들인 지라 나갈 수도 없을뿐더러 집에 나가면 유언비어에 혹하여 돌아오지 않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학당 밖에 나가면 눈에 띄게끔 러시아산 붉은 천으로 치마 저고리 교복을 해 입혔고 부모가 보고 싶으면 학당에 찾아와 보게 했다. 부득이 집에 갈 일이 인정되면 기수(旗手)로 불리는 학당 수위에 업혀 집에 갔다가 다시 업혀 돌아오곤 했다.

초기의 이 이화학당사를 여염에서 양국관(洋國館)이라 불렀고 가르치는 신식학문을 천주학이라 했으며 이 한옥을 허물고 2층짜리 양옥이 들어선 것은 10여년 후의 일이었다. 만년에 문경새재에 은퇴해 살았던 김옥길 총장이 그곳에 118년 전 이화학당사 그 모습대로 짓고 연수용으로 개방하기도 했었다. 복원되면 우리나라 교육문화재요, 서양문화와의 접점 1호로 길이 각광받을 것이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