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코너] 貰冊本
옛날 책비(冊婢)라는 여성 직업이 있었다. 시장에서 빌린 필사본 이야기책 서너 권을 보자기에 싸들고 예약된 안방마님을 찾아간다. 본처인 큰 마님은 아랫목에 눕고 첩인 작은 마님들은 그 발치에 무릎을 세우고 앉는다.
그 세책(貰冊)에는 우는 대목과 웃는 대목이 나오는데, 우는 대목이면 소리를 죽여가며 우느냐 목놓아 우는냐 등등 약속된 36가지 부호가 표시돼 있어 36가지 목청을 달리해 가며 울리고 웃긴다. 마님들은 치마에 얼굴을 묻고 울어댄다. 책비에도 등급이 있었는데 한 번 울리는 책비는 솔 짠보, 두 번 울리면 매화 짠보, 다섯 번 울리면 난초 짠보라 했다. 짠보란 눈물로 적셔 짜게 찌든 치마를 뜻한 것일 게다.
이 세책에도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禁書)가 있었다. 사나이들을 발 아래 거느리는 여자 영웅「박씨전」, 여장하여 권문귀족의 여인들을 농락하는「사방지전」등이 그것으로, 들키면 속칭 팔거지악(八去之惡)으로 쫓겨났다. 원본을 베끼면서 보다 재미있게 변질시키게 마련이며 이 가필이 거듭되다 보니 원본과 다른 이본이 양산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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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랑의「한국문화사 서설」에 보면 책 세본은 담배쌈지나 망건 등 잡화상의 좌판 한쪽 구석에 놓고 세간살이를 잡고 5일장 돌아오는 동안 빌려주었으며, 책세가는 주로 몰락한 양반들인지라 언문책 파는 것을 창피하게 알고 숨겨놓고 빌려주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제위를 강탈당하고 창덕궁에 은거한 순종 황제는 궁녀에게 이야기책을 읽히며 소일했다. 언젠가 무슨 이야기책을 읽히는데, 임금이 호유오락에 빠져 민정을 돌아보지 않아 다른 나라에 빼앗겼다는 대목에 이르자 곁에 앉아 있던 천(千) 상궁이「어느 임금이던 그 따위 짓하면 나라가 견뎌내겠느냐」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이를 듣고 순종께서 벌떡 일어나 천 상궁의 뺨을 후려치며 볼멘소리로「괘씸한 것! 나를 빗대는 발칙한 소리를!」하며 진노했던 것이다. 황실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화의 종적 단면을 투영해주는 이 세책본을 500여권 국내외에서 수집·정리하고 현대어로 옮기는 학자가 있어 세책문화를 훑어 보았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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