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코너] 다운시프트와 선비
사모아의 한 추장(酋長)이 80년 전 유럽을 둘러보고 백인이라는 뜻인「파파라기」라는 기행문을 썼다. 거기에 보면 ‘파파라기는 긴 하루를 분(分)으로 쪼개고 다시 초(秒)로 잘라 쓸모없게 날려 버리는데, 작고 평평하며 둥근 기계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그것으로 찢어발긴다.
파파라기에게 여유란 없어 보였다. 악령이라도 씌듯이 던져진 돌멩이처럼 혼란을 일으키는데 어떤 마술사도 진정시킬 것 같지 않았다. 몇 살이냐고 자주 묻곤 하는데 그런 것 모른다고 하면 제 나이쯤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들 했지만, 모르는 것이 얼마나 좋은 줄 파파라기들은 가엾게도 모르고 살고 있었다.’ 분초로 시간을 잘라 거기에 노예가 되어 허겁지겁하는 가엾은 과속 인생에 대한 문명 비판이 아닐 수 없다.
캐나다의 매킨 교수는 미국의 주지사 대통령 그리고 노벨수상자 등 저명인 1672명에 대한 출세연도와 사망연령과의 관계를 조사, 젊은 나이에 빨리 출세한 사람일수록 과도한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가 누적된 데다 일단 얻은 위상을 유지하고자 무리하기에 불행이 가속되고 단명해진다고 했다. 빛 인생의 그림자를 통계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유럽의 파파라기들이 숨막히는 생존경쟁에 지쳐 느긋하게 인생을 즐기기 위해 획득해 놓은 고소득 고지위 고명예를 훌훌 벗어 버리고 유유자적한 나로 돌아가는 반문명 운동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주행에서 저속 기어로 바꾸는 다운시프트로 불리는 이 저속 반문명 운동은 우리 옛 선비의 생활철학이었다 해도 대과가 없다. 벼슬인 품계(品階)가 한 등 오르면 선비들 세 가지를 한 등 내리는 게 관례였다. 사는 집의 칸 수를 한 칸 줄이고 상에 오르는 찬을 한 가지 줄이며 한 해 걸러 옷을 지어입어 빨라지는 인생에 저항을 주었다.
또한 선비의 질을 따지는 십요(十要)도 다운시프트다. 이 열 가지 이외에 가져서는 안 된다는 선비살이의 조건이란 책 한 시렁·거문고 한 벌·친구 한 사람·신 한 켤레·베개 하나·창 하나·화로 하나·쪽마루 하나·지팡이 하나·나귀 한 마리면 족하다 했으니 선비는 다운시프트의 선각자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이규태 코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규태코너] 학력 사회악 (0) | 2022.10.26 |
---|---|
[이규태코너] 젓갈 문화론 (0) | 2022.10.26 |
[이규태코너] '발자국 指數 (0) | 2022.10.26 |
[이규태코너] 아침형 인간 (0) | 2022.10.26 |
[이규태코너] 부처간 인력교류 (0) | 2022.10.26 |